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가 이끄는 교실혁명
특집 ① - 교실혁명,그 시작과 완성은 수업 혁신
특집 ② - 교사 주도성이 수업을 바꾼다
특집 ③ - 나를 성장시키는 학교 밖 전문적 학습공동체
특집 ④ - 디지털 기반 수업 혁신 이끌 ‘전문가’ 키운다
13,318개 학생 지원 서비스를 한눈에
초등교원 양성 규모 적정화 추진
독서교육통합플랫폼 ‘독서로’ 개통
저소득층 학생 7,000명에 장학금 지원
‘함께차담회’, 현장 의견 정책에 담는다
대학과 지역이 함께 첨단분야 인재 양성
교육을 회복하는 교권 보호 정책
교권회복을 위해 서로 존중하는 학교문화 만들어요
강정미 부산 하단중학교 수석교사 - 수업은, 놀 듯이 배움과 깨침을 이뤄내는 과정
마음과마음 심리상담센터 이은희 센터장 - 감정의 깊이를 시각적으로 통찰하다
하이터치 교사가 주도하는 하이테크 교실혁명
파주 한민고등학교 동아리 ‘걸어 다니는 생태도감(WHET)’ - 아는 만큼 사랑하게 되는 자연, 함께 지켜요
청소년 스마트폰 중독 실태와 치유
인천 옹진_ 장봉도 - 탁 트인 바다, 숲을 품은 트레킹의 천국
교육이 개인에게 미치는 영향은?
AI 기반 맞춤형 교육의 현황과 과제
장애 공감 문화로 사회통합 추진
교실혁명을 위한 현장과의 소통
제43회 스승의 날 기념식 - 다시 빛날 선생님의 길을 함께 걸어가겠습니다
초등학생 등굣길 사고 예방. ‘부산등굣길안심e’가 도와드립니다
교육과정박람회의 새로운 시도
학교 교육과 저작권 ②학교에서의 효과적인 저작물 활용법
학교 교육과 저작권 ①학교에서의 최근 저작권 이슈와 대책
위기의 특성화고 신산업 분야로 재구조화 추진 중
이달의 기사 전체보기
글·사진 | 최홍길 명예기자
여객선으로 10분 거리인 신시모도에 가려 장봉도는 그동안 빛을 보지 못했다. 하지만, 최근 인어 조각상이 들어서면서 관광객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장봉도는 마을 담벼락의 인어 벽화와 멀곶 구름다리까지 감상해야 제격이다. 산이 높지 않기에 바닷바람을 맞으며 산림욕을 즐기는 사람들로 평일은 물론, 주말에도 북적이는 이 섬을 찾았다. 삼목초등학교 장봉분교 이야기도 곁들인다.멀곶 구름다리장봉도 선착장의 인어 조각상한들 해수욕장 전경장봉도의 랜드마크 ‘인어 조각상’ 캐나다의 밴쿠버 가까운 곳에 ‘화이트 록’(White Rock)이라는 곳이 있다고 한다. 바닷가 주변에 산책할 수 있는 공원이 길게 이어져 있고, 산책로가 끝나는 지점에 커다란 바위가 하나 있는데, 그럴듯한 스토리텔링까지 가미되었기에 바위를 보려고 수만 명의 관광객이 몰려온다는 소식을 신문 기사에서 읽은 적이 있다. 인천의 장봉도(長峰島)라는 섬은 수도권에서 가깝지만, 그 존재감이 거의 없었다. 바로 옆의 신도·시도·모도가 수도권에서 더 가깝기도 하거니와 세 개 섬이 서로 연결되어 볼거리가 풍성하다 보니 장봉도까지 발길이 이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최근, 장봉도 옹암 선착장 부근에 인어상이 만들어진 이후 인어 조형물이 이 섬의 랜드마크로 자리 잡으며 많은 관광객이 찾고 있다. 옛날 어느 때인지는 잘 알 수는 없어도 장봉도 어장에서 어떤 어부가 그물을 걷어 올렸는데, 상체는 여자와 같이 모발이 길고 하체는 고기와 흡사했다. 뱃사람들은 그 인어를 측은히 여기고, 산 채로 바다에 다시 넣어주었다고 한다. 이후 그 뱃사람들은 그곳에서 사흘 동안 많은 고기가 잡히자, 그 인어를 살려준 보은으로 여기고 감사하였다고 전한다. 방금 배에서 내린 사람들도, 섬 구경을 다 마치고 육지로 나가려는 사람들도 인어 조각상 앞으로 몰려든다. 인어 아랫부분의 끄트머리에는 바다에서 따온 소라 두 개도 놓여 있다. 사진을 찍으려면 줄을 서야 할 정도이다. 나이 지긋한 어머니
전남 신안 ‘제2의 제주도’를 꿈꾸는 자은도
백길 해수욕장 보석같이 아름다운 1004개의 섬이 있는 전남 신안군. 그 중 특히 주목할 만한 섬을 꼽자면 ‘자은도(慈恩島)’이다. 한 섬에 큼지막한 해수욕장이 무려 아홉 개나 있기 때문이다. 규모가 작은 곳까지 포함한다면 셀 수 없다. 게다가 어떤 집의 앞마당에도 작은 해수욕장이 있을 정도이다. ‘제2의 제주도’를 꿈꾸는 자은도의 여행 매력은 시간이 지날수록 한층 풍성해진다.무한의 다리(사진| 전남 관광정보센터)여인송 70여 개의 유인도와 수백 개의 무인도를 포함해 1004개의 섬을 갖고 있기에 전남 신안군은 ‘천사의 섬’으로도 불린다. 백제 멸망 이후 변방, 비주류 게다가 벽지였기에 외지인들의 발길이 뜸할 수밖에 없었던 신안의 섬들. 하지만 최근 ‘천사대교’의 개통으로 수많은 관광객이 이곳을 찾고 있다.7.2km에 달하는 이 다리를 자가용으로 9분 가까이 달리는 동안 점점이 박힌 섬들과 그 주변의 경관에 감탄사를 연발하지 않을 사람은 없으리라. 이제 관광객들은 여객선을 이용하지 않고도 대교 건너 10개의 섬 자은도, 암태도, 추포도, 팔금도, 매도, 안좌도, 박지도, 반월도, 자라도, 부소도 등을 볼 수 있다. 그중 요즘 SNS에 자주 오르내리는 가장 핫한 곳을 꼽자면 단연 자은도이다.청동기 유적인 지석묘가 있기에 자은도에서도 아주 오래전부터 사람이 살고 있었다고 학자들은 말한다. 천사대교를 거쳐 은암대교를 건너자 ‘역사와 자연관광의 자은’이라는 표지석이 따스하게 다가온다. 글자 그대로 사랑(慈)과 은혜(恩)의 섬으로 느껴진다.여인송을 아시나요? 구영리는 면 소재지 마을로, 뒤쪽에 두봉산(斗峰山)이 있다. 이곳의 토박이들은 유독 우리말을 즐겨 사용한다. 그래서 두봉산이 아니라 말봉산으로 부른다. 인근 암태도에 승봉산(升峰山)이 있는데, 되봉산으로 부르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말봉산과 되봉산의 높이 차이는 고작 8m뿐이다. 천사대교 개통 이후, 산을 좋아하는 애호가들이 전세버스를 임대해 이 두 산을 오르는 모습도 심심찮게 볼
조선 후기 사대부 가옥 - 선교장의 겨울 정취
글·사진 김혜영 여행작가
300년 전 효령대군 11대손 이내번이 경포호숫가에 ‘선교장’이라는 저택을 지었다. 만석꾼이었던 이내번과 자손들이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덕에 선교장이 품격 있는 강릉 대표 고택으로 자리매김한 것 같다. 겨울에는 한옥과 뒷산 솔숲이 어우러진 설경이 매우 아름답다. 강릉에 눈 소식이 들리면 가장 먼저 달려가고픈 곳이다.강원 강릉 선교장 활래정 설경강릉 최고 부잣집이었던 선교장 큰 부자는 하늘이 내린다고 했던가. 세종대왕 둘째 형인 효령대군의 11대손 이내번(1703~1781)을 두고 한 말 같다. 이내번이 불현듯 나타난 족제비들을 따라갔다가 명당을 발견하고 그 터에 선교장((船橋莊:중요민속자료)을 지었더니, 대대로 집안이 번창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옛날 강릉에서 한양까지 갈 때 선교장 땅만 밟고 가도 갈 수 있다는 말이 생길 만큼 선교장의 재력이 대단했다고 한다. 지금도 본채만 100여 칸이 넘고, 부속건물까지 합하면 280여 칸에 달한다. 선교장이 처음 지어졌을 당시에는 경포호수가 지금보다 세 배쯤 넓었다. 아마도 선교장 바로 앞까지 경포호수 물이 찰랑댔던 모양이다. 경포호수를 가로질러 배로 다리를 만들어 건너다녔다 하여 ‘선교장’이라 이름 붙었다. 뒷산에는 수령 300~600년 된 금강송이 선교장을 병풍처럼 에워싸고 있다. 솔숲 오솔길에서 바라본 선교장 설경이 담백한 수묵화 같다. 99칸 저택이 눈 이불을 덮고 겨울잠을 자는 듯 사방이 고요하다. 사대부가의 생활 모습을 엿볼 수 있는 선교장의 유물전시관 내부여느 사대부 가옥과 다른 선교장의 건축 특징 선교장은 건물 구조가 여느 사대부 집들과는 다른 독특한 개성을 지녔다. 선교장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이 인공호숫가에 세워진 활래정이다. 조선 후기 선비들이 운치에 반해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었다는 그곳이다. 이름을 들으면 알만한 추사 김정희, 규원 정병조, 해강 김규진 등 당대를 대표하는 서화가들이 활래정을 거쳐 갔다
600년 전 지상에 세운 달나라 궁전 - 광한루원
옛날 사람들은 꽤 낭만적이었던 것 같다. 은하수 너머 달나라 궁전에 옥황상제와 선녀가 살고, 견우가 직녀가 은하수에 놓인 오작교에서 만난다고 상상했으니 말이다. 조선 시대 사람들의 이런 상상을 현실 세상에 구현한 것이 광한루원이다. 광한루원은 그들의 세계관과 우주관이 반영된 건축물이자 오랜 세월에 걸쳐 완성된 작품이었다.광한루를 처음 세운 황희 정승 흔히 광한루와 광한루원을 혼용한다. 광한루(보물)는 광한루원의 중심 건물로서 누각 한 채를 일컫는다. 광한루원(명승)은 광한루를 비롯해 연못, 오작교, 완월정, 춘향사당, 춘향관, 월매집 등을 포함한 누원 전체를 말한다. 광한루를 처음 세운 이는 조선 시대 청백리로 이름난 황희(1363〜1452) 정승이다. 황희는 태종의 장남 양녕대군 폐위와 충녕대군 왕세자 책봉을 반대하다 태종의 눈 밖에 나, 남원에 유배됐다. 유배된 이듬해인 1414년(태종 14년), 남원 요천 강변 부친의 서재 터에 ‘광통루’라는 작은 누각을 세웠는데, 이것이 광한루의 전신이 되었다. 황희가 세종의 부름을 받아 관직에 복귀한 뒤, 남원 부사 민여공이 광통루를 큰 누각으로 고쳐 지었다. 하동부원군 정인지는 ‘광한루’로 이름을 고쳤다. 남원 부사 장의국은 요천 물을 끌어다 연못을 만들고, 오작교를 세웠다. 선조 때 전라도 관찰사 정철은 연못에 섬 세 개를 만들어 상상 속 달나라 궁전을 완성했다. 세 섬은 각각 한라산, 금강산, 지리산을 의미하며 지상낙원을 표현한 것. 섬 사이에는 나무다리를 놓았다. 만약 옛날에 나무다리가 없었다면, 은하수를 건너는 하얀 조각배 같은 나룻배를 띄워 연못을 건너지 않았을까. 광한루원은 정유재란 때 불에 타 소실되기도 하고, 1960년대까지 재건과 보수를 거듭했다. 수백 년에 걸쳐 완성된 작품임을 알고 나면 돌덩이 하나도 허투루 보이지 않는다. 전북 남원 광한루원 완월정 야경사랑이 싹트는 공간 광한루는
마음을 비우며 걷는 문경새재 단풍 숲길
아무 생각 없이 걷고 싶을 때가 있다. 길 잃을까, 돌부리에 넘어질까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숲길이면 좋겠다. 기왕이면 단풍빛도 고왔으면. 그래서 고른 곳이 문경새재 옛길이다. 새도 넘기 힘들었다던 그 험한 고갯길이 지금은 누구라도 걸을 수 있을 만큼 훤해졌다. 옛길에 전해오는 옛이야기는 감칠맛 나는 양념 역할을 한다.10월 중하순경 문경새재에 단풍이 무르익는다.옛 선비들이 간절한 소망으로 걷던 길 문경새재는 조선 태종 때 조성한 영남대로(한양~부산 동래)의 고갯길이다. 영남에 사는 선비가 한양으로 과거를 보러 갈 때 영남대로를 이용했는데 문경새재, 추풍령, 죽령 중 한 고개를 선택하여 넘어야 했다. 선비들은 가장 험한 문경새재를 선호했다고 한다. 이유인즉, 소문에 추풍령은 추풍낙엽처럼 시험에 낙방하고, 죽령은 대나무처럼 죽죽 미끄러지고, 문경은 ‘좋은 소식을 듣는다’는 뜻을 지녀서라고. 황당한 소문에 기댈 정도로 과거급제가 간절했기 때문이리라. 중요한 시험을 앞둔 수험생과 학부모는 옛 선비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지금의 문경새재는 도립공원으로 조성되어 전 구간이 평지에 가깝다. 바닥을 고르게 잘 다져 맨발로 걸을 수 있는 구간도 있다. 울창한 숲은 어느 계절에 걸어도 좋지만, 가을을 최고로 꼽는다. 문경새재 길가에 누군가의 소원을 담은 수많은 돌탑이 쌓여 있다.문경새재를 지키는 세 개의 관문 문경새재 주차장에서 은행나무 가로수길을 1.3km 정도 걸어 들어가면 제1관문인 ‘주흘관’이 보인다. 영남에서 한양으로 갈 때 맨 처음 통과하는 관문이다. 성벽에 주흘관을 지은 석공들의 이름과 개축 연도를 새긴 기록이 남아있다. 문경새재가 조성될 당시에는 관문이 없었다. 임진왜란 때 왜군이 문경새재를 수월하게 넘어 한양을 함락한 사건 이후 약 100년에 걸쳐 제2관문 조곡관, 제3관문 조령관, 제1관문 조흘관을 차례로 지었다. 그런데 관문을 세운 뒤로는 문경새재를 넘는
물길 따라 걷는 영동 쉼표 여행
충북 영동에서도 황간면은 고요한 시골 마을이다. 읍내에 오일장이 서도 붐비는 기색이 없을 정도다. 전국에 유명 관광지와 핫플레이스가 넘치는 요즘, 굳이 영동을 찾는 이유는 휴식 같은 여행을 하고 싶어서다. 반야사와 월류봉을 감싸고 흐르는 물길을 따라 걷다 보면 일상의 스트레스가 함께 씻겨 내려가는 것 같다. 문수전과 반야사를 잇는 전각 뒷편 숲길에서 본 풍경백화산 봉우리를 병풍 삼은 반야사 영등포역에서 출발한 무궁화열차가 하루 다섯 번 황간역에 선다. 첫 열차를 타고 황간역에 도착하면 일단 역 근처 단골 식당에 들른다. 영동 향토 음식인 올뱅이국밥을 먹기 위해서다. 충청도 사람들은 다슬기를 올뱅이(올갱이)라 부른다. 된장 국물에 아욱과 부추와 다슬기를 넣고 푹 끓인 올뱅이국밥이 아침 빈속을 부드럽게 달래준다. 첫 목적지인 반야사는 군내버스로 가기 힘든 곳이어서 콜택시를 탄다. 읍내에서 반야사까지 차로 약 10분 거리이지만, 시골길이라 꽤 길게 느껴진다. 석천계곡의 반야호와 나란히 이어지는 반야사 진입로 숲길이 아름다워 일주문에 못 미쳐 내린다. 숲길과 호수 같은 계곡을 번갈아 감상하며 천천히 걷는다. 백화산자락은 호수에 잠기고, 봉우리는 운무에 가려 운치를 더한다. 숲에 둘러싸인 일주문을 통과해 5분 정도 더 걸어 들어가면 반야사 절 마당에 닿는다. 반야사는 신라 시대 사찰로 전해오며 규모는 아담하다. 대웅전 앞마당에서 보이는 백화산의 호랑이 형상이 여전하다. 산 중턱 돌무더기가 흘러내려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형상인데, 곧추선 꼬리까지 선명하다. 반야사 호랑이가 유명해도 이맘때는 극락전 앞 삼층석탑과 500살 먹은 배롱나무 두 그루가 더 눈길을 끈다. 7월에 개화해 9월까지 약 100일 동안 피고 진다는 배롱나무꽃이 붉은 등을 켠듯 마당을 환하게 밝힌다. 여름 장마와 태풍과 무더위를 견딘 배롱나무꽃은 나풀나풀 꽃잎을 떨구기 시작한다. 삼층석탑과 극락전 주변 바닥이 불그
한국 속 작은 독일 남해독일마을
1960년대 우리나라는 6·25전쟁을 겨우 벗어난 가난한 나라였다. 끝이 보이지 않는 가난을 벗어나 보려고 젊은 광부와 간호사들이 독일 파견을 자원했다. 수십 년이 흐른 뒤 그들은 백발이 되어 귀국했다. 고국에서 여생을 편히 쉬기 위해 선택한 땅은 남해 바다와 일출이 보이는 삼동면 물건리 산비탈. 그들이 독일 건축 양식으로 손수 지은 보금자리가 지금의 독일마을이다. 독일마을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독일광장. 관광안내소, 기념품숍, 독일음식점 등이 있다.독일로 파견된 광부와 간호사들 파독 광부와 간호사들은 왜 독일행을 선택했을까. 당시 우리나라는 아시아 최빈국 중 하나였다. 실업난이 심각했으며 나라 경제를 살릴 돈이 없었다. 차관을 빌리기도 어려웠다. 마침 독일은 복지 정책이 막 확대되던 때라 간호사와 기피 업종인 광부가 매우 부족했다. 정부는 독일에 광부와 간호사를 파견하는 조건으로 차관을 빌리는 데 성공했다. 1963년 파독 광부 모집에 온 나라가 들썩였다. 광부 300명 모집에 46,000명이 지원했던 것. 지원자 중에 고학력자도 많았다. 파독 광부 월급이 국내 사무직 월급보다 10배 정도 많았기 때문이다. 경쟁이 치열해 시험과 체력 검사를 통과해야 선발될 수 있었다. 어렵사리 독일에 도착한 그들 앞에 현실은 냉혹했다. 파독 광부들은 1,200m 깊이의 갱도에서 작업했다. 지열로 뜨거워진 공기와 석탄 가루를 마시며 50kg이 넘는 장비를 사용해야 했다. 장화를 거꾸로 세우면 땀이 물처럼 쏟아졌다. 어린 파독 간호사들의 사정도 다르지 않았다. 시체를 닦거나 몸을 가누지 못하는 중증 환자를 돌보는 일을 도맡았다. 파독 근로자 상당수가 월급을 받으면 최소한의 생계비만 남기고 모두 고국에 보냈다. 그 돈은 형제자매의 학비로, 부모의 논밭 구입비로 쓰였다. 국가적으로는 1963년부터 1975년까지 파독 간호사 13,000여 명, 파독 광부 8,000여 명이 벌어들인 외화가 경제 성장의 종잣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