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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습부진학생은 어떻게 성장하는가?’ - 4년간의 탐색, 그리고 끝나지 않는 고민들

김태은 한국교육과정평가원 교수학습연구실장(국가기초학력지원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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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년부터 2020년까지 4년 동안 학습부진학생1의 성장 과정에 대한 연구2를 수행하였다. 질적 종단 연구였기 때문에 매회의 본조사마다 2~3일에 걸쳐 학습부진학생과 함께 수업을 듣고 때로는 점심도 함께 먹으며 학교 일과를 함께 했다. 방대한 자료가 수집되었고, 이를 기반으로 4권의 보고서와 한 권의 도서(우리가 몰랐던 교실)를 써냈다. 이 정도면 연구를 잘 마무리하였다고 생각해야 하는데 도통 개운한 느낌이 들지 않는다. 고민은 더 많아진다. 이유가 무엇일까? 



38명의 학생

  연구에 참여했던 학생 44명(초3 10명, 초5 12명, 중1 22명) 중 비록 속도는 느리더라도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준 학생은 27명. 이는 ‘성장’을 발달이론에서 강조하는 인지, 정의, 심동적 영역 모두에 걸친 전인적 발달, 즉 교육적 성장(교육의 목적으로서의 성장) 개념으로 접근했을 때의 해석이다. 이러한 성장의 관점은 절대적 기준으로, 어제는 몰랐지만 오늘 조금이라도 알게 되면 성장했다고 보는 견해다. 연구에서는 이와 같은 성장의 관점을 고수했고, 그래서 27명이 성장하였다는 보고서를 작성했다. 


  그러나 4년이 지난 지금, ‘이제는 학습부진이 아니며, 해당 학년의 교육과정을 따라가는 데 문제가 없다.’ 라는 기준이라면, 더 이상 학습부진이 아닌 학생은 몇 명일까? 6명에 불과했다. 이 기준에서 나머지 38명의 학생은 여전히 학습부진이다. 연구가 끝나도 개운하지 않았던 이유 하나는 계속 머릿속에 맴도는 38명의 학생 때문인 것 같다. 학년이 올라가도 바뀌지 않는 학습부진이라는 굴레 속에 있는 이 학생들은 어떤 기분이었을까? 이들이 원했던 것은 무엇일까? 



처리당하는 기분이 아닌 대접을 받고 싶어요

  얼마 전 건강검진을 받았다. 검진센터의 시스템은 참 훌륭하다. 입구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마치고 나오는 순간까지 착착착. “김태은님, 어디로 가세요. 김태은님, 다음은 어디입니다.” 일사불란한 움직임이 흥미로웠다. 수면내시경을 마친 사람들은 회복실에 똑같은 방향으로 누워있고, 내시경을 마친 또 다른 침대가 하나 들어오면 하나씩 앞으로 밀려 나간다. 들어온 순서대로 간호사가 일어나라고 깨운다. 뭔가 공장의 레일 위에 올려져 있는 기분이 들었다. 내 순서가 되었고 일어나야 하는데, 아파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도움을 요청하고 싶었지만 다들 너무 분주히 움직이고 있어서 혼자 일어나 화장실에 다녀왔다. 그동안에 내가 누워있던 침대는 이미 치워진 상태. 아프다고 말했는데 침대는 없으니 저기 대기실 소파에 가서 누우라고 한다. 가림막도 없어 사람들이 다 쳐다보는 대기실 소파에... 이때 든 생각이다. ‘아, 나 지금 처리당하는 중이구나.’


  학습부진학생도 이렇게 느끼는 때가 있었다. 그간 학습부진학생을 돕기 위한 많은 사업이 전개되어 왔고, 지속적이며 안정적인 사업 운영을 위해서는 검진센터처럼 시스템화가 필요했다. 


  시스템은 일 처리를 빠르게 하고, 효율성을 도모한다. 그러나 효율성에 치중하다 보면 디테일을 놓치는 오류가 발생한다. 일사불란한 건강검진 시스템 안에서 도움을 요청하고 싶었는데, 다들 너무 바쁘게 움직이니까 이 정도는 내가 참고 해결해야 할 것 같았다. 내가 만났던 학습부진학생들 중에도 선생님은 바쁘고 해야 할 일이 많은 분이니까 뭔가 잘하지 못하는 자신한테까지 신경을 쓰도록 하는 것은 ‘죄송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학생들이 있었다. 도움 요청을 하지 않을뿐더러 무엇을 요청해야 하는지도 몰랐다. 바쁘게 돌아가는 시스템 안에서 도움 요청 신호가 명확하게 읽히지 않으면 프로그램은 돌아가지만 학생은 ‘처리당하는 것’ 같은 기분을 느낀다. 학생이 이러한 기분을 느끼고 있다면 그 프로그램은 효과가 없어진다. 내가 공장의 레일 위에 올라앉아 처리당하는 기분이 들었던 그때처럼. 나는 이 검진센터에 다시 가지 않을 것 같다. 



못해도 잘해줘요

어떤 학습부진학생과의 면담 내용이다. 


연구자: 전에 다녔던 학원과 무슨 차이가 있어?

학 생: 그러니까요. 전에 다니던 학원은요 엄청 잘한 애들만 잘해줬거든요? 못하는 애들은 좀 차별했어요. 그래서 제가 안 다닌다고 했는데 엄마가 그거 몰라서(계속 보내셨어요). 이번에 새로운 학원은 잘해줘요. 못해도.


연구할 당시에는 그냥 흘려들었던 이야기인데, 지금 와서 다시 보니 상당히 의미심장한 신호였고 여러 번 곱씹을수록 짠해지는 말이다. 그러고 보니 이전에 수행했던 학습부진학생 대상 연구3에서도 들었던 것이 기억난다.


연구자: 선생님이 해준 말 중에 기억에 남는 말 있어요?

학 생: 좋은 기억이 없어요, 오늘 실내화 안 가지고 와서 꾸중들은 것. 음… 기억이 안 나요, 기분 나쁜 말만 들어서.

연구자: 기억에 남는 칭찬 있어요?

학 생: 없는데… 기억이 안나요. 

연구자: 받아 보고 싶은 칭찬 있어요?

학 생: 착하다, 성격 좋다, 공부 잘한다, 그냥 여러 가지 칭찬, 완벽하다, 다 뭐든지 잘한다, 친절하다, 예쁘다…



  이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는 속으로 ‘아니 뭐 잘하는 것이 있어야 칭찬을 하지.’, ‘그냥 무턱대고 칭찬을 어떻게 해주니?’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간의 자료를 다시 살펴보니 이렇게 말하는 학생들이 여럿이다. 신호를 보내는 거였다. ‘제가 비록 잘하진 못하지만, 다른 친구들에게 칭찬하듯이 저한테도 칭찬해주세요.’, ‘일단 칭찬해주시면 잘할 수 있을 것 같아요.’라는 뜻인데, 당시에는 읽어내지 못했다는 후회가 밀려든다.


  원래 예쁜 것이 아니라 예쁠 기회를 줘야 예뻐 보인다. 학생들을 만나는 동안에 나는 얼마나 이들에게 예쁠 기회를 줬을까?



할 줄 아네. 괜찮아, 충분히 잘하고 있어

  예쁠 기회. 이 기회는 그냥 생기는 것이 아니었다. 상당히 적극적으로 만들어야 하는 것이었다. 학생들이 어떻게든 긍정적인 피드백을 받도록 하는 프로그램(강점 찾기, 강점 기르기 프로그램4)을 만들어 보급한 적이 있다. 프로그램의 내용은 소위 예쁠 기회의 제공이다. 일단 쉽고 재미있는 활동으로 구성했다. 게임을 시작하게 되는 이유는 쉬워서이고, 계속하는 이유는 첫판을 깼기 때문이다. 이 단순한 원리가 이상하게 학습부진학생 지도 프로그램에 잘 적용되지 않는 것 같다. 그냥 일단 쉬워야 한다. 쉬워야 재밌다. 


“선생님, 이거 재밌는데요? 또 하면 안 돼요?”


  중학교 3학년 학생에게 초등학생용 검사를 시켰더니 다 맞았을 때 했던 말이다. 다 맞았는데 또 하겠다고 한다. 미안한 마음으로 검사지를 내밀었는데 예상을 빗나가는 반응을 보이니 놀라기도 했지만, ‘다 맞아서 기분 좋았던 적이 별로 없었겠구나.’라는 생각에 미안해졌다. 


  강점 프로그램에는 활동 과정에서 혹은 활동을 마치고 나서 학생들에게 해주어야 하는 피드백의 유형까지 기록해 두었다. 학습부진학생들이 듣고 싶은 최고의 격려는, “할 줄 아네~”였고, 네가 애쓰고 있다는 거 선생님이 잘 알아, 그러니까 “괜찮아, 충분히 잘하고 있어~”라는 위로였다. 


  이렇게 나열하고 보니, 하는 것 없이 거저 달라는 것처럼 읽힌다. 그렇지만 학생이니까 그래도 된다. 어른이 아니니까. 그냥 조건 없이 받아들여져야 하는 시기이니까. 받아들여지는 경험을 해야 다음에도 받아들여질 것이라 기대하고, 기대가 생기니 당당해지고 필요한 것을 요구할 용기도 생기니까.


  국책연구소에서 발간하는 보고서에 ‘손길’이라는 표현을 썼다고 지적을 받은 적이 있었다. 너무 감성적인 문구는 지양하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학습부진학생들의 성장 과정을 바라보면서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라고 할 때 ‘손길’ 말고 더 좋은 표현이 뭐가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교체할 만한 적당한 용어는 없는 듯해서 그냥 밀어붙였다. 학생들은 잘 만들어진 레일(시스템) 위에 올려놓기만 한다고 성장을 하지는 않았다. 효율적인 시스템도 좋지만, 그 안에 손길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지를 계속 점검하고 돌아보는 디테일이 더욱 중요함을 새삼 깨닫는다. 





1 최근에는 학습지원대상학생이라고 표현하나, 본 원고에서는 연구에서 사용한 용어로 통일하였다.

2 김태은, 권서경, 박준홍, 오상철 외. (2017-2020). 초·중학교 학습부진학생의 성장 과정에 대한 연구(Ⅰ,Ⅱ,Ⅲ,Ⅳ). 한국교육과정평가원.

3 오상철, 이화진, 김태은, 노원경, 김영빈. (2011). 학습부진학생 지도의 실효성 제고를 위한 지원 연구(연구보고 RRI 2011-6-1). 서울: 한국교육과정평가원.

4 기초학력향상지원사이트(KUCU_꾸꾸: Keep Up Catch U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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