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가 해금(海禁) 정책을 실시할 당시, 서양은 16세기부터 대항해시대를 열어 근대화를 선도해 나갔다. 그러나 바다를 장애물로 여겼던 우리는 결국 임진왜란과 같은 뼈아픈 수난을 겪었다. 이런 시대에 나타난 인물이 충무공 이순신이다. 장군의 호국혼이 살아 숨 쉬는 한산도 유적지와 통영을 찾아 그 발자취를 따라가 보았다. 더불어 한산도 진두마을의 한산초·중학교 이야기도 곁들인다.
추봉교. 다리 왼쪽으로 학교가 있다.
추봉도 바닷가의 충무공 동상
한산대첩의 현장을 조망하다
이순신 장군과 관계된 장소는 우리나라 서남해의 곳곳에 산재한다. 우선 목포의 부속섬인 고하도, 진도의 울돌목, 완도의 고금도, 신안군 팔금도가 있다. 팔금도 초입에 자리한 ‘군영소’에서 1597년 10월에 20여 일 가까이 장군과 부하들이 머무르면서 파손된 군선을 수리하는 등 다음을 준비했다. 장군은 수시로 ‘채일봉’에 올라가 해상을 탐방하며 언제 있을지 모르는 전투에 대비한 것이다. 섬 주민들은 장군을 극진히 대접하며 감사함을 잊지 않았다.
경남의 대표적인 유적지로는 한산도가 으뜸이다. 임란 당시 왜군 함대를 이 섬의 앞바다에서 궤멸시켜 승리로 이끈 역사적인 곳이 바로 여기! 세계 4대 해전 중 하나로 손꼽히는 한산대첩은 학익진과 거북선의 위력을 바탕으로 영세한 전력을 가지고도 승리를 거두었으며, 이곳에서 왜군의 주력을 괴멸한 아군은 남해안의 제해권을 다시 장악할 수 있었다.
한산도는 삼도수군통제영이 자리 잡았던 곳으로, 이곳의 지명은 충무공과 연관이 깊다. 대섬과 해갑도(解甲島), 의항(蟻項)과 문어포(問語浦), 군수용 소금을 구웠다는 염개, 3천석 가량의 군량미를 비축했다는 창동(倉洞), 병장기를 제조하고 수리했다는 야소(冶所), 경비초소를 두고 통제영과의 연락을 수행했던 진두(陣頭) 등이 있다.
통영여객선터미널에서 한산도 가는 배는 하루에 10회 정도 있다. 제승당(制勝堂) 선착장까지는 30분 정도 소요된다. 도착 전에 거북 형상의 등대를 보면서 방문객들은 연거푸 셔터를 누른다. 한산도 여행의 시발점인 제승당은 ‘승리를 만든다’라는 뜻인데 오늘날 해군작전사령관실 같은 곳이다.
한산도에 도착하면 제승당에서 산행을 할 수 있고, 버스를 이용하여 반대편인 진두에서도 산행이 가능하다. 293m의 망산은 임진왜란 당시 망을 보며 일본군의 동태를 살폈던 것에서 유래했는데, 정상에 오르면 점점이 떠 있는 한려수도의 섬은 물론이려니와 한산대첩의 현장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기에 주말에는 항상 붐빈다.
수루 그리고 한산정
선착장 오른쪽으로 제승당 가는 길이라는 안내문이 큼지막하게 보인다. 이어서 한산문을 지나면 하트 모양의 해안길이 이어진다. 왼쪽의 산등성이로는 수많은 적송(赤松)이 키재기를 하고, 오른쪽으로는 파도가 잔잔하게 일렁인다. 걷다 보면 도중에 ‘한산도가’와 ‘한산도야음’의 표지석이 있어 다리쉼을 하기에 좋다.
충무사와 한산정, 수루는 필수코스이며 대첩문 입구는 단체 기념사진을 찍는 곳으로 자리매김했다. 군사들과 같이 마셨던 우물도 보존된 상태인데, 바다에 가깝지만, 짠맛이 전혀 없는 게 특징이라는 안내문이 인상적이다. 수루는 장군께서 수시로 올라 왜군의 동태를 살폈던 망루인데,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혼자 앉아’로 시작하는 한산도가에 나오는 그 유명한 공간이다. 낮에는 왜적의 동태를 살피고, 밤에는 번민으로 잠을 못 이루었을 장군의 우국충정이 느껴지고도 남는다.
방문객들은 충무사에서 묵념하며 경의를 표한다. 방명록을 살펴보면 해외에서 이곳을 찾은 이들의 소감도 적지 않다.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는 기본이고 ‘우리나라를 지켜 주신 은혜를 새기겠습니다’, ‘깊은 뜻을 본받겠습니다’, ‘지켜 주신 나라가 번영하길’, ‘애국의 산증인’, ‘우리 민족의 영웅’, ‘당신이 있었기에 지금의 저희가 있습니다’, ‘옳은 것은 강한 것을 이긴다’와 같은 명언들이 가득하다.
제승당 왼쪽의 문을 내려가면 한산정이 나온다. 과녁까지의 거리는 무려 145m이다. 바다를 사이에 두고 활터와 과녁이 있는데, 밀물과 썰물에 따른 실전 적응 훈련을 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장군은 이곳에서 부하 무사들과 함께 활쏘기를 연마했다.
<난중일기>에는 여기에서 활쏘기 내기를 하고, 진 편에서는 떡과 막걸리를 내어 배불리 먹었다는 기록이 있다.
한산도·추봉도는 형제섬
한산도는 외로운 섬이었다. 그러나 2007년에 추봉도(秋蜂島)와 다리로 연결되어 이제는 한 몸이 되었다. 400m의 다리가 놓이기 전까지 추봉도 사람들이 통영에 나가 일을 보려면 쉽지 않았다. 지금은 아침 일찍 공영버스를 타고 한산도 제승당 선착장에서 육지 나들이를 한 뒤, 당일 오후나 저녁쯤 귀가할 수 있게 되었다.
사실 추봉도는 이름만 존재했지, 일반인들은 잘 모른다. 하지만 이제는 몽돌 해수욕장과 포로수용소 흔적이 남아 있는 섬이라는 이미지로 관광객들에게 다가서고 있다. 거제도 포로수용소는 급증하는 전쟁 포로를 수용하기 위해 만든 최대 규모의 집단화 시설로, 1951년 포로 수용을 시작해 1953년 9월 폐쇄되기까지 20만여 명이 생활했다. 즉, 용초도(2018년에 용호도로 이름을 바꿈)와 추봉도는 분소였던 셈이다.
몽돌 해수욕장이 있는 봉암마을에서는 매년 6월에 바다체험축제가 열린다. 바지락 캐기, 맨손으로 고기잡기와 같은 체험 때문에 장관을 이룬다고 한다. 바닷가 선착장 부근에 장군의 동상이 늠름하게 자리 잡고 있다. 연결된 다리 덕분에 추봉도 학생들은 버스를 타고 한산초·중학교에서 공부하게 되는 영광을 누리고 있다.
(좌)통학선 / (우)한산초·중학교 전경
(좌)대첩문 앞에 선 한산중 학생들 / (우)한산도 초입의 거북 등대
교실에서 바다를 보다
진두마을에 있는 한산초등학교에는 11명의 학생이, 한산중학교에는 10명의 학생이 재학 중이다. 한산면 소속의 비진도·용호도·매물도 소재 작은 학교를 2012년부터 한산초·중학교로 통합하여 운영하고 있다. 따라서 이 학교에는 통학차량이 있고, 통학선도 있다는 게 여느 학교와 다른 점이다.
현재 비진도에서 4명, 용호도에서 1명의 학생이 통학선을 타고 매일 등하교를 한다. 진두 선착장에서 아침 7시 50분에 출발하여 8시 10분 비진도 도착, 8시 30분 용호도 도착, 학생들을 싣고 8시 40분쯤 선착장으로 되돌아온다. 기상 상황이 안 좋은 날에는 선장과 교장이 협의해서 운항 여부를 결정하는데, 등교를 하지 못할 때는 ‘아이톡톡’으로 화상 원격수업을 한다.
한산초는 주변의 섬 탐방, 충무공 유적지 답사, 한산도함 체험 등 특색 있는 교육활동을 통해 학생들의 학습 경험을 풍부하게 한다. 또한, 전교생(1~6학년)이 참여하는 ‘선생님과 함께하는 스포츠 데이’를 통해 규모가 작은 학교가 가진 특성을 보완하고 학생과 교사 간의 관계 강화를 통해 서로를 이해하며 존중할 수 있는 기회로 삼고 있다. 한산중은 1인 1기 스포츠활동, 스쿨밴드 운영, 텃밭 가꾸기와 같은 학생의 잠재력을 신장시킬 수 있는 다양한 진로 체험활동을 실시한다.
한산초·중학교는 바닷가와 매우 인접해 있다. 선착장에서 3분 정도 걸어 올라가면 인조잔디가 깔린 환상적인 공간이 펼쳐진다.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운동하는 재미는 쏠쏠하다. 아름답고 다양한 나무와 꽃으로 둘러싸인 정원은 학구열을 드높인다. 그리고 교실마다 창문을 통해 바다가 반짝이는 멋진 경치를 늘 감상할 수 있어, 이곳은 그야말로 핫플레이스다. 윤부금 교장은 “한산초·중학교는 아름다운 자연환경과 특색있는 교육과정 운영을 통해 학생들이 인성을 기르고 폭넓은 지식을 얻을 수 있는 최고의 교육 환경을 갖췄다.”라고 강조했다.
통영 시내에도 장군의 흔적이 여러 군데 남아 있다. 대표적인 곳은 한산대첩 광장, 삼도수군통제영 역사관, 이순신공원, 충렬사이다. 해변산책로와 아름다운 바다가 펼쳐지는 공원에는 ‘이충무공전서’에서 발췌한 글귀가 요소요소에 적혀 있기에 가던 길을 멈춘 채 그 의미를 되새기는 사람들이 많다.
한산도의 제승당에서, 진두마을에 자리한 학교의 운동장에서, 추봉도 봉암마을 바닷가의 동상 앞에서 그리고 통영의 이순신공원에서도 장군의 삶을 떠올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