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국가 책임교육의 출발, 유보통합
특집 ① 질 높은 교육과 돌봄을 위한 ‘유보통합’
특집 ② 위례아이숲어린이집, 서울송파위례유치원 탐방! ‘우리 모두의 아이’를 위한 첫 번째 자람터
특집 ③ 학부모의 목소리를 듣다
특집 ④ 유보통합으로 ‘책임교육·돌봄’ 실현
특집 ⑤ 해외에서는 어떻게 유아교육·보육이 이뤄질까?
지역혁신중심 대학지원체계(RISE) 구축
올해 국가장학금 4조 4,447억 원 지원
초등학교 주변 안전한 통학로 만들어요!
“다시 시작되는 학교, 안심하고 보내세요!”
AI 디지털교과서 도입… ‘디지털 기반 교육혁신 방안’ 발표
2025년부터 유보통합이 교육부와 교육청 중심으로 본격 시행됩니다
김경성 푸른나무재단 이사장 - 학교폭력 예방은 아픔을 공감하는 훈련에서 시작
괴산군 청소년문화의집 봉사동아리 ‘은가비’ - “모든 인생은 역사가 된다”
로봇 윤리학자_ 김종욱 동아대학교 전자공학과 교수 “로봇에게 윤리란 필수 불가결한 일이죠”
갈등을 관리하는 최선의 길
3년 만에 벗은 마스크, 이젠 소통이 필요한 때
다산 정약용과 강진 백운동 원림이 차茶로 맺은 인연
‘댕댕이’는 ‘커엽’다
환경과 융합한 지리 교과캠프 - ‘우리 동네 에코매핑’
2023 학교 환경교육 국제 콘퍼런스 - 기후위기 최선의 대처법, 교육
'2030 부산월드엑스포' 유치 염원 담아 연 날립니다!
특성화고 졸업생, 새내기 선생님을 소개합니다
우리집 소화기, 어디에 있을까요?
기초학력 진단보정시스템으로 기초학력진단체계 고도화 실현
졸업을 축하합니다(Tonight is your night)!
활동 중심 수업 'The. 미.나.리.게임'을 소개합니다
학생작가 양성으로 생활 인문 교육 꽃피우다
단성학교에서 남녀공학으로 바뀐 첫 해, 입학식 풍경~
저자 인세 기부, 체육 선생님들의 선한 영향력
이달의기사 전체보기
글·사진 김혜영 여행작가
강진에 유배 중이던 다산 정약용이 어느 날 제자들과 월출산에 올랐다. 하산길에 백운동 원림에 들러 하룻밤을 묵었다. 이곳에 반한 다산은 다산초당에 돌아와 제자들과 함께 백운동 원림을 시와 그림으로 기록한 ‘백운첩’을 지었다. 다산의 마음을 사로잡은 풍경은 무엇이었을까.계곡과 마당을 잇는 유상곡수가 마당을 가로질러 조성되었다.월출산 백운계곡에서 조선 시대 ‘비밀의 정원’과 만나다 백운동 원림(국가 명승)은 월출산 남쪽 백운계곡 산자락에 자리 잡았다. 조선 중기 선비 이담로(1627~1701)가 은둔하려고 지은 별장답게 동백나무, 비자나무, 대나무, 상수리나무 등이 우거진 계곡 숲길을 통과해야 비로소 모습을 드러낸다. 숲은 깊고 고요하며, 3월에도 짙푸르다. 어둑한 동백나무 터널을 지날 때는 비밀의 문을 통과하는 것 같다. 동백나무 터널을 지나자 ‘白雲洞(백운동)’이 새겨진 바위가 길목을 지키고 섰다. 바위 뒤로 백운동 원림의 돌담과 솟을대문이 보인다. 솟을대문 안으로 들어서니, 안뜰에 봄볕이 가득하다. 화단의 늙은 매실나무, 배롱나무, 감나무가 졸음에 겨운 듯하다. 산비탈을 깎아 만든 경사면에 소박하게 지은 초가 사랑채와 본채가 자리했다. 안뜰을 가로지르는 유상곡수(流觴曲水)에서 집주인의 감성과 취향이 엿보인다. 계곡물을 마당으로 끌어오기 위해 아홉 굽이 물길과 작은 연못을 만들고, 물 위에 술잔을 띄우며 풍류를 즐겼을 것 같다. 유상곡수의 정자에 앉아 볕을 쬐고, 담장 쪽문을 통해 정선대가 있는 언덕에 오른다. 정선대 앞에 서니 정면에 백운동 원림 전경이 펼쳐진다. 불꽃같이 뾰족뾰족한 월출산 옥판봉을 병풍 삼고, 울창한 계곡 숲을 정원처럼 거느린 명당이다. 이담로가 이 터를 낙점한 이유를 알겠다. 백운동 원림의 소문을 듣고 조선 중·후기 문인들이 찾아왔는데, 다산 정약용(1762~1836)도 그중 한 명이다. 무위사 삼층석탑과 국보로 지정된 극락보전강
조선 왕릉에서 오랜 사연을 듣다 - 경기도 화성 융릉과 건릉
글 · 사진 _ 김혜영 여행작가
융릉과 건릉에 방문한 날, 겨울비가 보슬보슬 내렸다. 을씨년스러울 것이라 예상했던 산책로에 운치가 가득했다. ‘신들의 정원’이라 불리는 왕릉은 신성한 공간이었기에 왕릉 주위에 울창한 숲을 둘러 보호했다. 조선 건국 이래 수많은 국난을 겪었는데도 모든 조선 왕릉과 숲이 온전할 수 있었던 건 명당이어서일까, 왕릉을 지키고자 했던 이들의 노력 덕분일까. 소나무가 우거진 화산 서쪽 언덕에 정조의 능인 건릉이 조성돼 있다.화산에 나란히 묻힌 사도세자와 정조 519년을 이어온 조선과 대한제국에는 27명의 왕과 황제가 있었고, 왕릉 42기가 전해온다. 조선왕조의 역사가 깊은 만큼 왕릉에 얽힌 사연도 구구절절하다. 이중 ‘비운의 왕세자’ 사도세자(1735~1762)와 ‘개혁군주’ 정조(1752~1800)의 이야기가 전해오는 ‘융릉과 건릉’을 찾아갔다. 융릉은 장조(사도세자)와 헌경왕후 홍씨(혜경궁)의 능이고, 건릉은 정조와 효의왕후 김씨의 능이다. 두 능이 화산 중턱의 동쪽과 서쪽 언덕에 마주 보듯 조성돼 있다. 사도세자의 무덤은 원래 서울 동대문에 있었는데, 효심 깊은 정조가 왕위에 오른 뒤 지금 자리로 옮기고 무덤의 격을 올렸다.창건 초기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는 용주사 대웅보전융건릉역사문화관의 실내 전시물 정조는 융릉을 조성할 때 많은 공을 들였다. 지관들에게 천하 명당을 찾게 하고, 당대 최고 조각가에게 석물 조각을 맡겼다. 융릉의 병풍석에 새겨진 모란과 연꽃 문양이 화려한 이유이다. 이것으로 모자라 정조는 자신이 죽으면 아버지 옆에 묻어달라고 유언했다. 죽어서라도 부자간의 정을 나누고 싶었으리라. 건릉은 정조가 세상을 떠난 뒤 융릉 동쪽 언덕에 조성되었다. 1821년(순조 21) 효의왕후를 합장하려 할 때 건릉 자리가 풍수상 불길하다고 하여 지금의 서쪽 언덕으로 옮겨졌다. 솔숲 지나 사도세자를 만나러 가는 길 융릉과 건릉 매표소를 통과해 융건릉역사문화관을 지나면 갈림길이 나온다. 융릉은 오른
공룡 발자국 화석이 알려주는 비밀 - 경남 고성 상족암군립공원
경남 고성 하이면 덕명리 바닷가에서 수많은 공룡 발자국을 만났다. 약 1억 5천만 년 전, 그러니까 인류가 나타나기 훨씬 전인 중생대 백악기 때 찍힌 발자국이다. 공룡들이 호숫가를 거닐며 발자국을 남겼고, 그 발자국이 오랜 세월 땅속에 묻혀 있다가 드러난 것. 발가락이 또렷하게 찍혔을 정도로 자국이 생생했다. 발자국 크기, 깊이, 간격 등을 요리조리 살피며, 발자국 주인을 상상해봤다. 제전마을 상족암오토캠핑장 앞에서 상족암까지 이어지는 해안 데크 산책로. 산책로 밑에 공룡발자국이 찍힌 암반이 펼쳐져 있다.한때는 공룡의 낙원이었던 고성군 만약 지구에 공룡 화석이 남아있지 않았다면, 우리가 공룡에 관해 잘 알 수 있었을까. 공룡 뼈 화석은 공룡이 죽은 이유를 찾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되고, 공룡 발자국 화석은 공룡의 행동을 밝히는 데 도움 된다고 한다. 공룡 발자국을 분석해 육식공룡인지 초식공룡인지, 얼마나 빨리 달리고 걸었는지, 싸울 때 발가락을 어떻게 사용했는지 등을 알아낸다. 우리나라에도 공룡 발자국이 매우 많다. 놀랍게도 세계 최대 규모의 중생대 백악기 공룡 발자국 화석 산지라고 한다. 중생대 백악기 때 한반도가 강과 호수가 발달한 지형이어서 공룡이 서식하기 좋은 환경이었기 때문이라고. 특히 전남 여수·해남·화순·보성, 경남 고성 등의 남해안 일대에 공룡 발자국 화석이 집중돼 있다. 이런 이유로 ‘KCDC(한국의 백악기 공룡 해안)’라는 이름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잠정 등록됐다. 공룡 발자국이 국내 최초로 발견된 경남 ‘고성 덕명리 공룡과 새발자국 화석산지’에는 약 6km의 해안선에 육식·초식공룡 발자국 약 3,800개가 찍혀 있다. 두 종류의 새발자국 화석도 보인다. 화석 양과 다양성 면에서 세계적인 수준이어서 이곳을 천연기념물로 지정·보호하고 있다. 상족암 해식동굴은 인생사진 포토존으로 소문났다.땅속 공룡 발자국이 세상에 드러나기까지 ‘고성 덕명리 공룡과 새
신라 화랑의 마음을 사로잡은 속초 - 영랑호를 걷다
속초는 호수 부자다. 북쪽에 영랑호, 남쪽에 청초호를 품었다. 두 곳 모두 바다가 오랜 세월에 걸쳐 만든 석호이다. 외곽에 있는 영랑호는 시내 쪽 청초호보다 자연 풍광이 아름답고 호젓하다. 옛 기록에 많이 등장해 역사 관련 얘깃거리도 풍성하다. 옛사람들이 반했던 영랑호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영랑호 둘레길을 걸으며 당시 풍경을 상상해본다. 늦은 오후 영랑호 생태 데크쪽에서 범바위 방향으로 바라본 풍경신라 화랑의 수련장이었던 영랑호 영랑호 이름은 신라 화랑 ‘영랑’에서 비롯됐다고 전해온다. 영랑이 금강산에서 수련을 마치고 무리와 함께 동해안을 따라 경주(서라벌)로 돌아가던 길이었다. 속초쯤에 이르러 우연히 한 호수를 발견하고는 경치에 반해 경주에 가는 것조차 잊고 오래 머물렀다. 이때부터 사람들이 이 호수를 ‘영랑호’라 불렀다고 한다. 영랑호는 이름이 여러 번 바뀐 청초호와 달리 한 번도 바뀌지 않은 걸 보면, 옛사람들이 영랑호와 영랑의 인연을 꽤 중시했던 모양이다. 범바위의 다채로운 모습을 볼 수 있는 포토존. 영랑호 둘레길에 있다. 영랑이 다녀간 뒤로 영랑호는 화랑들의 수련장으로 이용됐다. 이 사실에 착안해 호수 북쪽에 화랑도체험관광단지가 들어섰다. 이곳에서 화랑들이 수련할 때처럼 활쏘기, 승마, 격구 등을 체험할 수 있다. 영랑호는 화랑들뿐만 아니라 고려·조선시대 문인들의 마음도 사로잡은 듯하다. 고려시대 안축과 이곡, 조선시대 정철, 김창흡, 구사맹, 이몽규, 이상질, 이세구 등 많은 문인이 시문집에 영랑호를 담았다. 2016년에는 영랑호 동북쪽 둘레길 옆(속초시 장사동 647-49)에서 조선 후기 학자 송시열이 ‘영랑호’를 새긴 바위가 발견됐다. 바위 동쪽 면에 ‘영랑호(永朗湖)’라고 석 자가 세로로 새겨져 있다. 1675년 송시열이 함경도로 귀양 갈 때 영랑호를 지나다가 풍경에 감탄하며 글자를 남긴 것으로 추정한다. 글자가 마모되고 안내판이
돌담 따라 물길 따라 마을 산책 - 아산 외암민속마을
송악면 설화산 자락 외암민속마을에 들어서자 짚 태우는 냄새가 난다. 늦가을 시골 마을에서 맡을 수 있는 정겨운 향이다. 추수가 끝난 마을 앞 다랑논에선 허수아비들이 두 팔 벌려 반긴다. 논두렁 뒤 구릉에 터 잡은 초가들이 올망졸망 늘어서 가을볕을 쬔다. 초가와 기와집 사이로 난 돌담길에 삐죽이 고개를 내민 감나무들이 까치밥을 대롱대롱 남겨두고 겨울을 기다린다. 500년 전통 예안 이씨 집성촌 외암민속마을은 예안 이씨들이 조선 명종 때부터 약 500년 동안 사는 집성촌이다. 양반 고택과 초가 등 전통가옥 60여 채가 조선 후기 향촌 모습을 잘 보존하고 있다. 마을 사람들은 농사짓고, 해마다 초가지붕을 새로 올린다. 정월 대보름 달집태우기, 장승제, 짚풀문화제 같은 전통 행사와 세시풍속을 살뜰히 챙긴다. 달집태우기는 전국에서 구경꾼들이 모일 정도로 성대하게 치러진다.마을 입구에서 바라본 계단식 논과 초가들 남향으로 자리 잡은 마을 앞에 ‘앞내’라 불리는 실개천이 흐른다. 마을 동북쪽으로는 설화산이 우뚝 솟았다. 풍수지리를 모르는 까막눈이어도 배산임수 지형임을 눈치챈다. 앞내에 놓인 다리를 건너 마을에 들어서자, 눈이 부리부리한 장승 한 쌍이 맞아준다. 장승 아래에는 할머니들이 자리를 펴고 앉아 쑥떡, 감, 나물 같은 먹을거리를 판다. 장승 오른쪽으로는 계단식 논이 넓게 펼쳐진다. 추수 마친 논이 논두렁에서 뛰노는 아이들의 웃음소리로 가득하다.엿장수도 길 잃는 긴긴 돌담길 투호, 굴렁쇠, 윷놀이를 즐기는 사람들을 뒤로하고 골목 안으로 들어선다. 집마다 납작한 돌로 쌓아 올린 돌담을 둘렀다. 돌담 위에 단풍 든 담쟁이덩굴과 호박이 넉살 좋게 올라앉았다. 돌담을 모두 이으면 길이가 5.3㎞나 된다고 한다. 옛날에 엿장수가 이 마을에 엿을 팔러 왔다가 돌담이 길어 길을 잃었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다. 여행자는 그저 길고 긴 돌담이 이끄는 대로 걷는다. 돌담 너머 보이는 감나무, 살구나무, 은행나무, 밤나무 덕에 마을이
걸어서 전주한옥마을 한 바퀴
전주한옥마을이 예스럽지 않은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전주한옥마을은 1910년부터 전주 풍남동 일대에 조성된 도심 근대·한옥촌이기 때문이다. 700여 채의 한옥과 고려·조선·근대 역사를 보여주는 사적지와 韓 스타일을 체험할 수 있는 문화 시설이 한데 어우러져, 즐길 거리가 풍성한 한옥마을로 성장했다. 전주한옥마을만 제대로 둘러보려 해도 하루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걷기 좋게 단장한 전주한옥마을전주한옥마을의 정신적 지주, 경기전 오랜만에 전주한옥마을에 들렀더니, 어수선했던 거리가 말끔해졌다. 새로 단장한 골목길에 한옥 숙박 시설, 100여 개의 공예·음식·공연·문화 체험 시설, 박물관, 전시관, 찻집, 기념품가게가 가지런히 늘어섰다. 경기전, 전동성당, 오목대, 풍남문 등의 사적지와 신·구 한옥과 상가가 조화를 이루며 전주한옥마을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듯 보였다. 전주한옥마을은 경기전이 있는 태조로를 기준으로 골목들이 모세혈관처럼 연결돼 있다. 경기전 뒤쪽 오래된 골목길은 여전히 미로 같다. 길을 잃은 듯 헤매며 둘러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헤매더라도 전주한옥마을의 심장이라 할 수 있는 경기전은 꼭 들러야 할 곳이다. 경기전은 조선 태종이 태조 이성계의 어진(국보 제317호)을 모시기 위해 지은 건물로서 전주의 자부심이기도 하다. 태종이 전주에 경기전을 세운 이유는 조선 왕조의 성씨인 전주 이씨의 발상지이기 때문이다. 태조는 생전에 어진을 26점이나 그렸으나 전해오는 것은 단 한 점뿐이다. 나머지 25점은 조선 500년 역사 동안 전란을 수차례 겪으면서 모두 소실되고 말았다. 단 한 점 남은 태조 어진 경기전 정문 안으로 들어서면 가장 먼저 홍살문을 만난다. 홍살문은 나쁜 기운을 막을 용도로 세운 문이므로 홍살문 안쪽은 신성한 공간이다. 외삼문과 내삼문을 통과해 가장 안쪽에 자리한 丁자 형태의 정전에 도착한다. 이 정전에 태조 어진이 모셔져 있는데,
파란 도시 부산을 재조명한 세 문화마을
부산에 ‘문화마을’이라 불리는 동네가 세 곳 있다. 사하구 감천동 ‘감천문화마을’과 아미동 ‘비석문화마을’, 영도 영선동 ‘흰여울문화마을’이다. 이 마을들은 6·25전쟁 피란민들이 정착한 곳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과거에는 그저 산동네에 불과했으나, 지금은 도시재생을 통해 마을 경관과 특성을 살린 관광 명소로 발전했다. 저마다 개성이 다른 세 마을을 답사하며, 피란민들의 생활상과 피란 도시 부산을 재조명해본다.이국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흰여울문화마을의 골목 풍경부산 문화마을의 첫 단추 감천문화마을 부산은 6·25전쟁 당시 임시수도였다. 전국의 피란민들이 부산으로 몰려왔다. 부산은 평지가 적고 산지가 많은 지형이어서 갑자기 늘어난 인구를 수용할 땅이 턱없이 부족했다. 피란민들은 임시정부청사가 세워진 광복동 일대 산기슭에 터전을 잡았다. 피란민들은 부두 노동자로, 시장 일꾼으로 일하며 생계를 유지했다. 이들은 한국전쟁이 끝난 뒤에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산동네에 정착하게 됐다. 이런 과정을 거쳐 형성된 대표적인 마을이 ‘감천문화마을’, ‘비석문화마을’, ‘흰여울문화마을’이다. 이 마을들은 한국전쟁 당시의 시대상을 잘 보여준다. 문화마을로 가장 먼저 지정된 감천문화마을은 산비탈에 지어진 파스텔 색조의 계단식 주택과 미로 같은 골목 풍광이 이국적이어서 ‘한국의 마추픽추’, ‘한국의 산토리니’라 불린다. 깍두기처럼 생긴 집들이 바다를 향해 층층이 늘어선 모습이 진기하다. 미로 같은 골목은 모세혈관처럼 퍼져 있어도 막힘이 없다. 어느 길로든 통한다. 채광을 고려해 앞집이 뒷집을 가리지 않게 지어졌다. 다닥다닥 붙어 있는 집들 사이에도 숨 쉴만한 골목길은 있다. 감천문화마을 입구 축대 외벽에 전시된 물고기 모양의 작품감천문화마을은 야경 촬영 장소로도 인기 있다. 이곳만의 독특한 정취에 설치미술작품이 더해져 ‘감천문화마을’이라는 대규모 체험 미술관이 탄생했다. 길가, 건물 담벼락, 지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