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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질’은 버리고 ‘미적 가치’를 연마할 때

글 _ 최재목 영남대 철학과 교수

갑+질, 유행어가 되다

  계약서를 쓸 때면 ‘갑’과 ‘을’의 관계를 명확히 하고 권리와 의무를 주지한다. 갑(甲)과 을(乙)이란 한자는 십간(十干)의 첫 번째와 두 번째에 해당한다. 갑은 주도권을 지닌 쪽(主, 上)이고, 을은 갑에 종속되는 비주도적인 사람(從, 下)을 말한다. 


  갑은 돈(보수, 재화)을 지불하거나, 고용(일자리, 직업)을 제공하거나, 조직 내에서 권력을 행사하는 쪽(상사, 고위직)이다. 임대인과 임차인, 본청과 하청업체(납품업체), 고용주와 종업원, 교수/교사와 학생이 바로 갑을 관계이다. 따라서 을에 대해서 갑으로부터의 횡포가 발생하기 쉽고, 그 반대는 비교적 적다.


  ‘갑질’은 계약 권리상 상대적으로 우위에 있는 ‘갑’과 어떤 행위를 폄하할 때 쓰는 ‘질’이라는 접미사를 붙인 신조어다. 당연히 갑질은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된다. 2010년대 이후 언론 등에 자주 등장하기 시작하여 지금은 일상적인 유행어가 되었다. 현재 갑질은 기성세대/신세대, 보수/진보를 막론하고 특정 인물이나 계층만이 아니라 우리나라 사람 모두에게 일상생활 속에서 적용될 수 있는 말이 되었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친구 간에도 농담 삼아 갑질하지 말라는 말을 쓸 정도로 너무 익숙해지고, 우리 사회에선 이미 평범한 언어가 된 것이다.


오랜 갑질의 전통, ‘억울하면 출세하라’는 말

  현재의 유행어로 ‘갑질’이 되었지만 과거 우리 사회에서도 갑질의 전통이 있었다. 오죽했으면 ‘억울하면 출세하라’고까지 했을까. 1966년에 개봉된 영화 <회전의자>의 주제가 ‘회전의자(김용만 노래)’ 가사를 보면 그 갑들의 ‘거들먹댐-으스댐-우쭐댐-뻐김-구박함-무시함’을 느낄 수 있다. “빙글빙글 도는 의자 회전의자에/임자가 따로 있나 앉으면 주인인데/…아아아 억울하면 출세하라 출세를 하라(1절)//돌아가는 의자에 회전의자에/과장이 따로 있나 앉으면 과장인데/올 때마다 앉을 자린 비어 있더라/…/아아아 억울해서 출세했다 출세를 했다(2절)” 이처럼 억울하면 출세한다는 말에는 을이 갑에게 당하는 설움-한-원망이 배어있다. 


  ‘억울하면 출세하라’는 말은 출세하고 나면 자기 마음대로 한다는 말도 된다. 약자인 을이 강자가 되면 언제든지 다시 갑질할 수도, 갑질해도 된다는 말이다. 자기 마음대로 하고 싶은 의지는 ‘권력(힘)’, ‘돈(재력)’, ‘지위(명예)’에서 나온다. ‘뻐기고’, ‘잘난 척하고’, ‘으스대고’, ‘으쓱대고’, ‘거들먹거리고’, ‘팔자걸음’하고, ‘에헴’하는 풍습을 만든다. 


  과거 조선시대의 사농공상(士農工商) 제도에서 ‘사’(士)는 상층을 차지하기에 농·공·상 위에 군림하며 ‘내가 낸데!’ 해대기도 하였다. 이런 부류의 습성에는 가진 자의 도덕적 책임 같은 가치관은 없었다. 낮은 계층들을 ‘쌍놈’ ‘아랫것’이라 부르며 멸시, 하대하였다. 당연히 인권이니 평등이니 하는 가치들은 박약했다. 지금의 갑질도 어느 부분 이런 삐뚤어진 양반의 갑질 전통과 닿아있다. 해방 이후 근현대, 지금까지도 이런 관습은 존속한다고 본다.


타자 배려의 전통

  그러나 모든 양반들이 다 그랬던 것은 아니다. 인간과 세계에 대한 올바른 양식과 지성을 갖춘 선비정신을 지킨 많은 사람들이 있다. 여기서 일일이 다 들 수는 없으나 그들은 갑질을 철저히 경계하고 동등한 인간으로서 타자를 배려하려 하였다. 예컨대 퇴계가 손자 안도에게 “내 자식 키우기 위하여 어찌 남의 자식을 죽인단 말인가, 있을 수 없는 일이다.”라며 끝내 데리고 있던 유모(乳母)를 내려보내지 않아 결국 안도의 아들(퇴계의 증손자) 창양을 잃어버리기도 한다. 


  전남 구례 운조루(유이주가 세운 ‘구름 속의 새처럼 숨어 사는 집’의 뜻)에는 뒤주가 하나 있다. 여기에는 타인능해(他人能解), 즉 ‘다른 사람도 마음대로 이 마개를 열 수 있다.’라고 적혀 있어 어려운 사람이 와서 누구나 쌀을 퍼가도록 하였다. 


  경주 최부자의 ‘집안과 사회를 다스리는 여섯 가지 지침[六訓]’에는, “만석 이상의 재산은 사회에 환원하라.” “주변 100리 안에 굶는 사람이 없도록 하라.”고 하였다. 가진 자, 이른바 갑들의 도덕적 책임과 보편가치에 대한 자각을 잘 보여준다.


르상티망을 넘어 해원상생으로

  강자에 대한 약자의 설움-한-원망을 벗어나서 상생을 지향하는 말에는 해원상생(解冤相生)이 있다. 지배계층-피지배계층, 유산자-무산자 등등 갑을 관계에서 쌓여온 상극의 원(冤: 억울함, 원통함, 누명)과 한(恨: 원망, 한탄, 복수심)을 모두 풀어버리고 상생상화·상부상조하는 좋은 인연으로 살아가자는 뜻이다. 


  원(冤)자는 토끼(兎)가 망(冖)을 뒤집어쓰고 옴짝달싹 못 하는 답답한 모양을 담고 있다. 아울러 한(恨)자는 신분이 낮은 사람이 허리를 조아리고서(艮) 고달파하는 마음(忄)을 보여주고 있다. 신분제도가 엄격히 유지되었던 고대사회에서 천한 신분(노예, 노비 등 천민)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고달픔-아픔-억울함—원통-분통을 잘 드러내는 글자들이다. 반작용으로 우리나라에는 무당의 푸닥거리나 씻김굿에서 보듯 해원적 요소가 많다. 


  강자에 대한 약자의 반감과 원한, 즉 복수감을 서양에서는 르상티망(Ressentiment)이라고 한다. 니체는 권력의지로 촉발된 강자의 공격욕에 대한 약자의 격정을 그렇게 불렀다. 우리의 한(원한)에 해당하는 말이다. 


선진국 노릇 하려면 갑질은 NO!

  갑질은 타자에 대한 못질, 상처 내기다. 강자들이 횡포의 못을 박아 약자에게 상처를 만드는 일이다. “남의 가슴에 못질하면 니 가슴에도 못이 박히는 거여”(송유자의 시 <못 박는 아버지>)라는 말처럼, 남의 가슴에 원한을 쌓으면서 잘 살 수는 없다. 아니, 잘 살아도 그렇게 사는 것은 잘 사는 것이 아니다. 


  갑-을의 복수가 반복되는 것은 서로 가해자이기도 피해자이기도 한 시간을 견디는 일이다. 이런 악순환에 어떻게 현명하게 대처하며, 줄여갈 것인가는 사실 법만으로는 부족하다. 보편적 가치에 대한 인지력, 감수성을 내면적으로 터득할 필요가 있다. 다르게 보면, 약자에 대한 강자의 횡포는 동서양 어디에도 있다. 중국에도 일본에도 있을 것이며, 한국보다 더 심한 나라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명심할 것은 이제 우리가 선진국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선진국이란 물질적 풍요나 소득 면에서만 상위라는 것이 아니다. 상생의 가치, 사회적 보편적 가치를 지향하며, 개인-사회-인류가 함께 잘 살 수 있는 기반과 의식을 갖추어야 한다. 그래야 국제사회에서 비로소 선진국 노릇을 하고 또 대접받을 수 있다. 


  어떤 위치에서든 타자에게 갑질하지 않는 나라. 말짓, 손짓, 눈짓, 몸짓에서 상호 배려와 존중의 문화가 배어있고 느껴지는 나라는 가능할까. 가능하다. 그것은 아마도 각자 스스로의 가치를 ‘미적 차원’으로 높여가는 실천, 노력 속에서 실현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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