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년 전 효령대군 11대손 이내번이 경포호숫가에 ‘선교장’이라는 저택을 지었다. 만석꾼이었던 이내번과 자손들이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덕에 선교장이 품격 있는 강릉 대표 고택으로 자리매김한 것 같다. 겨울에는 한옥과 뒷산 솔숲이 어우러진 설경이 매우 아름답다. 강릉에 눈 소식이 들리면 가장 먼저 달려가고픈 곳이다.
강원 강릉 선교장 활래정 설경
강릉 최고 부잣집이었던 선교장
큰 부자는 하늘이 내린다고 했던가. 세종대왕 둘째 형인 효령대군의 11대손 이내번(1703~1781)을 두고 한 말 같다. 이내번이 불현듯 나타난 족제비들을 따라갔다가 명당을 발견하고 그 터에 선교장((船橋莊:중요민속자료)을 지었더니, 대대로 집안이 번창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옛날 강릉에서 한양까지 갈 때 선교장 땅만 밟고 가도 갈 수 있다는 말이 생길 만큼 선교장의 재력이 대단했다고 한다. 지금도 본채만 100여 칸이 넘고, 부속건물까지 합하면 280여 칸에 달한다.
선교장이 처음 지어졌을 당시에는 경포호수가 지금보다 세 배쯤 넓었다. 아마도 선교장 바로 앞까지 경포호수 물이 찰랑댔던 모양이다. 경포호수를 가로질러 배로 다리를 만들어 건너다녔다 하여 ‘선교장’이라 이름 붙었다. 뒷산에는 수령 300~600년 된 금강송이 선교장을 병풍처럼 에워싸고 있다. 솔숲 오솔길에서 바라본 선교장 설경이 담백한 수묵화 같다. 99칸 저택이 눈 이불을 덮고 겨울잠을 자는 듯 사방이 고요하다.
사대부가의 생활 모습을 엿볼 수 있는 선교장의 유물전시관 내부
여느 사대부 가옥과 다른 선교장의 건축 특징
선교장은 건물 구조가 여느 사대부 집들과는 다른 독특한 개성을 지녔다. 선교장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이 인공호숫가에 세워진 활래정이다. 조선 후기 선비들이 운치에 반해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었다는 그곳이다. 이름을 들으면 알만한 추사 김정희, 규원 정병조, 해강 김규진 등 당대를 대표하는 서화가들이 활래정을 거쳐 갔다. 이들이 남긴 편액이 활래정 곳곳에 걸려 있다.
활래정을 지나야 위풍당당한 모습을 한 솟을대문이 나온다. 대문 위에 ‘선교유거(仙嶠幽居)’라고 적힌 현판이 달려 있다. ‘신선이 거처하는 그윽한 집’이라는 뜻으로, 조선 후기 서예가 이희수가 썼다. 현판 왼쪽 아래에 그의 호 ‘소남’이 작게 적혀 있다.
솟을대문 안에는 안채, 사랑채, 중사랑, 별당, 연지당, 행랑채, 사당 등이 열두 대문을 사이에 두고 길게 연결돼 있다. 건물이 많아 궁궐을 축소해 놓은 것 같다. 동별당, 외별당, 열화당 등 별당도 세 개나 된다. 1815년에 지어진 열화당은 선교장 주인이 거처하는 큰 사랑채였다. 선교장의 중심을 잡는 건물이랄까. 왼쪽 처마 아래의 서양식 차양 장식이 눈길을 끈다. 이 차양은 구한 말 러시아 공사가 선교장 주인의 극진한 대접에 보답하기 위해 선물한 것인데, 이국적인 정취를 풍긴다.
손님들에게 무료 숙식소로 제공됐던 선교장의 줄행랑
줄행랑의 유래
열화당 맞은편에 늘어선 23칸의 행랑채는 열차 객차를 보는 것 같다. 행랑채가 줄을 선 듯한 모습이어서 ‘줄행랑’이라고 부르는데, 이 단어가 선교장에서 비롯되었다. 지금은 줄행랑이 ‘도망’을 뜻하는 말로 와전됐으나, 원래는 줄지어 늘어선 행랑 또는 부자의 의미로 쓰였다. 이 줄행랑에 관동팔경과 경포대를 유람하는 선비들이 묵었다.
만석꾼이었던 선교장 주인들은 흉년에는 곳간을 열어 이웃에게 곡식을 나눠 주고, 방문객에게 숙식을 제공했다. 손님용 밥상 소반만 300개가 넘었다. 머물다 떠나는 이에겐 옷을 한 벌씩 지어주었다. 손님을 위해 옷 만드는 침모, 서화를 표구하는 장인, 환자를 돌보는 의원이 상주했다고 하니 강릉 인심이 좋더란 말이 선교장에서 비롯됐을 만하다. 선교장에서 환대받았던 명사들은 떠날 때 글이나 그림으로 보답했다.
선교장이 여러 국난을 거치면서도 무탈하게 보존될 수 있었던 것, 국가 지정 ‘명품 고택’이 된 것, 족제비들이 집터를 점지해 준 것이 단순히 운이 좋아서가 아닌 듯싶다.
99칸 고택에서의 하룻밤
지금도 선교장에서 한옥 체험을 할 수 있다. 옛날에는 선교장 주인이 손님과 담소를 나눠보고, 인품과 학식을 상·중·하로 등급을 매겨 각각 열화당, 중사랑, 행랑채에 거처하도록 했다고 한다. 현대에 태어나 품격 테스트를 받지 않아도 되니 얼마나 다행인가.
선교장에서 하룻밤을 묵는다면 보름달이 뜨는 날을 추천한다. 뽀얀 달빛이 활래정을 비추는 풍광이 매우 운치 있을 테니. 선교장에 머물면서 상설 진행하는 다식과 배다리 만들기, 한복 체험을 해보는 것도 좋겠다. .
선교장의 곡식 창고를 고쳐 지은 생활유물전시관과 유품전시관에서는 10대에 걸쳐 전해 내려오는 서화, 고서, 전통 가구, 생활용품 등의 유물 800점을 관람할 수 있다.
눈 오는 날 선교장 뒷산 금강송숲에서 바라본 풍경
선교장 정보
주소 강원도 강릉시 운정길 63
관람 시간 09:00〜18:00
관람료 어른 5,000원/청소년 3,000원/어린이 2,000원
문의 033-648-5303
해설 시간 09:00~16:00(12:00~13:00 휴식) 매시 정시에 진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