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누리고, 누구나 만족하는, ‘늘봄학교’
특집 ① - 학생은 행복하고 부모는 안심하는 늘봄학교
특집 ② - 늘봄학교 우수사례 대전호수초등학교 ‘우리 아이들’ 학교-마을에서 함께 키운다
특집 ③ - 인천광역시교육청 다양한 ‘아침돌봄’ & 전국 최초 학교 밖 거점늘봄센터
특집 ④ - ‘초등돌봄교실+방과후학교’에서 늘봄학교까지
올 2월, 8개교 116명의 전문기술석사 첫 배출
협약형 특성화고 10곳 선정, 교당 최대 45억 지원
모든 학생을 위한 마음건강 지원 강화
2024년 교육부 10대 중점과제 교육개혁으로 사회 난제 해결
2024년, 대학생 학자금 지원 대폭 확대한다
2028 대학입시제도 개편 - 선택과목 없는 통합형 수능, 내신 5등급 체제 확정
“누구나 누리고 누구나 만족하는 늘봄학교를 만나보세요!”
문화재 보존 및 복원 분야 한국전통문화대학교 문화재보존과학과 이상옥 교수 - 손상된 문화재에 ‘새 생명’을 불어넣는 일!
송주현 강원 소양초등학교 교사 - 아이들에겐 자발성 교육, 학부모에겐 교육멘토
프로젝트 학습을 통해 학생 주도성 높이기
경북 구미왕산초등학교 오케스트라 동아리 - 최고의 하모니를 소개합니다!
미래 세대를 위한 서·논술형 평가의 실태 및 과제
전남 신안 ‘제2의 제주도’를 꿈꾸는 자은도
한국에 있는 유학생은 얼마나 될까?
해외의 대입제도와 우리 교육에의 시사점
교사크리에이터협회에서 장관님을 초대합니다.
대한민국 교육박람회, ‘교육이 미래다’
‘교사가 이끄는 교실혁명’본격적으로 시작한다
"모두의 학교를 위한 '학교문화 책임규약' 함께 만들어요"
"함께, '꿈이 자라는 문화예술여행' 떠나자~"
"안전한 학교를 위해 우리 모두 힘내요"
아이들의 놀이터 마을학교
3.14 우리 함께 파이데이(π-day)
'함께학교 교사지원단'의 혁신적인 교육 변화 이끌다
교사 행정업무 경감의 끝판왕, 서울영본초등학교 이강길 교장을 만나다
경상남도교육청 - 경남 통학안전 책임지는, 안전아이로
이달의 기사 전체보기
글·사진 | 최홍길 명예기자
백길 해수욕장 보석같이 아름다운 1004개의 섬이 있는 전남 신안군. 그 중 특히 주목할 만한 섬을 꼽자면 ‘자은도(慈恩島)’이다. 한 섬에 큼지막한 해수욕장이 무려 아홉 개나 있기 때문이다. 규모가 작은 곳까지 포함한다면 셀 수 없다. 게다가 어떤 집의 앞마당에도 작은 해수욕장이 있을 정도이다. ‘제2의 제주도’를 꿈꾸는 자은도의 여행 매력은 시간이 지날수록 한층 풍성해진다.무한의 다리(사진| 전남 관광정보센터)여인송 70여 개의 유인도와 수백 개의 무인도를 포함해 1004개의 섬을 갖고 있기에 전남 신안군은 ‘천사의 섬’으로도 불린다. 백제 멸망 이후 변방, 비주류 게다가 벽지였기에 외지인들의 발길이 뜸할 수밖에 없었던 신안의 섬들. 하지만 최근 ‘천사대교’의 개통으로 수많은 관광객이 이곳을 찾고 있다.7.2km에 달하는 이 다리를 자가용으로 9분 가까이 달리는 동안 점점이 박힌 섬들과 그 주변의 경관에 감탄사를 연발하지 않을 사람은 없으리라. 이제 관광객들은 여객선을 이용하지 않고도 대교 건너 10개의 섬 자은도, 암태도, 추포도, 팔금도, 매도, 안좌도, 박지도, 반월도, 자라도, 부소도 등을 볼 수 있다. 그중 요즘 SNS에 자주 오르내리는 가장 핫한 곳을 꼽자면 단연 자은도이다.청동기 유적인 지석묘가 있기에 자은도에서도 아주 오래전부터 사람이 살고 있었다고 학자들은 말한다. 천사대교를 거쳐 은암대교를 건너자 ‘역사와 자연관광의 자은’이라는 표지석이 따스하게 다가온다. 글자 그대로 사랑(慈)과 은혜(恩)의 섬으로 느껴진다.여인송을 아시나요? 구영리는 면 소재지 마을로, 뒤쪽에 두봉산(斗峰山)이 있다. 이곳의 토박이들은 유독 우리말을 즐겨 사용한다. 그래서 두봉산이 아니라 말봉산으로 부른다. 인근 암태도에 승봉산(升峰山)이 있는데, 되봉산으로 부르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말봉산과 되봉산의 높이 차이는 고작 8m뿐이다. 천사대교 개통 이후, 산을 좋아하는 애호가들이 전세버스를 임대해 이 두 산을 오르는 모습도 심심찮게 볼
조선 후기 사대부 가옥 - 선교장의 겨울 정취
글·사진 김혜영 여행작가
300년 전 효령대군 11대손 이내번이 경포호숫가에 ‘선교장’이라는 저택을 지었다. 만석꾼이었던 이내번과 자손들이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덕에 선교장이 품격 있는 강릉 대표 고택으로 자리매김한 것 같다. 겨울에는 한옥과 뒷산 솔숲이 어우러진 설경이 매우 아름답다. 강릉에 눈 소식이 들리면 가장 먼저 달려가고픈 곳이다.강원 강릉 선교장 활래정 설경강릉 최고 부잣집이었던 선교장 큰 부자는 하늘이 내린다고 했던가. 세종대왕 둘째 형인 효령대군의 11대손 이내번(1703~1781)을 두고 한 말 같다. 이내번이 불현듯 나타난 족제비들을 따라갔다가 명당을 발견하고 그 터에 선교장((船橋莊:중요민속자료)을 지었더니, 대대로 집안이 번창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옛날 강릉에서 한양까지 갈 때 선교장 땅만 밟고 가도 갈 수 있다는 말이 생길 만큼 선교장의 재력이 대단했다고 한다. 지금도 본채만 100여 칸이 넘고, 부속건물까지 합하면 280여 칸에 달한다. 선교장이 처음 지어졌을 당시에는 경포호수가 지금보다 세 배쯤 넓었다. 아마도 선교장 바로 앞까지 경포호수 물이 찰랑댔던 모양이다. 경포호수를 가로질러 배로 다리를 만들어 건너다녔다 하여 ‘선교장’이라 이름 붙었다. 뒷산에는 수령 300~600년 된 금강송이 선교장을 병풍처럼 에워싸고 있다. 솔숲 오솔길에서 바라본 선교장 설경이 담백한 수묵화 같다. 99칸 저택이 눈 이불을 덮고 겨울잠을 자는 듯 사방이 고요하다. 사대부가의 생활 모습을 엿볼 수 있는 선교장의 유물전시관 내부여느 사대부 가옥과 다른 선교장의 건축 특징 선교장은 건물 구조가 여느 사대부 집들과는 다른 독특한 개성을 지녔다. 선교장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이 인공호숫가에 세워진 활래정이다. 조선 후기 선비들이 운치에 반해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었다는 그곳이다. 이름을 들으면 알만한 추사 김정희, 규원 정병조, 해강 김규진 등 당대를 대표하는 서화가들이 활래정을 거쳐 갔다
600년 전 지상에 세운 달나라 궁전 - 광한루원
옛날 사람들은 꽤 낭만적이었던 것 같다. 은하수 너머 달나라 궁전에 옥황상제와 선녀가 살고, 견우가 직녀가 은하수에 놓인 오작교에서 만난다고 상상했으니 말이다. 조선 시대 사람들의 이런 상상을 현실 세상에 구현한 것이 광한루원이다. 광한루원은 그들의 세계관과 우주관이 반영된 건축물이자 오랜 세월에 걸쳐 완성된 작품이었다.광한루를 처음 세운 황희 정승 흔히 광한루와 광한루원을 혼용한다. 광한루(보물)는 광한루원의 중심 건물로서 누각 한 채를 일컫는다. 광한루원(명승)은 광한루를 비롯해 연못, 오작교, 완월정, 춘향사당, 춘향관, 월매집 등을 포함한 누원 전체를 말한다. 광한루를 처음 세운 이는 조선 시대 청백리로 이름난 황희(1363〜1452) 정승이다. 황희는 태종의 장남 양녕대군 폐위와 충녕대군 왕세자 책봉을 반대하다 태종의 눈 밖에 나, 남원에 유배됐다. 유배된 이듬해인 1414년(태종 14년), 남원 요천 강변 부친의 서재 터에 ‘광통루’라는 작은 누각을 세웠는데, 이것이 광한루의 전신이 되었다. 황희가 세종의 부름을 받아 관직에 복귀한 뒤, 남원 부사 민여공이 광통루를 큰 누각으로 고쳐 지었다. 하동부원군 정인지는 ‘광한루’로 이름을 고쳤다. 남원 부사 장의국은 요천 물을 끌어다 연못을 만들고, 오작교를 세웠다. 선조 때 전라도 관찰사 정철은 연못에 섬 세 개를 만들어 상상 속 달나라 궁전을 완성했다. 세 섬은 각각 한라산, 금강산, 지리산을 의미하며 지상낙원을 표현한 것. 섬 사이에는 나무다리를 놓았다. 만약 옛날에 나무다리가 없었다면, 은하수를 건너는 하얀 조각배 같은 나룻배를 띄워 연못을 건너지 않았을까. 광한루원은 정유재란 때 불에 타 소실되기도 하고, 1960년대까지 재건과 보수를 거듭했다. 수백 년에 걸쳐 완성된 작품임을 알고 나면 돌덩이 하나도 허투루 보이지 않는다. 전북 남원 광한루원 완월정 야경사랑이 싹트는 공간 광한루는
마음을 비우며 걷는 문경새재 단풍 숲길
아무 생각 없이 걷고 싶을 때가 있다. 길 잃을까, 돌부리에 넘어질까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숲길이면 좋겠다. 기왕이면 단풍빛도 고왔으면. 그래서 고른 곳이 문경새재 옛길이다. 새도 넘기 힘들었다던 그 험한 고갯길이 지금은 누구라도 걸을 수 있을 만큼 훤해졌다. 옛길에 전해오는 옛이야기는 감칠맛 나는 양념 역할을 한다.10월 중하순경 문경새재에 단풍이 무르익는다.옛 선비들이 간절한 소망으로 걷던 길 문경새재는 조선 태종 때 조성한 영남대로(한양~부산 동래)의 고갯길이다. 영남에 사는 선비가 한양으로 과거를 보러 갈 때 영남대로를 이용했는데 문경새재, 추풍령, 죽령 중 한 고개를 선택하여 넘어야 했다. 선비들은 가장 험한 문경새재를 선호했다고 한다. 이유인즉, 소문에 추풍령은 추풍낙엽처럼 시험에 낙방하고, 죽령은 대나무처럼 죽죽 미끄러지고, 문경은 ‘좋은 소식을 듣는다’는 뜻을 지녀서라고. 황당한 소문에 기댈 정도로 과거급제가 간절했기 때문이리라. 중요한 시험을 앞둔 수험생과 학부모는 옛 선비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지금의 문경새재는 도립공원으로 조성되어 전 구간이 평지에 가깝다. 바닥을 고르게 잘 다져 맨발로 걸을 수 있는 구간도 있다. 울창한 숲은 어느 계절에 걸어도 좋지만, 가을을 최고로 꼽는다. 문경새재 길가에 누군가의 소원을 담은 수많은 돌탑이 쌓여 있다.문경새재를 지키는 세 개의 관문 문경새재 주차장에서 은행나무 가로수길을 1.3km 정도 걸어 들어가면 제1관문인 ‘주흘관’이 보인다. 영남에서 한양으로 갈 때 맨 처음 통과하는 관문이다. 성벽에 주흘관을 지은 석공들의 이름과 개축 연도를 새긴 기록이 남아있다. 문경새재가 조성될 당시에는 관문이 없었다. 임진왜란 때 왜군이 문경새재를 수월하게 넘어 한양을 함락한 사건 이후 약 100년에 걸쳐 제2관문 조곡관, 제3관문 조령관, 제1관문 조흘관을 차례로 지었다. 그런데 관문을 세운 뒤로는 문경새재를 넘는
물길 따라 걷는 영동 쉼표 여행
충북 영동에서도 황간면은 고요한 시골 마을이다. 읍내에 오일장이 서도 붐비는 기색이 없을 정도다. 전국에 유명 관광지와 핫플레이스가 넘치는 요즘, 굳이 영동을 찾는 이유는 휴식 같은 여행을 하고 싶어서다. 반야사와 월류봉을 감싸고 흐르는 물길을 따라 걷다 보면 일상의 스트레스가 함께 씻겨 내려가는 것 같다. 문수전과 반야사를 잇는 전각 뒷편 숲길에서 본 풍경백화산 봉우리를 병풍 삼은 반야사 영등포역에서 출발한 무궁화열차가 하루 다섯 번 황간역에 선다. 첫 열차를 타고 황간역에 도착하면 일단 역 근처 단골 식당에 들른다. 영동 향토 음식인 올뱅이국밥을 먹기 위해서다. 충청도 사람들은 다슬기를 올뱅이(올갱이)라 부른다. 된장 국물에 아욱과 부추와 다슬기를 넣고 푹 끓인 올뱅이국밥이 아침 빈속을 부드럽게 달래준다. 첫 목적지인 반야사는 군내버스로 가기 힘든 곳이어서 콜택시를 탄다. 읍내에서 반야사까지 차로 약 10분 거리이지만, 시골길이라 꽤 길게 느껴진다. 석천계곡의 반야호와 나란히 이어지는 반야사 진입로 숲길이 아름다워 일주문에 못 미쳐 내린다. 숲길과 호수 같은 계곡을 번갈아 감상하며 천천히 걷는다. 백화산자락은 호수에 잠기고, 봉우리는 운무에 가려 운치를 더한다. 숲에 둘러싸인 일주문을 통과해 5분 정도 더 걸어 들어가면 반야사 절 마당에 닿는다. 반야사는 신라 시대 사찰로 전해오며 규모는 아담하다. 대웅전 앞마당에서 보이는 백화산의 호랑이 형상이 여전하다. 산 중턱 돌무더기가 흘러내려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형상인데, 곧추선 꼬리까지 선명하다. 반야사 호랑이가 유명해도 이맘때는 극락전 앞 삼층석탑과 500살 먹은 배롱나무 두 그루가 더 눈길을 끈다. 7월에 개화해 9월까지 약 100일 동안 피고 진다는 배롱나무꽃이 붉은 등을 켠듯 마당을 환하게 밝힌다. 여름 장마와 태풍과 무더위를 견딘 배롱나무꽃은 나풀나풀 꽃잎을 떨구기 시작한다. 삼층석탑과 극락전 주변 바닥이 불그
한국 속 작은 독일 남해독일마을
1960년대 우리나라는 6·25전쟁을 겨우 벗어난 가난한 나라였다. 끝이 보이지 않는 가난을 벗어나 보려고 젊은 광부와 간호사들이 독일 파견을 자원했다. 수십 년이 흐른 뒤 그들은 백발이 되어 귀국했다. 고국에서 여생을 편히 쉬기 위해 선택한 땅은 남해 바다와 일출이 보이는 삼동면 물건리 산비탈. 그들이 독일 건축 양식으로 손수 지은 보금자리가 지금의 독일마을이다. 독일마을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독일광장. 관광안내소, 기념품숍, 독일음식점 등이 있다.독일로 파견된 광부와 간호사들 파독 광부와 간호사들은 왜 독일행을 선택했을까. 당시 우리나라는 아시아 최빈국 중 하나였다. 실업난이 심각했으며 나라 경제를 살릴 돈이 없었다. 차관을 빌리기도 어려웠다. 마침 독일은 복지 정책이 막 확대되던 때라 간호사와 기피 업종인 광부가 매우 부족했다. 정부는 독일에 광부와 간호사를 파견하는 조건으로 차관을 빌리는 데 성공했다. 1963년 파독 광부 모집에 온 나라가 들썩였다. 광부 300명 모집에 46,000명이 지원했던 것. 지원자 중에 고학력자도 많았다. 파독 광부 월급이 국내 사무직 월급보다 10배 정도 많았기 때문이다. 경쟁이 치열해 시험과 체력 검사를 통과해야 선발될 수 있었다. 어렵사리 독일에 도착한 그들 앞에 현실은 냉혹했다. 파독 광부들은 1,200m 깊이의 갱도에서 작업했다. 지열로 뜨거워진 공기와 석탄 가루를 마시며 50kg이 넘는 장비를 사용해야 했다. 장화를 거꾸로 세우면 땀이 물처럼 쏟아졌다. 어린 파독 간호사들의 사정도 다르지 않았다. 시체를 닦거나 몸을 가누지 못하는 중증 환자를 돌보는 일을 도맡았다. 파독 근로자 상당수가 월급을 받으면 최소한의 생계비만 남기고 모두 고국에 보냈다. 그 돈은 형제자매의 학비로, 부모의 논밭 구입비로 쓰였다. 국가적으로는 1963년부터 1975년까지 파독 간호사 13,000여 명, 파독 광부 8,000여 명이 벌어들인 외화가 경제 성장의 종잣돈
초여름 밤의 백제 궁궐 나들이 - 부여 백제문화단지
678년 동안 찬란한 문화를 누린 백제는 660년 의자왕 때 신라·당나라 연합군에게 멸망하고 만다. 웅진(공주), 사비(부여)로 도읍을 옮겨가며 부흥을 꿈꿨던 백제였다. 122년의 사비 시대는 백제의 마지막 불꽃이었다. 부여에 전해오는 문화재를 통해 백제의 흥망성쇠를 되새겨 본다.백제문화단지 전망대에서 바라본 백제 생활문화마을 전경백제로 떠나는 시간여행 - 백제문화단지 백제 문화를 ‘검이불루(儉而不陋) 화이불치(華而不侈)’라 일컫는다. 삼국사기의 백제본기에 나오는 말로서 백제 궁궐은 ‘검소하되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다’라는 뜻이다. 백제 시대 궁궐이 전해오지 않지만, 백제문화단지에 가면 재현된 백제 궁궐을 볼 수 있다. 백제문화단지는 백제의 우수한 문화를 알리는 국내 최대 백제 역사 테마파크다. 완공하는 데 17년이나 걸린 대단지다. 단지 안에 백제 개국 초기 궁성인 위례성과 마지막 왕궁인 사비궁을 비롯해 백제 대표 사찰이었던 능사, 신분에 따른 주거 문화를 보여주는 생활문화마을, 백제 고분공원 등이 조성돼 있다. 한옥 명장들이 공사를 맡아, 건축물이 일반 드라마·영화 세트장보다 훨씬 정교하다. 1,400년 전 백제인들이 살았던 건물을 그대로 옮겨 온 것처럼 실감 난다. 백제문화단지의 정양문을 들어서면 사비궁의 천정전이 나온다. 이곳은 신년 하례식이나 외국 사신 접견 등의 왕실 주요 행사가 치러졌던 곳으로, 매우 웅장하다. 천정전 바닥에 용을 새긴 검은 블록을 박아 화려함을 더했다. 사비궁 옆 능산리사지 오층목탑은 뒤편 대웅전을 압도할 만큼 거대하다. 하늘을 찌를 듯한 기세로 우뚝 솟아있다. 뜯어볼수록 섬세한 모습에 감탄이 나온다. 중요무형문화재 장인들이 목탑 건립 공사에 참여해, 백제 시대 장인의 솜씨를 재현한 결과물이다. 사비궁 너머로 노을이 지고, 사방에 어둠이 깔리면 낮과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 야간 조명을 받은 건축물들이 더욱 화려해진다. 오후 6시에 관람 마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