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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방을 정리하기 위한 철학상담

글 _ 이진오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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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이미지철학적 사유가 정리를 위한 넓은 공간을 제공할 수 있는 것이다. 기사 이미지



  그다지 쓸모가 없는 물건들을 주워와 애지중지 쌓아두는 분들이 종종 TV에서 소개된다. 멀쩡한 집을 폐가로 만들고 집주인도 그 일부가 되어버린 것 같아서 당장이라도 정리를 도와주고 싶다. 하지만 집주인이 동의하지 않으면, 누구도 빗자루 하나 잡을 수 없다. 위태로운 물건이라도 치울 수 있을지 모른다. 그때뿐이다. 집주인의 마음이 정리되지 않는다면, 집은 다시 쓰레기 더미가 된다. 차갑고 텅 빈 마음을 채워줄 따듯하고 번듯한 대체물이 나타나지 않는 한, 집주인에게는 그대로가 좋다. 


  그런 특별한 분들을 보면서 우리는 속으로 ‘왜 정리를 못 하지, 참 답답한 인생이구만’ 하면서 짐짓 자긍심을 느낀다. 하지만 그런 우리에게도 정리가 필요한 것들이 꽤 있다. 우선 무엇보다도 남아도는 ‘살’이 정리가 안 된다. 살을 빼야 하는 이유를 몰라서 그런 게 아니다. 게으름과 몸에 밴 습관이 주범이다. 다이어트에 들이는 노력과 거기서 얻어지는 결과보다는 맘 편히 먹고 늘어져 쉴 때 얻는 자유와 만족감을 ‘선택’해서 그런 경우도 많다. 과거보다 오늘날은 선택지가 많아지고 시간 여유도 늘었다. 아메리카노를 마실지 카페라테를 즐길지 미리 정하지 않고 주문대 앞에서 서성거린다고 해서 꼭 나쁜 건 아니다. 무엇을 선택해도 좋기 때문이다. 고민의 시간이 설렘과 기대로 채워지기 때문이다. 


  모든 형태의 결정장애와 정리되지 않는 상태가 꼭 나쁘지만은 않은 것이다. 그러고 보면, 숙고 끝에 현명하게 취사선택해야 할 문제가 우리 삶에는 그리 많지 않을 수도 있다. 영화 <모가디슈> 중에는 “살다 보니 진실이 두 개인 경우가 있습디다.”라는 대사가 나온다. 이것도 답이고 저것도 답일 수 있다. 이것도 글렀고 저것도 글렀을 수 있다는 것이다. 



나의 선택으로 정리되는 내면의 방

  그런데 어느 것이 옳다고 확답을 못 하더라도 신중하게 어떤 것은 선택하고 어떤 것은 버려야 할 때가 있다. 선택이 가야 할 길의 방향을 틀고, 걸어온 길의 이름을 바꿀 때가 그렇다. 사람마다 선택의 대상과 방법이 다를 수도 있다. 그리고 사회적 존재로서 나는 남의 시선을 무시할 수도 없다. 또, 운명적인 선택이라고 해서 꼭 나 혼자서 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혼자만의 결정이라고 믿었지만, 알게 모르게 그리고 가깝거나 멀게 바깥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문제는 타자의 시선이 내 마음 중심에 들어와 나의 존재를 압도할 때다.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고, 내게 의미 있는 것은 무엇인지 스스로 생각해보지 않고 남의 시선을 따라 산다면, 내가 나로서 살았다고 장담하기 힘들다. 나를 압도하는 타자가 선생님이든 부모님이든, 예수님이나 부처님이라도 마찬가지다. 이럴 때 나는 내 존재를, 내 내면의 방 이곳저곳을 정리해야 한다. 버릴 것은 버리고 중심에 둘 것과 구석에 둘 것을 스스로 정해야 한다. 정리를 위해서 숙고에 숙고를 거듭했으나 여전히 내 마음의 중심에 놓아둘 것도 생길 것이다. 그것이 밖에서 왔더라도 내 판단과 선택을 통과한 것이니 내 것이라 할 수 있다. 


  ‘정리’라는 작업을 말하면, 흔히 그 대상만을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누가 왜 어디를 정리해야 하느냐에 따라서 정리의 대상과 방식도 완전히 달라진다. 가령 내가 내 마음속에 놓인 불편하거나 해로운 것들을 정리하기 위해서는 ‘내가 누구인지’부터 정리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나의 정체성을 이루고 있는 것들을 살펴봐야 한다. ‘정체성’에 대한 성찰은 철학적인 작업인 것만 같지만 꼭 그렇지도 않다. 나를 어떤 누군가로 만드는 요소 중에는 사고방식, 가치관, 꿈, 상처, 인간관계, 기질, 몸, 경제력 등등이 있다. 앞엣것들일수록 철학적 숙고가 도움이 많이 될 것이다. 뒤엣것들은 심리상담사나 의사, 은행직원의 의견을 먼저 귀담아듣는 게 좋다. 좀 더 근본적이고 총체적으로 판단하길 원한다면, 뒤엣것들도 철학적으로 검토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철학은 문제를 비판적이고 논리적으로 보게 할 뿐만 아니라 근본적이고 전체적이면서도 과학적 객관성을 넘어서 초월적으로 보게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철학적 사유의 성격은 ‘나와 세계’를 어느 한 관점에 고착시키지 않고 개방적이고 창조적으로 만든다. 철학적 사유가 정리를 위한 넓은 공간을 제공할 수 있는 것이다.



때로는 의미 깊은 진실이 정리를 도와준다

  그런데 철학적 숙고만으로 정리가 완성되는 것도 아니다. 시간이 진실을 숙성시켜서 드러낼 때라야 제대로 정리되는 일도 있기 때문이다. 영국의 식민지였던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자란 코사족 소년 만델라는 영국식 교육을 받았다. 영국식 사고방식이 그의 생각의 틀로 자리 잡아서 영국의 이상과 영국의 문화가 우월해 보였다. 아프리카적인 것은 미개해서 지워버려야 할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성인식을 마친 만델라는 한 추장의 연설을 듣는다. 추장은 자신들이 자기 나라에서 노예가 되었으며, 스스로 운명을 결정할 힘도 권력도 없다고 말했다. 추장의 이 말에 만델라를 포함한 청중들의 얼굴은 점점 분노로 일그러졌다. 추장의 연설은 선진문물을 전한 영국에 고마워할 줄 모르는 무지한 자의 언동이었다. 구질구질한 상황에서 벗어나 부와 높은 지위를 가질 희망을 품은 이들에게 찬물을 끼얹는 무책임한 짓이었다. 만델라는 추장의 연설을 잊고 살았다. 하지만 추장의 말에 담긴 진실이 만델라의 가슴속에 씨앗으로 파고들었다. 그가 식민지 청년으로서 경험한 세월은 추장의 말이 진실임을 보여주었고, 추구해야 할 것과 솎아내야 할 대상을 바꾸어 놓았다. 이로써 만델라는 새로운 자기 정체성을 갖게 됐고, 그렇게 새로 태어난 만델라는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던 거대한 장벽을 허물고 새로운 세계를 열었다. 


  물론 만델라의 선택이 절대 선이거나 절대 진리라고 말할 수는 없다. 남아프리카 토착민들이 영국의 지배에 저항하지 않고 온전히 영국식이 되었다면, 지금보다 더 멋져 보이는 생활을 하고 있지 말란 법도 없다. 최소한 만델라 자신은 27년을 감옥에서 보내지 않고 변호사로서 풍족하게 살 수 있었을 것이다. 만약 그가 한 번뿐인 자신의 삶을 위해서 눈앞의 것뿐만 아니라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의미 깊은 것들을 스스로 살핀 후 다른 선택을 하였다면, 그것 역시 그의 삶이다. 하지만 그런 검토의 시간이 없었다면, 아무리 좋은 삶이라도 그의 것이라고 말하기 힘들다. 청중들을 불쾌하게 만들었던 추장의 말은 어떻게 소년 만델라의 가슴에 씨앗으로 파고들어 지금의 만델라를 만들 수 있었을까? 잘 보이지는 않지만 의미 깊은 진실을 담고 있어서 그런 건 아닐까? 그런 진실의 씨앗을 청년들의 가슴속에 심을 수 있다면, 그는 스승이자 철학자라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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