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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화랑의 마음을 사로잡은 속초 - 영랑호를 걷다

글 · 사진 _ 김혜영 여행작가

  속초는 호수 부자다. 북쪽에 영랑호, 남쪽에 청초호를 품었다. 

  두 곳 모두 바다가 오랜 세월에 걸쳐 만든 석호이다. 외곽에 있는 영랑호는 시내 쪽 청초호보다 자연 풍광이 아름답고 호젓하다. 

  옛 기록에 많이 등장해 역사 관련 얘깃거리도 풍성하다. 옛사람들이 반했던 영랑호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영랑호 둘레길을 걸으며 당시 풍경을 상상해본다. 

늦은 오후 영랑호 생태 데크쪽에서 범바위 방향으로 바라본 풍경늦은 오후 영랑호 생태 데크쪽에서 범바위 방향으로 바라본 풍경


신라 화랑의 수련장이었던 영랑호

  영랑호 이름은 신라 화랑 ‘영랑’에서 비롯됐다고 전해온다. 영랑이 금강산에서 수련을 마치고 무리와 함께 동해안을 따라 경주(서라벌)로 돌아가던 길이었다. 속초쯤에 이르러 우연히 한 호수를 발견하고는 경치에 반해 경주에 가는 것조차 잊고 오래 머물렀다. 이때부터 사람들이 이 호수를 ‘영랑호’라 불렀다고 한다. 영랑호는 이름이 여러 번 바뀐 청초호와 달리 한 번도 바뀌지 않은 걸 보면, 옛사람들이 영랑호와 영랑의 인연을 꽤 중시했던 모양이다. 

범바위의 다채로운 모습을 볼 수 있는 포토존. 영랑호 둘레길에 있다.범바위의 다채로운 모습을 볼 수 있는 포토존. 영랑호 둘레길에 있다.


  영랑이 다녀간 뒤로 영랑호는 화랑들의 수련장으로 이용됐다. 이 사실에 착안해 호수 북쪽에 화랑도체험관광단지가 들어섰다. 이곳에서 화랑들이 수련할 때처럼 활쏘기, 승마, 격구 등을 체험할 수 있다.


  영랑호는 화랑들뿐만 아니라 고려·조선시대 문인들의 마음도 사로잡은 듯하다. 고려시대 안축과 이곡, 조선시대 정철, 김창흡, 구사맹, 이몽규, 이상질, 이세구 등 많은 문인이 시문집에 영랑호를 담았다. 2016년에는 영랑호 동북쪽 둘레길 옆(속초시 장사동 647-49)에서 조선 후기 학자 송시열이 ‘영랑호’를 새긴 바위가 발견됐다. 바위 동쪽 면에 ‘영랑호(永朗湖)’라고 석 자가 세로로 새겨져 있다. 1675년 송시열이 함경도로 귀양 갈 때 영랑호를 지나다가 풍경에 감탄하며 글자를 남긴 것으로 추정한다. 글자가 마모되고 안내판이 없어, 쉽게 눈에 띄지 않는 것이 아쉽다.



자연 친화적인 영랑호 둘레길

  영랑호 둘레가 약 7.8㎞이다. 자전거와 사람, 차가 나란히 통행할 수 있는 둘레길이 조성돼 있다. 보통 걸음으로 2시간 정도 걸린다. 차량 통행이 적어 호젓하게 걷는다. 호숫가에 억새, 갈대 등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 초겨울이라 억새와 갈대꽃이 윤기를 잃고 푸슬푸슬해졌지만, 오후 햇살을 이고 마지막 힘을 다해 빛을 낸다. 호수 위 윤슬은 다이아몬드를 흩뿌려 놓은 듯 눈부시게 반짝인다. 해 질 녘 호수가 붉게 물드는 날에는 풍경이 아주 아름다워 눈물이 저절로 난다는 주민의 말이 이해된다. 


  이맘때면 겨울 철새가 어김없이 영랑호를 찾아와 수풀 주위에 둥지를 튼다. 논병아리, 물닭, 청둥오리, 비오리, 흰뺨오리, 붉은머리오리 등이 영랑호에서 겨울을 나고, 봄에 떠난다. 철새지만 노쇠한 몸으로 먼 길 떠나지 못해 상주하는 가마우지, 왜가리, 백로도 일부 있다고 한다. 영랑호 동북쪽 갈대밭에 조성된 생태 데크 주변에 철새가 많이 보인다. 데크 벤치에 앉아 검은 물닭들과 덩치 작은 논병아리와 우아한 백로가 각자의 구역에서 저마다의 방식으로 먹이 활동하는 모습을 구경하다 보면 시간이 훌쩍 지나간다. 


  수심이 얕은 곳에 새끼손가락만 한 전어 새끼가 떼 지어 다니고, 손가락 한 마디 크기의 복어가 동동 떠 물결을 타고, 팔뚝만 한 숭어가 어슬렁어슬렁 헤엄치는 모습도 재미있다. 영랑호 문화관광해설사 말에 따르면, 영랑호에 가자미, 굴, 홍합도 산다고 한다. 

호젓한 산책을 즐길 수 있는 영랑호 둘레길호젓한 산책을 즐길 수 있는 영랑호 둘레길

호젓한 산책을 즐길 수 있는 영랑호 둘레길범바위 위에 세워 놓은 영랑정


영랑호수윗길에서 바라보는 범바위와 울산바위

 둘레길을 걷다 보면, 작년 11월 영랑호 물 위에 띄운 ‘영랑호수윗길’을 지난다. 영랑호를 가로지르는 이 부교는 길이 400m, 폭 2m, 중간 지점에 지름 30m의 원형 광장이 있는 구조로 만들어졌다. 호수 둘레를 감상하며 광장에 도착하면 화랑이 반했을 법한 풍경을 마주한다. 범이 웅크리고 앉아 물을 마시는 모습을 닮았다는 범바위와 웅장한 설악산 울산바위가 거울처럼 맑고 잔잔한 호수에 잠겨 있다. 범바위는 보는 위치에 따라 상어 머리, 물개 머리, 배부른 구렁이, 거북, 고래 등 여러 모습으로 변신한다. 

  범바위에 오르는 방법은 예상외로 쉽다. 호수윗길 근처에 범바위 꼭대기로 이어지는 나무 계단이 있는데, 5분 정도 올라가면 된다. 계단 끝에 세워진 영랑정은 영랑이 호수 동쪽 작은 봉우리의 정자에서 놀았다는 옛 문헌을 참고해 이름 지었다. 영랑정 뒤쪽 너럭바위에 오르면 동글동글한 감자와 쪼개 놓은 감자처럼 생긴 바위 서너 개가 올라앉아 있다. 바위 몸통에는 밧줄 같은 테두리가 둘러 있는데, 주민은 바위가 반지를 꼈다고 표현한다. 


  감자 모양 바위와 너럭바위를 유심히 보면 한자 이름이 곳곳에 새겨져 있다. 옛사람이 새긴 한자라고 한다. 요즘 사람들이 SNS에 여행을 기록하듯, 옛날 사람들은 바위에 이름 새겨 자신이 다녀갔음을 세상에 알리고 싶었던 걸까.  



영랑호수윗길

주소: 강원도 속초시 영랑호반1길 49

문의: 033-639-2690

입장 시간: 겨울철(11월~2월) 07:00~21:00/ 연중무휴/ 무료입장

Tip: ‘영랑호 스토리자전거(033-637-7009)’를 타고 영랑호 둘레 길을 도는 방법도 있다. 문화관광해설사가 운전하는 3인승 전기 자전거를 타고 가면서 영랑호와 속초시에 관한 이야기 를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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