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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폭발 직전에 놓인 한국 사회를 담다_시대에 대한 기록으로서의 소설, 염상섭의 『만세전』

글_ 홍정선 인하대 한국어문학과 교수(전 『문학과지성사』 대표)

 

  염상섭은 “문학을 하면야 일본 놈과 아랑곳이 무어랴 하는 생각으로” “주위에서 말리는 것도 물리치고” 소설가의 길을 선택한 사람이다. 그가 살았던 식민지 사회가 “정치·경제·산업·사회·문화 등 모든 분야에서(……) 막힌” 사회였기 때문에 소설가의 길을 걷기 시작한 사람이다. 그런 그가 3·1운동 직후에 쓴 『만세전』은 3·1운동 직전의 한국 사회를 그린 가장 뛰어난 소설이다. 염상섭은 3·1운동 직전의 상태를 “일체의 긍정이 아니면 일체의 부정, 이 이외에 어떠한 다른 입각지를 예상하는 것”이 불가능한 상태였다고 말하고 있다. 모든 일을 흑백 논리로 판단할 수밖에 없는 시대, 다른 선택의 길이 보이지 않는 시대였다고 말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만세전』에서 3·1운동 직전의 한국 사회를, 폭발 직전의 상태에 놓인, ‘구더기가 끓는 무덤’과 같은 사회로 그리고 있다.

 

 

3·1운동 직전의 식민지 현실 묘사한 『만세전』
  염상섭은 『만세전』에서―이 작품의 발표 당시 제목이 ‘묘지’였다는 사실에서 짐작할 수 있듯―식민지 현실의 참담하고 부정적인 측면을 차근차근 보여준다. 주인공 이인화가 동경에서 서울로 이동하면서 겪는 여러 사건을 통해 식민지 사회의 다양한 부정적 풍경을 생생하게 점층적으로 전달한다. 이를테면 이 같은 식이다. 이인화는 시모노세키의 연락선 부두에서 조선 사람이란 사실을 환기시켜주는 임의동행을 요구당하고 참담함을 느끼며, 배 안에서는 조선인을 비하하여 부르는 ‘요보’라는 말과 조선인을 무지한 야만인으로 간주하는 ‘생번’이란 말에 마주쳐서 심기가 무척 불편해진다. 또 서울로 가는 기차 안에서는 헌병 앞에서 비굴하게 행동하는 조선인과 수시로 마주치고 자신 역시 위축당하는 괴로움을 겪는다.
  염상섭은 그럼에도 『만세전』에서 민족적 모멸감을 곧장 일본에 대한 분노나 적개심으로 연결하지 않는다. 그 대신 우리 민족이 그러한 모멸과 부당한 대우를 거부할 수 있는, 당당하게 자신의 존엄을 지키며 살아가는 사람들인지를 먼저 반성한다. 일본도를 차고 위세를 과시하는 형이 하잘것없는 헌병 보조원 앞에서 굽실거리는 모습에 대한 정밀한 묘사가 바로 그런 반성의 모습이다. 이 같은 방식으로 염상섭은 『만세전』을 민족적 감정이 억제된 객관적 소설로 만들어나간다.
  그러나 주인공의 이런 반성적 인내심은 대전 근처에서 울분이 치솟고 자존심이 붕괴하는 민족 현실에 마주침으로써 마침내 내면적으로 폭발한다. 등 뒤에 아이를 업고 포승줄에 묶여 있는, “머리를 파발을 하고 땟덩이가 된 치마저고리의 매무시까지 흘러내린 젊은 여편네”의 모습 앞에서 흉악한 꿈을 꾼 것처럼 가위에 눌리고 견딜 수가 없어서 마음속으로 비명을 지른다.

 

 

 

새로운 민족 현실을 열망한 ‘객관적 소설’
  “이것이 생활이라는 것인가? 모두 뒈져 버려라!”
  찻간 안으로 들어오며
  “무덤이다! 구더기가 끓는 무덤이다!” 
  이 대목에서 염상섭은 자신이 파악한 식민지 현실의 모습을 ‘구더기가 끓는 무덤’이란, 과격한 말로 드러내고 있다. 자제해 왔던 감정을 “에잇! 뒈져라! 움도 싹도 없이 스러져 버려라! 망할 대로 망해 버려라!”라는 비명 같은 외침으로 폭발시키고 있다. 이런 염상섭의 외침 속에는 군림하는 일본에 대한 분노의 감정과 함께 구태와 악습으로 살아가는 우리 민족의 상태에 대한 탄식의 감정이 자리 잡고 있다. 동시에 당시의 민족 현실을 강하게 부정하면서 새로운 민족 현실이 도래하기를 바라는 열망을 담고 있다. 염상섭은 『만세전』에서 그 열망을
  “사태가 나든지 망해 버리든지 양단간에 끝장이 나고 보면 그중에서 혹은 조금이라도 쓸모 있는 나은 놈이 생길지도 모를 것이다.”란 말로 드러내고 있다.
  염상섭은 3·1운동 전후의 시대적 분위기를 ‘견딜 수 없는 고통’으로 받아들이면서 흑백의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자신에 대해 “스스로에게도 용허할 수 없는 자기 학대요 또 큰 범죄”라고 이야기한 적이 있다. ‘일체의 긍정이 아니면 일체의 부정’밖에 허용하지 않는 시대는 불행하고, 그렇게 살아가야 하는 사람은 더욱 불행하다는 것을 소설가 염상섭은 『만세전』을 쓰던 시기에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 같은 점을 통해 우리는 『만세전』이 민족적 감정이 억제된 ‘객관적 소설’이 될 수 있었던 이유와 함께 뛰어난 인문주의자로서의 염상섭의 면모를 발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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