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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주문진에서 맞는 해돋이

글_ 강지영 명예기자(수필가)   사진_ 김경수 포토그래퍼




바다는 바다다. 파도 소리를 찾아 달리는 데 이유는 없다. 매서운 바람과 깊은 산골과 아득히 먼 곳에서부터 번져오는 빛. 어미의 품 같은 바다가 소리로, 냄새로 안부를 전해오는데 고개를 돌리지 않을 수는 없을 터. 철썩철썩 넘실거리는 물결이 눈 위에 허옇디허연 물거품을 남기고 가는데 그 품을 찾지 않을 수는 없을 터. 세상이 온통 어둠과 고요에 잠긴 시간, 동해를 향해 달린다. 바다와 하늘이 맞닿은 지점에서 태어나는 빛의 노래를 눈에 그리고 귀에 담기 위해 어둠의 굴을 지나온다. 바야흐로 수평선에 푸르고 맑음을 덧대 주는 계절, 겨울이다.


  해변 도로를 타고 일출을 향해 가는 길목, 바다를 앞질러 나온 파도 소리가 귀를 타고 들어온다. 차 문을 열고 바다를 마주한다. 볼을 지나는 차디찬 공기가 얼굴을 얼얼하게 한다. 얼음 같은 바람이 관통해 간 모든 것이 서늘한데 눈만은 뜨겁게 달아올라 있다. 파도 소리에 둘러싸인 채 가슴에 겨울을 담는다. 찰싹찰싹. 쓸려왔다 밀려나기를 반복하는 파도와 투명한 새벽의 추위가 한 해의 시작을 알려온다. 새해가 도래했노라고, 지난 시간에 작별을 고하고 새날을 맞이할 시간이 되었노라고. 여명을 기다리며 모래 위에 2020을 적어 내려간다. 하늘과 바다와 땅 가운데 서서 한 해가 훈기로 가득 차기를, 온정 넘치는 일 년이 되기를, 모두가 저마다의 빛을 발하기를 염원한다.

  어둠이 물러나는가 싶더니 바다가 해를 내놓는다. 세사의 사연이 수면 위로 고개를 내민다. 노랗고 빨간빛이 보석이 되어 하늘에, 그리고 바다에 맺힌다. 처얼썩처얼썩. 파도는 붉지도 푸르지도 않은 수평선을 경계로 하늘의 이야기와 땅의 사연을 엮어낸다. 찬연히 반짝이는 바다와 해를 담은 눈이 더 따뜻해져 오는 것은 두 팔 벌려 나를 기다리고 있는 새날이 있기 때문이리라. 떠오르는 태양을 벗 삼아 해변을 걷는다. 해는 저 많은 물을 벌겋게 물들이며 비상했다, 덜어낸 눈물만큼 평온해질 수 있다, 유연해질 수 있다는 생각 끝에 이른 곳 소돌해변이다.

  이곳은 마을 형상이 소가 누워 있는 모양과 닮아 ‘소돌(牛岩)’이라 불리는 마을에 있어 소돌해변이라 불린다. 소돌 해변은 소를 닮은 바위는 물론 기이한 모형의 기암괴석과 노부부에게 태기를 주었다는 아들바위, 바다 전망대, 해안 산책로 등에 둘러싸여 있다. 배호의 노래가 나오는 파도 노래비를 지나온다. 투명한 물이 비춰내는 상이 물 위를 걷는 듯한 기분을 선사한다. 물결을 따라 하늘거리는 이끼의 몸짓과 함께 완연해진 아침을 맞아들인다. 바람이 차다. 머플러로 입을 감싸두고 산책로를 따라 걷는다. 시리고 따갑지만 묘하게 따뜻하기도 한 바람을 가른다. 차갑기에 더 따스할 수 있는 겨울이 실감 난다.

  전사한 아들을 위한 기도를 통해 얻은 새 생명에 대한 사연이 깃든 아들 바위를 지나온다. 해안 초소를 거쳐 구멍이 천연 액자가 되어 바다를 담아내고 있는 기이한 모형의 바위를 만난다. 바위가 세상 어디에도 자연의 손길을 넘어설 수 있는 예술가는 없다는 울림을 전해온다. 전망대로 방향을 튼다. 경사진 계단 끝 무렵 서낭당 터가 있다. 자리를 옮긴 해당화 서낭당을 눈에 담은 후 전망대로 간다. 해안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바다를 마주하며 소리 없는 자연의 가르침을 읽는다. 넘실거려야 하는 숙명을 타고난 것이 바다다. 거기에 파고를 더하고 색을 입힌 것은 사람이다. 수평선과 대문 있는 집과 노란 해와 전망대가 인간과 자연이 함께 빚어내는 장대한 서사가 되어 가슴을 채워 온다.


[ 아들바위공원 ]


  동네 곳곳의 연탄, 메주, 곶감, 오징어로 눈요기를 하며 미로 같은 골목을 걸어 내려온다. 천장 낮은 집들이 한 사람 지나기도 빠듯하게 좁은 길을 따라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다닥다닥 붙은 집을 보며 생각한다. 어쩌면 인생은 서로 어깨를 맞대고 앉아 온기를 나누는 일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바다에 경계가 없듯 애초부터 길에도 경계는 없었을 거라고.

  주문진 수산시장으로 간다. 고깃배가 드나드는 살아있는 시장에서 사람 냄새가 눅진하게 배어난다. 복어, 오징어, 방어, 대게, 가시배새우. 갓 잡아 올린 생선과 해물이 주문진 시장을 채우고 있다. 상인과 어부의 쩌렁쩌렁한 목소리와 바다를 오가는 배와 방문자들의 바쁜 발걸음이 얼음처럼 식은 바다에 생기를 불러들인다. 파도에서도, 바람에서도, 해에서도 느낄 수 없었던 날것의 퍼덕거림이 새해의 활기를 전해온다. 손님이 생선을 손짓하고 상인이 물고기를 잡아 들고 지갑이 열리고 웃음이 오가고. 시장에 삶이 있다, 바다가 있다, 이야기가 있다. 물고기에 깃든 대양의 이야기는 이제 어부에게서 상인에게로 상인에게서 다시 시장을 찾은 이들의 집으로 전해지리라. 퍼덕거리는 생선의 몸짓을 보며 어머니의 품 같은 바다의 평온이 집마다 깃들기를 기원한다.


[ 주문진 수산시장 ]


  바다를 한껏 가슴에 담고 가야겠다. 따끈따끈한 복국으로 속을 든든히 한 후 카페에 자리를 잡고 앉아 노트를 꺼낸다. 바다를 앞두고 손을 움직인다. 하얀 종이가 수평선과 등대와 방파제로 채워진다. 줄지어 선 촬영지를 찾은 방문객들을 보며 몇 자를 더해 둔다. 이야기를 만드는 것은 사람이다. 이야기의 터전이 되는 것은 자연이다. 신화는 그렇게 적혀가는 것이다. 고개를 들고 창 너머 바다를 응시한다. 하얀 파도 위로 ‘흐트러진 머리칼은 바람으로 다스리자. 푸른 빛 이빨로는 아침 해를 물자’던 혜산 선생의 시구절을 덧대본다.


[ 주문진등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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