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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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아침에 읽는 위안과 사랑의 시
유성호 한양대 국문과 교수(문학평론가)
글 유성호 한양대 국문과 교수(문학평론가) 어김없이 새해가 밝았다. 코로나로 뒤덮였던 묵은해를 날려 보낼 새해를 우리는 이렇게 낯설고도 희망차게 맞는다. 1년 365일이야 변함이 없겠지만 특별히 새해에 맞는 하루하루는 참으로 반갑고 또 새로운 희망을 품기에 족하다. 그만큼 우리 모두는 감염병 사태에 조금은 지쳤고 또 가장 근원적인 위안과 회복을 염원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한 기대에 찬 한 해를 고요한 기도 속에서 시작해보면 어떨까? 간절한 색동 설빔의 노래 이해인 수녀의 시집 『시간의 얼굴』(분도출판사, 1989)에는 「새해 아침에」라는 작품이 실려 있다. 지금 읽어도 섬세하고도 아름다운 위안과 사랑의 마음이 잘 전해져온다. 한번 소리 내어 읽어보자. 창문을 열고/밤새 내린 흰 눈을 바라볼 때의/그 순결한 설레임으로/사랑아,/새해 아침에도/나는 제일 먼저/네가 보고 싶다/늘 함께 있으면서도/새로이 샘솟는 그리움으로/네가 보고 싶다/새해에도 너와 함께/긴 여행을 떠나고/가장 정직한 시를 쓰고/가장 뜨거운 기도를 바치겠다// 내가 어둠이어도/빛으로 오는 사랑아,/말은 필요 없어/내 손목을 잡고 가는 눈부신 사랑아,/겨울에도 돋아나는/내 가슴 속 푸른 잔디 위에/노란 민들레 한 송이로/네가 앉아 웃고 있다// 날마다 나의 깊은 잠을/꿈으로 깨우는 아름다운 사랑아,/세상에 너 없이는/희망도 없다/새해도 없다// 내 영혼 나비처럼/네 안에서 접힐 때/나의 새해는 비로소/색동의 설빔을 차려입는다/내 묵은 날들의 슬픔도/새 연두 저고리에/자줏빛 끝동을 단다 새해 아침에 시인이 간절하게 바라는 것은 ‘너’라는 2인칭을 향한 순결하고도 설레는 사랑과 그리움의 시간이다. 늘 함께 있으면서도 여전히 그립기만 한 ‘너’는 새해에도 함께 긴 여행을 떠나고 정직한 시를 쓰고 뜨거운 기도를 바치게끔 해줄 더없이 소중한 존재이다. 어둠을 넘어 눈부시게 빛으로 오는 ‘너’의 사랑이야말로 ‘코로나19’로 사라져
한 해의 마지막 꽃, 국화 앞에서
글 최재목 영남대 철학과 교수, 시인 보는 사람이 없어도 그냥 말없이 홀로 자신을 위해서 정성을 다해서 피었다 지는 국화를 보면서 한 해를 마무리하고 싶다. 제 자리에서 향기롭다 떠나지만… 어려운 시절 노동자들에게 위안과 희망을 주었던 민중가요 <사계>는 슬픈 음색인 다단조(C Minor)이나, 빠르고 발랄하게 흘러 지나가는 탓에 슬픔을 놓치기 쉽다. 서리 내리는 차가운 계절에 국화는 홀로 피었다, 제 자리에서 가만히 향기롭다가 조용히 떠난다. 그래서 뭔지 모를 섬뜩한 슬픔과 아픔을 놓치기 쉽다. <사계>의 3절 ‘가을’에서는 “찬바람 소슬바람 산 너머 부는 바람/간밤에 편지 한 장 적어 실어 보내고/낙엽은 떨어지고 쌓이고 또 쌓여도/미싱은 잘도 도네 돌아가네”라며, 낙엽 지는 쓸쓸한 가을날 그런 정취마저도 느낄 틈 없이, 밤낮 재봉틀(일본어로 ‘미싱’)을 돌려대던 여공들의 아팠던 삶을 떠올리게 한다. 국화에도 불편한 현실 속을 헤쳐나가는 선비들의 애환이 꽃잎 속에 향기 속에 배여 있는 듯하다. 국화의 알레고리를 읽으며 나를 보다 과거 시인과 선비들은 자신들의 생각을 ‘국화’라는 시나 글, 그림을 통해서 암시적, 은유적으로 표현하였다. 그래서 전통 문예 속에서 국화가 갖는, 그런 알레고리를 살펴보는 것은 흥미롭다. 이것은 아마도 현대인들이 거의 잃어버린, ‘휙 지나가 버리고 없는’ 국화 속에 투영된 애환의 심리를 발굴하는 일일 것이다. 과거 선비, 문인들의 자존심이거나 미학이자 도덕이었던 표현법은 과연 어떤 것이었을까. 첫째, 오로지 자신을 위해 향기롭게 핀다. 국화는 아무도 보는 이가 없어도 아무 말도 없이 그냥 홀로서 정성을 다해서 핀다. 그것은 선도 악도 아닌 곳에서, 슬픔에서도 기쁨에서도 물러나 그냥 자신의 본성대로 피어 본래 지닌 향기를 마음껏 발산한다. 누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자기 자신을 위해서, 온몸을 다해서 향기롭게 피
한국 여성사에 남겨진 이이효재라는 기적
글 강응천 도서출판 문사철 대표(역사저술가)❝오늘을 살아가는 여성 가운데 이이효재에게 빚지지 않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고 이이효재 선생은 일제강점기인 1924년 경상남도 마산의 보수적인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나 비교적 유복하게 자랐다. 1945년 해방 후의 혼란기에 이화여대의 전신, 이화여전에 입학했다. 미소의 분할 점령과 좌우 대립으로 분단이 확실시되던 1948년, 부친과 친했던 미군정 장교의 초청을 받아 미국 유학을 떠났다. 6·25전쟁의 비극을 멀리서 들으며 유학 생활을 계속한 끝에 컬럼비아 대학에서 석사 학위를 받고 1957년 귀국했다. 이듬해 이화여대 사회학과 교수로 임용되어 재직하다가 1990년 정년퇴임했다. 우리는 이런 경력을 가진 여성이 한국에서 어떤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위치에 있으리라고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또 그가 한국 사회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을지도 쉽게 예단할 수 있다. 그러나 위에 적은 경력의 소유자는 그러한 짐작과 예단을 훌쩍 비켜난 삶을 살았다. 그는 자신과 비슷한 경력을 지닌 대부분의 사람들이 몸도 말도 섞을 일이 없었을 일본군 위안부, 여성 노동자, 양심수 등의 곁으로 다가가 그들과 함께 싸우고 고뇌했다. 한국 사회의 계층 구조를 고려하면 기적과 같은 삶을 살았던 고 이이효재 선생. 정년퇴임 이후에 더욱 기적 같은 삶을 이어가던 그가 지난 10월 4일 홀연히 우리 곁을 떠났다.낮은 곳에서 함께 싸우던 1세대 여성운동가 고 이이효재 선생은 미국 유학을 떠나면서 고난에 처한 우리 민족을 위해 무슨 일을 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 남부러울 것 없는 조건에도 불구하고 그런 고민을 하게 된 것은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피할 수 없었던 식민지 경험과 장로교 목사로서 일제에 저항하던 부친의 영향이었다. 유학 생활 중 들려온 전쟁 소식은 그의 문제의식을 더욱 또렷하게 해 주었다. 귀국해 교편을 잡은 이이효재 선생은 가족 문제를 통해 민족의 현실을 들여다보려 노력했으나 미국에
가을에 떠오르는 시, 윤동주의 <별 헤는 밤>
글 유성호 한양대 국문과 교수(문학평론가)윤동주 시인은 자기완성을 향한 끊임없는 반성과어두운 역사를 견딘 초상을 아름답게 보여준다. 윤동주가 연희전문 졸업을 기념하기 위해 준비한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에는 모두 열여덟 편의 작품과 <서시>라는 제목으로 알려진 시집의 서문이 함께 실렸다. 그는 시집을 구성하면서 <별 헤는 밤>을 마지막 작품으로 배치했는데, 1941년 11월 5일에 쓴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 이 작품은 가을 밤하늘에 떠 있는 별들에게 하나씩 이름을 붙여주는 윤동주의 우주적 상상력을 담고 있는 아름다운 명편이다.별 하나에 추억과별 하나에 사랑과별 하나에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별 하나에 시와별 하나에어머니, 어머니부활의 예감을 통한 희망의 차원 시집 첫 작품인 <자화상>과 함께 이 작품은 가을밤을 시간 배경으로 삼고 있다. <자화상>에서 우물에 비친 자신을 미워하고 가엾이 여기고 다시 미워하고 그리워하는 과정을 통해 “추억처럼” 남은 사나이를 노래했던 윤동주는, ‘우물 안 사나이’에서 ‘밤하늘의 별’로 시선을 옮겨 별을 헤면서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불러보는 과정을 이어간다. 이때 그는 ‘헤다’라는 함경도 방언을 썼는데, 이 단어에는 ‘세다’라는 원래 의미와 함께 ‘뜻을 헤아리다’ 같은 부가 의미까지 담고 있어서 작품에 제격을 부여하고 있다. 만약 이 작품의 제목이 ‘별 세는 밤’이었으면 어쩔 뻔했는가. 윤동주가 불러보는 기억 속의 이름은 성장기를 함께했던 친구들, 이국 소녀들, 시집가서 아이를 키우는 여자아이들, 가난한 이웃사람들,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그리고 프랑스 시인 잠과 독일 시인 릴케이다. 이러한 스펙트럼은 이 작품이 쓰이기 얼마 전에 발표된 백석의 <흰 바람벽이 있어>(『문장』 1941. 4.)에 대한 오마주(hommage)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윤동주는 백석 시편을 닮은 순서로 호명 과정을 수행하고 난 후
불안의 철학
글 최재목 영남대 철학과 교수, 시인어차피 삶이 불안을 가로질러 가는 과정이라면, 고개 돌려 피하지 말고 그러려니 웃으며 즐겨야 할 일이다.‘떨고 있는 지남침 바늘처럼’ 29세로 요절한 시인 기형도는 ‘안개’라는 시에서 “누구나 조금씩은 안개의 주식을 갖고 있다.”라고 했다. 시 속의 ‘안개’를 나는 ‘불안’이란 글자로 바꾸고 싶다. 짙은 안개는 이쪽에서 저쪽을, 저쪽에서 이쪽을 서로 보이지 않게 감춰주고 가려주는 역할을 한다. 그래서 안개는 안주하거나 도망치려는 사람에게는 은둔과 은밀한 도피를 도와준다. 그런데, 먼 곳을 쳐다보거나 미래를 전망하고자 하는 인간은 불투명하면 답답해지고 안정을 찾지 못한다. 이처럼 불안은 전망이 불투명할 때 생겨나는 본능적 심리이다. 인간이 무언가를 전망하는 것은 안정된 ‘공간적 지도’와 명료한 ‘시간적 진행 과정’을 인지할 때다. 우리가 수시로 눈을 깜빡이고 주위를 두리번거린다는 것은 무의식적으로 주위 공간 및 대상에 늘 ‘주의·집중’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나아가야 할 길의 안전한 방향을 찾고, 아울러 – 주행 중 갑자기 다른 차가 끼어들면 급제동을 하듯 – 시시각각의 닥쳐올 위기상황에 대처하는 습성은 인간이 진화해오면서 터득한 무의식적 행동일 것이다. 북극을 가리키며 가는 바늘 끝을 끊임없이 불안스레 떨고 있는 지남침처럼, 우리의 몸과 정신은 ‘흔들리면서’ 살아있다. 그것을 멈추면 더 이상 삶이 아니다. 맞다. 불안도 삶의 건강한 하나의 표현이다.삶, 근심·걱정 보따리 “사람이 태어나면, 근심[憂]과 더불어 살아간다. 장수한다고 해봤자 정신은 혼미한 채 오래도록 근심하며 죽지 않는 것이니, 얼마나 괴로운 일인가?(人之生也, 與憂俱生, 壽者惛惛, 久憂不死, 何苦也)” 『장자』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네 삶은 누구나 근심·걱정 보따리를 잔뜩 짊어지고 태어나서 살다 죽는다는 말이다. 기독교에서는 ‘원죄’라 하고, 불교에서는 ‘고(苦)’라 하고, 유교에서는 ‘
‘위안부’로 보는 작은따옴표의 역사학
글 강응천 도서출판 문사철 대표(역사저술가) ‘위안부’는 가해자였던 일본군의 입장을 두둔하듯 하는 말이지,몹쓸 고난을 당한 피해자의 편에서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지난 5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 할머니의 기자회견은 양심과 정의의 문제에 관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다. 그날 할머니는 정대협(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이라는 단체의 역할에 대해서도 문제를 제기하며 자신은 ‘정신대’가 아니라고 강력히 주장했다. ‘일본군 성노예’라는 용어에 대해서도 거부감을 내비쳤다. 1990년 11월 정대협이 발족할 무렵에는 정신대가 위안부라는 말 대신 쓰였던 것은 사실이다. 근로정신대의 일부인 여자정신대는 일제에 의해 징용되고 일반적인 노동을 강요당한 여자를 일컫는 말이다. 정신대로 끌려갔다가 위안부가 되기를 강요당한 사례도 적지 않아 양자를 혼동해 썼다고 한다. 물론 정신대의 ‘정신’은 ‘솔선하여 앞장선다’는 뜻으로, 이 역시 강제 징집당한 피해자의 입장에서 적절한 용어가 아니다.그렇다면 ‘위안부’는 어떨까? 말 그대로 풀면 위안, 그것도 성적 위안을 주는 여성이란 뜻이다. 이는 가해자였던 일본군의 입장을 두둔하듯 하는 말이지 몹쓸 고난을 당한 피해자의 편에서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위안부’를 표기할 때 반드시 달도록 되어 있는 작은따옴표이다. ‘위안부’ 문제는 1990년 네덜란드의 얀 할머니가 일본군의 성폭력을 피해 달아났다가 다시 일본군에게 잡혀갔다는 증언을 하면서 본격적으로 대두했다. 한국에서는 이듬해 8월 14일 김학순 할머니가 처음으로 자신이 ‘위안부’였다고 고백하는 기자회견을 했다. 1992년부터 서울 종로구에 있는 일본 대사관 앞에서는 매주 수요일 일본 정부의 사과와 진상 규명 등을 요구하는 수요 시위가 열렸다. 문제의 해결을 위한 국제 연대도 꾸준히 모색되었다. ‘위안부’에 작은따옴표를 붙여 일본군 ‘위안부’라 부르기로 한 것은 1995년 제3차
상상적 여행의 감동과 울림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
글 유성호 문학평론가(한양대학교 국문과 교수) “우리도 언젠가 광활하게 펼쳐진 거칠고 아득한 바다로 나아가, 산티아고 노인처럼, 강인한 의지로, 스스로를 이겨나갈 수 있지 않겠는가.” 코로나19의 장기화로 많은 이들의 활동 반경이 위축되고 있고, 모험적 삶의 순간을 허락했던 여행의 의미도 현저하게 달라지고 있다. 어느새 사람들은 해외보다는 국내, 복잡한 곳보다는 호젓한 곳을 선호하게 되었다. 스스로를 풀어줌으로써 성숙한 자아로 발돋움하게 해주던 여행이 방 안에서 치르는 독서 형식으로 변모하기도 하였다. 물론 여행이란 복귀를 전제로 하는 떠남이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귀환의 형식을 띤다. 하지만 돌아온 자아는 이미 예전의 그가 아니다. 새롭고 낯선 경험을 받아들인 탓에 그는 이미 한 차원 달라진 존재로 몸을 바꾼 것이다. 일상을 떠나 전혀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만나보는 책으로의 여행 역시, 천천히 사라져가지만 그 사라짐의 눈부심으로 빛나는 역설의 순간을 만나는 과정이 아닐 수 없다. 그 눈부신 역설의 순간을 담은 헤밍웨이의 소설 『노인과 바다』를 한번 소환해보자.어니스트 헤밍웨이 Ernest Miller Hemingway『노인과 바다』(1952)로 퓰리처상,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미국의 소설가. 문명의 세계를 속임수로 보고, 인간의 비극적인 모습을, 간결한 문체로 묘사한 20세기의 대표작가이다.운명과 맞서 싸우는 인간의 강인한 의지 늙은 어부 ‘산티아고’는 오랫동안 고기 한 마리 잡지 못하고 다른 어부들의 놀림을 받는다. 하지만 그는 내색 한번 하지 않고 카리브해로 배를 끌고 나간다. 어느 날 만난 엄청나게 큰 고기는 미끼를 물고는 바닷속을 헤엄쳐 노인과 배를 밤새도록 끌고 다닌다. 하지만 노인은 포기하지 않는다. 죽을힘을 다해 고기를 끌어 올려 배에 붙들어 맨 채 집으로 뱃머리를 돌린다. 그런데 그때 상어가 습격하여 노인이 힘들게 잡은 고기를 뜯어 먹기 시작한다. 다시 노인은 노 끝에 칼을 매고 상어와 힘겹게 싸워 항구로 돌아왔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