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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과는 다르지만 ‘하나의 주제’로 공동 수업 철학적 질문 던지며 융합적 사고력 높인다

현장 / 이런 수업 어때요 

 ● 글│한주희 본지 기자

 

파주 한민고등학교 ‘융합수업’

교과는 다르지만 ‘하나의 주제’로 공동 수업 철학적 질문 던지며 융합적 사고력 높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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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민고등학교는 올 2학기부터 정규 교육과정에 ‘융합교과’를 개설했다. 역사, 수학, 과학 등 9개 교과목을 엮어 총 18차시로 융합수업을 진행 중이다. 하나의 공통주제를 각 교과별로 새롭게 들여다봄으로써 학생들은 융합적 사고력을 키우고 생각의 외연을 넓혀가고 있다. 한민고의 융합수업 현장을 찾아가 봤다.

 

  세 명의 교사가 한 교실로 들어섰다. 천왕성 역사교사, 박광순 국어교사, 홍정선 음악교사다. 이들은 ‘질병과 인류’라는 공통주제에 대해 각 교과목의 관점에서 다양한 해석을 내놓았다. 올 2학기부터 시작된 한민고의 융합교과 수업이다.

 


  “질병은 어떻게 인류를 변화시켰을까요? 역사 속에서 질병은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갔습니다. 중세 유럽 역사에서 흑사병은 계급을 와해시키며 시대의 몰락을 가져오기도 했지요.”

 


  천왕성 교사는 중세의 몰락 원인이 됐던 흑사병이 갖는 역사적 의미를 되짚었다. 당시 흑사병이 유럽 인구의 1/3을 감소시킬 정도로 창궐한 이유를 설명하고 비위생적이던 생활상에 대한 설명도 덧붙인다.

 


  그 뒤를 이어 교단에 선 박광순 교사는 조선시대까지도 공포의 대상이었던 천연두와 그 천연두를 소재로 한 문학작품인 ‘처용가’를 통해 질병과 인류를 이야기했다.    

 

 
  “질병은 문학에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요? 조선시대까지도 천연두라고 불리는 질병이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갔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처용가는 처용이 주술적 힘을 빌어서 천연두에 걸린 부인을 구해낸다는 의미로 읽을 수 있는데요. 질병을 없애기 위해 문학에 주술성을 섞기 시작한 것이지요. 언어학자들은 말에 주술성이 담겨있다고 설명합니다.”

 


  수업은 별도의 교재 없이 풍부한 시청각 자료로 아이들의 흥미를 돋운다. 만화로 각색한 처용가, 한문석 시인의 시 ‘희망의 날개’로 만든 학생들의 UCC 작품은 언어에 드러난 주술성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천왕성 교사가 역사 속에서 살펴본 질병과 인류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3명의 교사가 팀티칭으로 융합수업 강의
  15~20분간의 문학 수업 후 홍정선 교사가 그 바통을 이어받았다. 그는 납중독으로 청력을 잃은 베토벤이 어떻게 질병을 극복하고 음악적 세계를 구축해 갔는지에 초점을 뒀다. “나의 삶을 작품 속에 넣은 것이 낭만주의의 시작”이라고 말문을 연 그는 “질병을 이겨내고 예술로 승화한 베토벤처럼 여러분도 이겨낼 수 있는 힘과 의지가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영화의 한 장면을 통해 베토벤이 청력을 잃은 후 작곡한 합창 교향곡을 들려주고, 시련을 이겨낸 베토벤의 생애를 통해 아이들에게 생각할 거리를 던진다.

 


  “질병이 문학과 음악의 측면에서 봤을 때 예술로 승화된다는 것을 아이들에게 알려주고 싶었어요. 그리고 우리가 질병뿐 아니라 시련과 고난에 닥쳤을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생각해 보자는 질문을 던졌지요.”

 

질병을 문학 속에서 설명하고 있는 박광순 국어교사


  융합수업에서는 교과 지식을 묻지 않는다. 아이들이 사고력을 키우는 게 궁극적인 목표다. 홍 교사는 “지식의 습득이 아니라 사고를 열어주기 위한 것”이라며, “하나의 문제를 다각적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생각만 확장시켜 주면 된다.”고 말한다. 1학년 유연주 양은 “한 주제를 여러 교과목으로 배우는 게 신기하다. 다양한 관점에서 생각할 수 있게 됐다.”며 “질병이 인류 역사에서 부정적인 측면만 있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창조의 기반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웃는다. 이지아 양은 “베토벤이 청력을 잃은 뒤에도 뛰어난 음악을 만들어 낼 수 있었던 의지가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질병 자체보다 질병에 대한 공포의 확산이 더 무섭다는 생각도 들었다.”고 덧붙였다. 

 


정규 교육과정으로 ‘융합교과’ 개설… 9개 교과목 연계
  “융합수업을 교육과정 내 정규 교과목으로 개설한 학교는 처음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하나의 주제를 각 교과목의 관점에서 설명하면서 과목 간의 벽을 허물어 버렸지요. 세 명의 교사가 팀티칭을 통해 학생들이 다양한 사고를 할 수 있도록 돕고 있어요.”

 


  천 교사는 이번 학기 융합수업을 주도했다. 구석기시대부터 20세기까지 시대별로 주요사건을 추출하고, 그에 따른 융합 주제를 제시하며 18차시 강의 계획을 세웠다. 역사, 국어, 영어, 수학, 사회, 과학, 예술, 한문, 경영 등 9개 과목이 융합 대상이다. 각 교과별 교사는 융합 주제에 따라 세부 강의 계획을 마련, 15~20분 정도의 수업을 준비하게 된다. 천 교사는 “여름방학 동안 교과별 대표 교사들이 협의회를 갖고 한 학기 강의 계획을 짰다.”며 “대학교 교양 수준의 수업”이라고 설명한다.

 


  융합수업은 고등학교 교육과정에서 벗어난 주제를 다양하게 다룬다. 지식 습득보다는 문제해결력과 융합적 사고력을 키워주는 게 궁극적 목표이기 때문. 올해는 역사교과를 뼈대로 8개 교과목을 융합했지만, 앞으로는 보다 다양한 기준을 적용해 볼 계획이다.

 


  “융합 주제는 철학적 사고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일례로, 인간다움이란 무엇인가, 지도층의 희생은 의무인가 선택인가, 전쟁은 역사발전에 필요악인가 등으로 정해지는데요. 20세기는 ‘경제공항과 세계대전’을 주요사건으로 뽑고, 인류 역사는 종말을 맞이할 것인가를 융합 주제로 제시하여 각 교과별 강의를 준비했지요.”

 

 

학기 말 팀별 프로젝트 진행
  ‘인류 역사는 종말을 맞이할 것인가’를 주제로 사회과는 ‘21세기 자본론’을, 수학과는 ‘∞의 수학’을, 국어과는 ‘괴벨스의 전체주의’ 등을 진행할 예정. 천 교사는 “교사가 15~20분 내외로 PPT를 준비하는데, 시청각 자료를 풍부하게 제공하고 학생들의 발표나 참여를 독려한다.”고 말한다. 이는 아이들이 융합수업을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로 꼽힌다.  

 


  융합교과는 별도 시험을 치르지 않지만, 학기 말 아이들이 관심 있는 주제를 정해 팀별 프로젝트 보고서를 작성한다. 팀별 프로젝트는 내년부터 한 달에 한 번으로 확대할 예정이라고. 보고서는 연말에 자료집으로 발간되며, 겨울방학동안 진행되는 인문학 캠프 기간에 창의융합 프로젝트 대회를 열어 우수 보고서 발표회도 겸할 계획이다. 융합수업 시간에는 각자 융합기록장을 작성하는데 인상 깊었던 내용, 관심 가는 분야, 연계하고 싶은 다른 분야 등을 자세하게 기록한다. 이 자료는 팀별 프로젝트 주제를 선정할 때 유용하게 활용된다. 

홍정선 음악교사가 청력을 잃은 베토벤의 생애를 통해 질병과 음악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지난 학기에는 창의적 글쓰기를 진행했습니다. 한국언론진흥재단의 도움으로 글쓰기 수업을 받으면서 새로운 시각에서 바라보고 사고력을 키워줄 필요성을 깨닫게 됐지요.”

 


  금일철 교감은 “문·이과 통합형 교육과정이 발표되기 전부터 융합형 인재를 학교 비전으로 세우고, 정규 교육과정에 이를 반영하게 됐다.”며 융합 수업에 도전하게 된 이유를 설명했다. 

 


  성과는 조금 더 두고 봐야 하겠지만, 아이들에게 조금씩 변화가 보이고 있다고 교사들은 입을 모은다. 천 교사는 “동아리 현장답사로 전주에 갔을 때 아이들이 한옥의 기와구조를 융합수업 시간에 배운 수학의 사이클로이드 곡선으로 분석해서 놀랐다.”며  “이제 시작단계지만 아이들이 다양한 시각으로 바라보는 힘을 기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한다.

 

 

교사의 헌신이 성공의 관건
  물론, 처음 시도하는 것인 만큼 어려움도 있다. 한 차시 동안 세 과목을 진행하기 때문에 시간적 제약으로 강의식 수업을 벗어나기 어렵다는 점. 이를 극복하기 위해 방과후 수업과 연계하여 실습·실험 등 다양한 활동이 이뤄질 수 있도록 하는 방안도 모색 중이다.

 


  무엇보다 교사의 헌신도 필요하다. 정교 교과목으로 개설되면 교사의 수업 시수가 늘어날 수밖에 없는 상황. 특히, 주제 면에서 50분 교과수업을 준비할 때보다 더 많이 생각해야 하고, 수업 자료도 다양하게 찾아야하기 때문에 시간과 노력이 배로 든다.  

 

융합 기록장에는 수업 시간 인상 깊었던 내용, 관심 가는 분야 등 을 적는다.

 기재 여부는 순전히 아이들의 몫으로, 교사는 관여 하거나 강요하지 않는다.

 


  “한 차시에 세 명의 교사가 들어가는데, 정규 수업시간을 제외하고 공강인 교사가 팀을 이뤄 수업에 들어갑니다. 말하자면 교사로서는 주어진 수업시수 이외의 수업을 더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각 반마다 융합되는 과목이 다 다를 수 있어요. 일선 학교에서 교사들의 의지 없이는 도입하기 어려운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래도 “아이들이 스스로 고민하고 만들어 가는 수업이 좋은 수업”이라는 천 교사는 융합수업이 가고자 하는 방향도 이러한 수업이라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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