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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영 논리 프레임을 넘어선 새로운 학력에 대한 시대적 요구

글 _ 이혜정 교육과 혁신 연구소장

  교육은 법적으로 정치적 중립을 표방하지만, 태생적으로 가치 중립적이지 않다. 경제에서 성장과 복지(분배)라는 방점이 다른 두 가치처럼 교육에서도 학생의 성장과 복지의 두 가치 중 어디에 더 비중을 두느냐에 따라 보수와 진보 교육감으로 나뉜다. 대한민국은 지난 수십 년간 압축 경제 성장 정책을 폈고 그에 따라 교육도 학력 강화를 통한 성장 정책이 중심이었다. 그러다 급격한 경제 성장에 따른 부작용으로 복지에 대한 요구가 높아지는 사회 분위기에 맞물려, 교육에서도 학력, 수월성, 경쟁, 서열보다 학생 각자의 ‘꿈과 끼를 찾는 교육’, ‘아이들이 행복한 교육’ 등의 구호로 성장보다 복지가 중심 가치로 대두됐다. 이러한 사회적 인식 변화는 지난 10여 년간의 민선 교육감선거에서 그대로 반영되면서 진보 교육감 전성시대를 이뤘다. 그런데 올해 교육감 선거에서는 보수와 진보에 대한 국민의 표가 거의 반반으로 갈렸다. 어느 한쪽으로 쏠리지 말고 학생의 성장과 복지 간의 균형을 맞추라는 요구였다.


무엇을 학력으로 볼 것인가?

  그런데, 경제 성장은 세계적으로 공유되는 지표가 뚜렷한데 교육에서는 무엇을 학력으로 볼 것인지에 따라 성장의 방향이 달라진다. 이번 교육감선거가 기존과 뚜렷이 다른 점은 학력 강화를 주장하면서도 기존과 다른 학력 개념이 대두됐다는 것이다. 17개 시도교육청의 57명 교육감 후보 중, 12개 시도교육청의 17명 후보가 국제바칼로레아(IB)를 공약하거나 공개 지지 선언을 했다. 2019년부터 한국어화 계약을 체결하고 IB를 공립학교에 도입하기 시작한 대구시교육청, 제주도교육청에 더하여, 올해 IB를 공약한 교육감 후보 중 경기, 서울, 충남, 경남 교육감이 추가로 당선됐다. 최근에는 공약하지 않았던 부산시교육청도 IB 도입을 선언했고, 전남교육청, 전북교육청도 검토하고 있다.


  IB는 1968년 스위스에서 UN 주재원 자녀들이 본국의 대입 시험을 제대로 준비하지 못하자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인정받을 수 있도록 개발한 국제 공인 대입 시험 및 교육 프로그램이다. 국적이 없어서 태생적으로 어느 한 국가의 이데올로기나 가치만을 주입할 수 없고, 각 국가 및 지역의 특성을 매우 중시한다. 다만 각 국가의 로컬 이슈를 로컬만의 시각뿐 아니라 글로벌 시각으로도 동시에 바라볼 수 있도록 인식의 확장을 장려한다. 다른 생각들 간의 이해와 존중을 통해 보다 평화롭고 더 나은 세상을 만들도록 탐구심 있고 지력이 있으며 남을 배려할 줄 아는 사람을 양성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IB는 수능과 내신 모두 전 과목 논·서술/프로젝트 기반의 정성평가임에도 채점의 공정성을 전 세계 수천 개의 명문대에서 인정받아 현재 160여 개국에 확산되어 있다. 


  “다음 중 적절한 것은?”, “다음 중 시대 순에 알맞게 나열한 것은?” 유형의 문제가 아니라 “문학 작품은 허구임에도 불구하고 진실을 추구한다고 말할 수 있는지 학교에서 배운 작품 둘을 중심으로 2시간 동안 쓰시오.(국어)”, “동학혁명은 일본의 조선 병합을 불가피하게 만들었다는 주장에 대해 얼마나 동의하는지 2시간 동안 논하시오.(역사)”, “친구가 낮은 성적에 상심해 밤낮없이 공부하는데 병이 날까 걱정이다. 친구에게 걱정하는 이유와 함께 지혜롭게 대처하도록 제안하는 이메일을 영작해 보시오.(영어)” 등과 같은 문제가 IB 수능 시험이다. 이런 시험은 우리 수능과 다른 학력을 측정한다. IB가 화두가 되었다는 것은 무엇을 학력으로 볼 것인지에 대한 패러다임 전환이 시작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기존의 선다형 시험에서의 성취를 학력으로 보기보다 4차산업혁명 시대가 요구하는 새로운 종류의 역량이 학력으로 재개념화되고 있다. 



‘생각하는 힘’ 평가하는 새로운 학력 필요

  이러한 새로운 학력의 IB를 공교육에 도입하는 정책에 대해 각 시도의회 및 국정감사장에서 공방이 치열하다. 흥미로운 점은 같은 IB에 대해 비판 논리가 상이하다는 점이다. 경기도교육청은 보수교육감이 추진하려는 IB 교육에 대해 도의회 민주당 의원들이 귀족교육, 엘리트교육이라며 비판하는 반면, 제주도교육청은 보수교육감이 IB 교육 확대를 반대하려는 입장에 대해 도의회 민주당 의원들이 오히려 읍면 지역에 IB를 도입했더니 인구가 늘어나 지역 소멸 해소에 기여하고 있는데 왜 반대하느냐고 비판하고 있다. 2017년 IB 도입을 최초로 선언한 이석문 당시 제주 교육감은 1%의 학생만 받던 IB 교육을 99%에게도 받을 수 있게 하자는 기회균등의 원리로 한국어 IB 학교를 낙후된 읍면지역에 도입했다. 2011년부터 영어판으로 IB를 운영해 온 경기외고와 다른 모델이다. 현재 IB 도입을 추진하는 교육감도 경기, 대구, 부산은 보수 성향이지만, 서울, 충남, 경남, 전남은 진보 성향이다. IB 교육은 이미 진영 프레임을 넘어섰다. 


  새로운 학력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전 세계 유력 정치인들도 진영을 망라하여 강조하고 있다. 일본의 자민당 아베 신조 전 총리는 2013년에 IB 교육을 자국어로 번역하여 공교육에 도입하는 정책을 각의(국무회의) 결정으로 선포했다. 또한 일본에서도 수천만 원씩 학비 내는 국제학교나 사립학교에서만 운영되던 교육과정을 국가가 전체 자국어화하여 공립학교에 무상 도입함으로써 경제격차가 교육격차로 이어지는 고리를 해소하겠다는 논리도 덧붙였다. 


  미국 민주당의 람 임마뉴엘 전 오바마 대통령 비서실장은 시카고 시장이던 시절(2011-2019), 일반 학생들과 저소득층 학생들의 대입 격차가 20% 포인트 차이가 났던 것이 IB 교육 이후 3% 포인트로 감소된다는 연구 결과를 보고, 시카고 저소득층 공립학교에 정책적으로 IB 교육을 도입했다. 그는 경제와 교육에서의 격차 해소 전략으로 IB를 정책화했다.


  최근 영국 노동당 출신 토니 블레어 전 총리는 자국의 대입 시험인 에이레벨이 4차산업혁명 시대를 제대로 대비할 수 없다면서 IB를 참고하여 브리티쉬 바칼로레아 체제를 개발하자고 발표했다. 그는 복잡한 문제 해결에 암기식 공부가 아니라 비판적 창의적 교육이 유용하다는 PISA 결과를 인용하면서, 좁은 지식을 확인하는 수준의 논술 대입을 폐지하는 급진적 교육개혁을 주장했다. 보수당 출신의 존 메이저 전 총리도 지지 서명을 했다. 이미 전 과목 논술 대입 시험을 운영하고 있던 영국조차도 자국의 에이레벨이 더 지식 콘텐츠를 평가하고 IB가 보다 사고 역량을 평가한다면서 대입 개혁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IB 찬반 논의는 세계적으로도 이미 진보/보수 진영 프레임을 넘어섰다.



4차산업혁명 시대 우리에게 필요한 생존 역량은?

  4차산업혁명은 사회, 경제, 노동 시장을 엄청나게 변화시키기 때문에 자동화와 인공지능 시대를 대비한 생존 역량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이미 노동 시장에서 지난 수십 년간 반복적 업무 직업은 점점 사라지고 있고 비반복적 분석이나 대인관계 업무가 증가해 왔는데, 4차산업혁명은 이를 가속한다. 이제 직업들은 더 이상 사람들이 ‘뭘 알고 있는지’에 대해 보상해 주지 않는다. 알고 있는 지식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해 보상한다. 


  그런데도 우리는 대입 개편을 러시안 룰렛 돌리듯 미루고만 있다. 지난 정부에서 2028 대입부터 논술형 수능 적용을 검토한다고 발표했지만, 여전히 객관식 수능은 존치한 채 논술 문항 일부 추가 수준으로만 설계하려고 하고 있다. 현 수능 존치를 전제하면, 수업이 안 바뀌면서 평가만 추가되는 거라 학생은 혼란스럽고 사교육 시장은 폭발할 것이며 시대가 요구하는 역량은 제대로 길러질 수 없다. 개선이 아니라 개악이 될 것이다. 영국의 에이레벨은 전 과목 논술 평가임에도 보다 더 비판적 창의적 사고 역량을 평가하는 체제로 급진 개혁 주장이 나오는 판인데, 우리는 여전히 객관식 수능 존치를 전제하고 대입 개편안을 모색하는 시대착오를 반복하고 있다.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하고 변화를 두려워했던 구한말과 무엇이 다른가. 



한국형 바칼로레아로 평가 패러다임 전환

  IB 시범 도입의 궁극적인 지향점은, 전 과목 논술 및 프로젝트의 정성평가임에도 채점의 공신력을 갖춘 IB 평가체제를 참고해서 국가 전체의 수능과 내신 평가 패러다임을 선진화하는 가칭 KB(한국형 바칼로레아) 체제를 만드는 것이다. 10년 로드맵을 계획하여 글로벌 수준으로 공정하게 채점할 수 있는 채점관들이 우리 교사들로 양성된다면 수능과 내신 평가 패러다임 전환이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지식/정보 확인 위주의 객관식 수능을 폐지하고, 비판적, 창의적, 협력적, 소통적 문제해결 역량에 더 초점을 두어야 한다. 이미 진보/보수 양 진영에서 동시에 시작했으니 이제는 정쟁보다 교육부, 교육청, 국가교육위원회, 교육단체, 대학 등이 다함께 우리 아이들의 어떤 역량을 키울 것인지, 어떤 능력을 평가할 것인지, 미래 교육 방향에 대해 건설적인 논의를 시작하자. 구한말 근대화를 했어도 너무 늦게 해서 나라를 잃었던 어리석음은 반복하지 말아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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