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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과서 정책과 교사의 ‘탈숙련화’
글_ 정용주 교육부 대변인실 교육연구사





‘질문하고 탐구하는’ 교과서 개발
  2015 개정 교육과정에 맞춰 학교 현장에서 활용될 교과서는 학생이 질문하고 자기주도적으로 탐구하는 방향에 맞춰 개발되었다. 무엇보다 교과서를 가지고 공부하는 학생은 수동적으로 질문에 답하는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 질문하고 답을 찾는 탐구자가 되기 위해 교실은 학생들이 협력하여 문제를 해결하는 탐구 공동체가 되어야 하고, 교과서는 교실을 탐구 공동체로 만드는 매개물이 되어야 하기 때문에, 교과서에서는 어떤 질문을 해야 하는지 ‘모범’을 보여주면서 학생들이 이러한 질문을 충분히 익히면서, 자기 질문을 하도록 구성했다. 무엇보다 좋은 교과서를 개발하기 위해 연구진은 국내외 교과서의 질문 방식을 분석하고, 학생 사고를 촉발하는 질문 모형에 대한 심도 깊은 연구를 진행한 것이 주목할 만하다. 연구진은 이러한 과정을 통해 산출된 연구 결과를 교과서 집필진, 심의진과 공유한 다음, 최종적으로 개발된 질문에 대해 전문가 검토를 거쳐 지금과 같은 ‘질문하고 탐구하는’ 교과서가 개발되었다. 

문재인정부의 교과서 정책
  문재인정부의 교과서 정책은 2015 개정 교육과정에서 추구하는 ‘창의적 사고 역량을 기르기 위한 교과서 개발’이라는 정책방향을 이어받고 있다. 이런 방향에서 교육부는 2015 개정 교육과정에 따라 미래사회에 능동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핵심역량을 갖춘 인재를 육성하기 위한 교과서 개발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있다. 특히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맞이하여 증강현실(AR) 및 가상현실(VR)과 같은 학생들이 실감할 수 있는 콘텐츠를 디지털 교과서에 연계하여 개발해서 교과서가 학생들의 학습과 경험을 연결시키는 생동적인 교수·학습 자료가 되도록 하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보더라도 좋은 학생의 창의적 사고 역량을 기르기 위해 좋은 교과서를 개발하고자 하는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 
  교과서 자유발행제는 혁신교육과 고교학점제, 교사의 전문성 신장을 아우르는 핵심을 이루기 때문에 문재인정부는 헌법이념을 고양하고 교육의 질을 제고하기 위해 중·고등학교 입시와 관련 없는 과목부터 점진적으로 교과서 자유발행제를 추진하겠다고 강조한 바 있다.

‘성전이 된’ 교과서
  독일의 사상가인 아도르노(T.W Adorno)와 호르크하이머(M. Horkheimer)는 『계몽의 변증법』이라는 책을 통해 계몽과 신화의 문제를 다루었다. 이성에 의한 합리화는 모든 것을 규격화하는 대량생산 체제를 이루었다. 이러한 대량생산 체제는 소비자들도 실질적인 차이를 없애도록 했으며, 문화 역시 획일적으로 변했다. 결국 인간 또한 값싼 복제 인간으로 재생산되었다.
  처음 국가에 의해 형성되고 운영되는 근대적 교육제도에서 표준화된 교육과정과 교과서가 차지하는 위치는 매우 중요했다. 특히 교과 교육과정의 과학적 지식을 체계화하여 각 교과의 지식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가르칠 것인가? 하는 질문에 대한 답을 풍부한 자료와 함께 체계적으로 제시한 교과서를 개발하여 각 급 학교에 보급하는 것은 지식을 전수하고 국민성을 형성하는데 효과적이었다. 이렇게 체계적인 교육과정과 잘 만들어진 교과서 덕분에 전국의 학교에서 가르치는 내용과 교수학습, 평가 간의 통일성을 기할 수 있었다. 
그런데 복제기술이 세상을 동일하고 획일적인 것으로 만들어버린 것처럼 동일한 교과서는 교사의 교육활동을 탈숙련화시켰고, 학생의 배움과 평가를 획일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교사의 능력 차이를 통제하려는 흐름은 교육목표를 설정하는 데서부터 학습경험의 선정과 조직 및 그 성취 결과를 평가하는데 이르기까지, 철저하게 교사의 참여를 배제하고 외부 지향적이며 표준화된 관리와 통제를 원칙으로 하는 흐름을 고착화시켰다. 결론적으로 잘 만들어진 교과서는 아무나 가르칠 수 있는 교과서, 교사가-교육과정에서-제도적으로-배제되는 결과를 낳았다. 
  이러한 흐름은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교육활동을 교사가 객관적 지식을 재현(representation)하여 학생들에게 효과적으로 전수(transmission)하는 과정으로 왜곡되었다. 지식은 개별 학습자와 교사의 경험으로부터 독립적으로 이미 존재하고 있고, 그 자체를 교과서를 통해 교사가 학생에게 재현할 수 있다고 전제하기 때문에 배움의 맥락적 특성이 제거되고 교실에서는 교과서를 통한 지식의 전달과 시험점수만 남게 되었다. 
교사가 결정할 수 있는 자율성, 즉 재구성의 시공간 속에서 학생의 배경과 선호하는 학습 스타일에 대한 고려와 이해, 목표로 하는 지식 영역 및 실제 활동의 레퍼토리(repertory)를 규정하고, 교수 전략을 배열하고 선정하며 그에 대한 스스로의 평가계획을 수립하는 생산적 교육(productive pedagogy)을 할 수 없게 되었다. 그 자리를 대체한 것이 성취기준을 단원과 차시로 촘촘하고 긴밀하게 엮어서 구체화한 교과서 개발자의 사고 속에 교사의 교육활동이 구속되도록 하는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신규교사나 경력교사나 교육의 결과에서 별 차이를 보이지 않게 되는 탈전문화, 탈숙련화를 가속시켰고 교사의 전문성을 수업에서 어떤 새로운 기술을 선보이느냐에 의해 결정되었다.

다시, 자유발행제를 생각하기
  2015 개정 교육과정에서는 교과(군), 학년(군) 체제를 유지하면서 성취수준을 학년으로 구분되지 않고, 학년군이 끝나는 시점에서 도달해야 할 성취기준으로 제시하였다. 이렇게 성취기준을 언제, 얼마만큼 다루어야 할지 정해놓지 않음으로써 교사가 결정할 수 있는 자율성, 즉 재구성의 여지와 공간이 넓어졌다. 
  그러나 재구성을 가능하게 하는 대부분의 교과서는 국정교과서 또는 검·인정 교과서이다. 따라서 교사는 검·인정이든 국정이든 학교에서 선택한 한 종류의 교과서를 이용하여 교육해야 한다. 이렇게 되면 교사가 교육과정을 재구성하고 교과서를 참고자료로 사용하려 해도, 실제로는 교육과정과 교과서 그리고 국정교과서와 검·인정 교과서 간의 구분이 안 되어, 교육과정 문서에 담긴 다양한 가치와 내용을 교사의 철학을 반영하여 수정하거나 재구성할 수 없게 된다.
  물론 우리사회에서 여전히 교과서가 교육의 전부라는 사고가 강해서, 교과서가 수단이자 일부라는 인식이 보편화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교과서를 참고자료로 활용하여 다차원적으로 교육과정을 설계하거나, 교과의 교육 내용뿐만 아니라 교과를 교차하는 테마로 교육과정을 재구성하는 프로젝트기반 학습을 진행하는 것에 대해서, 교과서를 안 가르치고 교사 마음대로 가르친다거나 놀기만 한다는 등의 왜곡된 비판을 하기도 한다. 
  그런데 교육의 영역 안에서 교사가 자유로워야 학생들의 배움이 보다 다양해질 수 있다는 것은 교육선진국의 사례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핀란드를 비롯한 교육선진국들은 교과서를 교육과정과 동일시하는 교과서 정책에서 벗어나 교과서의 위상을 참고자료로 바라보면서 교과서 자유발행제도를 실행하여 교사의 자율성과 전문성을 보장함으로써  학생중심의 다양한 교육과정이 가능해 졌고 성취도에서도 우수한 성과를 가져왔다.
  미래사회에 능동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핵심역량을 갖춘 인재를 육성하기 위해서 가장 선행되어야 할 것은 어떤 교사든 동일한 결과를 낳을 수 있는 잘 만들어진 요리책과 같은 교과서를 보급하는 것보다 교사를 단순한 수업 기술자가 아닌 교육과정을 재맥락화(recontextualized)하는 전문가로 서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를 위해 무엇보다 문재인정부가 약속한 교과서 자유발행제를 추진하겠다는 교육공약이 우선적으로 추진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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