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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미적 인간은 어떻게 탄생하는가?

글 고영직 문학평론가(<삶과 시간을 잇는 문화예술교육> 저자)

탈(脫)자연화하는 아이들

  “옥스퍼드 주니어 사전에서 자연과 관련된 단어들이 제외되고 있다.” 영국 배우 사이먼 맥버니가 온라인으로 진행된 어느 강연1에서 한 말이다. 그는 문체부·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이 주최한 2020년 <국제예술교육실천가대회>에서 이렇게 전하며 아이들의 삶에서 자연이 점점 단절되는 현상에 대해 우려했다. 그는 “자연과 관련된 단어들이 더 이상 서구 사회 어린이들의 경험을 반영하지 않는다.”라고 덧붙였다.


  아동기의 탈자연화 현상은 비단 서구 사회만의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왜 아동기의 탈자연화 현상이 문제되는가. 아이들이 경험의 소멸을 겪게 되면서 자연에서 생생한 배움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당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미디어가 재현하는 ‘편집된’ 야생 프로그램들을 소비하며 대리만족해할 따름이지, 실제의 세계를 향해 좀처럼 발걸음을 떼지 않는다. 누군가는 아이들에게 미디어는 ‘초강력 또래’(Super Peer)가 되었다고까지 말한다. 아이들이 온갖 미디어로 인해 자연 상태에서 삶에 필요한 ‘삶의 기술’을 배우고 익힐 수 있는 기회를 박탈당한다는 점에서이다. 초등학생들이 문자로는 시험공부하고, 세상 보기는 영상으로 보며, 네이버 지식인 대신에 유튜브를 검색엔진으로 이용하는 시대가 된 것을 보라. 갈수록 아이들의 내면이 ‘자연’이 없는 빈공간처럼 변한다는 느낌을 갖는 것이 나만의 억측은 아닐 것이다. ‘자연 없는 문화는 없다’는 점을 우리는 심각하게 생각하고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 


  아이들의 탈자연화 현상은 코로나19를 비롯한 자연의 역습과도 무관하지 않다. 지난 3년여 동안 코로나19를 겪으며 학교 안팎에서 다양한 문화예술교육이 필요하다는 점을 더욱 절감하게 되었다. 문화예술교육은 나와 우리 안에 내재된 ‘내면의 야성(Inner Wildness)’을 끌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대표적인 대안학교인 알바니 프리스쿨(Free School)에서 40년 넘게 활동해온 교육자 크리스 메리코글리아노는 “자신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내면의 야생이라는 불꽃을 간직하고 있어야 한다.”라고 강조한다. 내면의 야생을 갖춘 아이들은 서로 배우며 성장할 줄 아는 아이들이다. 


  문제는 중독 현상이다. 대한민국의 어른들이 집, 땅, 차, 돈에 ‘몰빵’하려는 것처럼, 지금 여기 어린이·청소년들 또한 자본 중독과 소비 중독의 문화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플랫폼 소비에 집착하며 힙합, 쿨함, ‘별점’과 ‘좋아요’에 감정이 과부하된 라이프스타일은 지금 여기 대한민국 어린이와 청소년들의 일상이 되었다. 신자유주의적 믿음과 생활양식이 아이들의 일상과 내면을 압도해버린 것이다. 그런 상태에서 자신에 대한 ‘긍지(矜持)’의 마음과 태도를 갖기란 쉽지 않다. 나에 대한 긍지란 내면의 야생성이 없고서는 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 최근 우울증을 호소하는 아이들이 급증했다. 청소년건강행태조사에 따르면, 2015년부터 2022년까지 우울감 경험률은 2015년 23.6%, 2017년 25.1%, 2022년 28.7%로 지속적으로 증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우리는 ‘희망’ 없는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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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르치는 손’을 감추는 문화예술교육

  어린이와 십 대 아이들을 어린 시민 또는 어린 미적 인간으로 길러 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정서의 사막 상태가 실재하는 사막을 만들어 낸다.”라고 한 정신분석가 빌헬름 라이히의 연구 결과는 좋은 참고가 된다. 생명 에너지의 성질을 연구한 라이히는 정서적 사막의 뿌리가 갓난아기에게 주는 손상, 즉 ‘출산의 산업화’에 내장되어 있다고 주저 없이 말한다. 그는 “갓난아기들에게 관심을 집중하고, 인간의 주의를 사악한 정치에서 돌려 아이에게 향하게 하자.”라고 촉구한다. 문화의 핵심 요소는 후세대에게 지식을 전달하는 것이다. 엔데믹 시대 우리는 아이들에게 어떤 지식과 문화를 전달해야 할지 선택하고 실천해야 한다.


  이와 관련해 강원도 양양군 조산초등학교 탁동철 선생이 언급한 ‘가르치는 손을 감추는 교육’은 중요한 참조점을 제공한다. 탁동철 선생은 아이들에게 뭘 안 가르치고, 뭘 안 배우게 하자고 말한다. 그래야 아이들의 ‘야생성’이 살아난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교육에 긴 시간이 요구되는 등 여러 어려움이 따를 수 있겠지만, 프로그램의 상투성을 어떻게 넘어설지 고민해야 한다. 학교 문화예술교육은 그동안 너무나 자주 기능 위주의 교육에 빠져 있었다. 탁 선생은 “아이들은 자기 일이면 열심히 하고, 남이 시키는 일은 뒤로 빼려 하는 건 당연하다. 아이가 하려는 일을 어른이 곁에서 도울 뿐이라는 태도는 늘 가지고 있어야 한다.”라고 말한다.2


  위 언급은 엔데믹 시대 학교 안과 밖에서 이루어지는 문화예술교육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특히 학교 안에서 이루어지는 예술교육·활동은 ‘하던 대로’ 하려는 관성의 덫에서 여전히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 다시 말해 창의, 창의를 말하지만 정작 창의력이 필요한 대상은 프로그램 운영자일 수 있다는 점을 직시해야 한다. 


  학교 문화예술교육의 진화를 위해 누군가가 ‘시켜서’ 하는 활동이 아니라, 내가 ‘내켜서’ 하는 활동이 될 수 있도록 설계하고 운영해야 한다. 어떻게 창의적인 분위기를 조성하고, 어른의 개입을 최소화할 것인지를 고민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노릇이다. 강원도 탄광 마을에서 아이들의 벗을 자처한 동시 작가 임길택 선생님(1952-1997)은 동시 ‘나 혼자 자라겠어요’에서 ‘길러지는 것은 신비하지 않아요’라고 썼다. 다시 말해 소, 돼지, 염소, 닭처럼 ‘길러지는 것’은 신비하지 않지만, ‘다람쥐’나 ‘하늘의 새’는 바라볼수록 신기하다고 시의 화자는 토로한다. 그러면서 ‘나는/ 아무도 나를/ 기르지 못하게 하겠어요/ 나는 나 혼자 자라겠어요’ 라고 썼다. 학생의 자기 주체성과 무엇이 ‘좋은 삶’인가에 대한 지향을 풀이한 것으로 위 시를 해석할 필요가 있다. 


  또한 창의력과 내면의 야생성은 고된 숙련의 노동 시간을 요구한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아이들이 흙장난을 할 수도 있겠지만, 좀 큰 아이들이라면 예술가 또는 예술교육 실천가와 함께 ‘삽질’을 해야 한다. ‘흙’을 의미하는 라틴어 ‘후무스(Humus)’라는 말이 ‘겸손’을 뜻하는 ‘휴밀리티(Humility)’와 어원이 같다는 점은 그래서 예사롭지 않다. 어쩌면 크리스 메리코글리아노가 강조한 생생한 배움이란 그런 삽질 같은 노동의 과정에서 얻어지는 어떤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런 일련의 창의적인 교육활동 과정에서 어린 시민이 재탄생하고, 어린 미적 인간이 탄생하는 것이라고 나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오해 마시라. 야생성이란 우리가 본래적으로 타고나는 것이다. 외부에서 주입되는 것이 아니다. 아이들은 자율적 환경을 만들어 줄 때 내 안의 야성(성)을 끌어낼 수 있다. 아이들 왼쪽 가슴에 있는 ‘호기심’을 살려 주어야 한다. 문화의 힘과 예술의 가치는 내 안의, 우리 안의 상투성을 부수는 힘을 지닌다. 아이들은 특히 ‘실패’하는 경험을 통해 더 많이 배울 수 있다. 이처럼 ‘손의 부활’을 위한 문화예술교육·활동이 중요하다. 학교 안팎의 교사와 현장 전문가들이 문화예술교육의 진화를 생각하며 특정 ‘사례’와 더불어 ‘고민’을 함께 공유했으면 한다. 지난 6월말 교육부 차원에서도 ‘공교육 경쟁력 제고방안’을 발표하며 ‘예술교육 활성화’를 중요한 정책 방향으로 설정했다. 이를 위해서는 학교 예술강사를 비롯해 학교 밖 지역 전문가들과 교육지원청이 지원체계를 잘 구축하고 재미있게 운영해야 한다는 점은 말할 나위 없다. 



삶을 위한 리터러시를 위하여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OECD 교육 2030 프로젝트>에서 미래교육의 방향성을 제시했다. 핵심은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고, 갈등과 딜레마를 조정하며, 책임의식을 갖춘 ‘변혁적 역량’을 강조한 점이다. 변혁적 역량에서 중요한 가치가 협력(Coagency)이라는 점은 당연하다. 이를 위해 교육계뿐만 아니라 문화예술교육에서도 ‘학습 나침반(Compass)’이라는 비전이 중요해졌다. 


  여기서 말하는 학습 나침반이라는 비전은 다른 무엇이 아니다. 나는 삶을 위한 리터러시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여성가족부, 청소년건강행태조사, 교육부 등 여러 통계자료에서 학생 행복감이 하락했다는 진단은 위험신호이다. 특히 우울감 경험률과 학교폭력 피해 경험률이 코로나19 이후 재증가하는 추세는 매우 우려스럽다. 


  학령 인구가 급감하고, 개별화된 맞춤 교육에 대한 사회적 요구가 증대하고 있다. 이런 현실에서 교육이란 무엇인가를 고민하며, 교육에 대한 패러다임을 바꾸어야 한다. 학습 나침반이란 결국 학생 스스로 좋은 삶을 향해 갈 수 있는 방향타라는 점에서 ‘삶을 위한 리터러시’가 중요해졌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살면서 가장 기본적으로 키워줘야 할 역량, 삶의 토대가 되는 지적·정서적·사회적 역량이 무엇이냐에 대해 지금 우리 사회가 고민해야 한다. 예를 들어 ‘시험을 위한 읽기’에서 ‘읽기를 돕는 시험’으로 전환하는 식으로 말이다. 학교 문화예술교육이 갖는 의미는 그와 같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개인의 자기관리 능력을 강조하는 역량(Competency) 개념에 대한 비판적 검토를 통해 아마티아 센과 마사 누스바움이 제안한 역량(Capability) 개념으로 전환해야 한다. 


  결론적으로 말해 학교는 삶을 위한 리터러시의 감각을 회복해야 한다. 이를 위해 학교는 어떻게 변해야 하고, 학교 안과 밖의 전문가들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질문하고 실천해야 한다. 아이들이 학교 문화예술교육을 통해 삶을 위한 리터러시를 생생하게 배울 수만 있다면, 우리는 아직 희망을 가져도 좋을 것이다. 어린 미적 인간이 탄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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