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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혐오하는가

글_ 김석수 경북대학교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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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 사회에서, 특히 우리 사회에서 혐오 현상이 증가하고 있다. 지금 우리 사회에는 계층 사이에, 지역 사이에, 남녀 사이에 혐오 분위기가 심해지고 있으며, 또한 원주민과 이주민 사이에, 젊은이와 노인 사이에도 혐오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심지어 우리가 사용하는 일상언어에도 혐오적 표현들이 많이 스며들고 있다. 물론 이런 혐오 현상이 우리 사회에만 일어나는 특이한 현상만은 아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이 현상은 여러 나라에서 인종, 민족, 성별, 종교를 사이에 두고 존재해왔다.
  그러면 사람들은 왜 이런 혐오 감정을 갖는가? 이는 인간이 살아가면서 자신에게 익숙한 기준만을 중시하고 이에 입각하여 살아가려는 데서 비롯되고 있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자신과 조화를 이룰 수 있는 환경에서 살아가려는 문화적 존재이다. 익히 알다시피 문화란 인간이 거주하는 자연환경이 자기에게 맞지 않아 이를 자신에게 적합한 형태로 전환한 제2의 고향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인간은 다른 문화가 개입하여 자신의 편안한 삶을 위협하게 되면 이를 거부하거나 공격하는 경향을 지니게 된다. 문화들 사이의 갈등이나 충돌 역시 이런 상황에서 발생한다. 사람들이 저마다 자신이 중시하는 삶의 기준을 절대화하면 서로를 혐오하게 되고, 심지어는 증오하게 된다.

 

 

아바타 삶이 만든 자아의 고립
  오늘날 우리 사회에는 이런 현상이 과거 그 어느 때보다 더 심해지고 있다. 이는 아마도 우리의 삶이 과거에 비해 경쟁이 지배하는 도시의 삶에 더 많이 영향을 받고, 또한 인터넷 문화와 더불어 자라난 아바타의 삶에 더 많이 지배받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이런 환경 속에 살아가야 하는 오늘의 우리는 서로의 삶의 역사를 공유하기가 쉽지 않다. 우리는 어느새 간접적이고 익명적인 만남에 더 익숙해져 가고 있다. 우리는 함께 한 기억이나 체험마저도 상실한 채 그저 도시공간과 가상공간에서 서로 간접적이고 형식적으로 관계 맺는 데 익숙해져 가고 있다. 서로의 역사에 대해서 묻는 것이 프라이버시 침해가 되는, 그래서 서로에 대해서 의례적으로 대화하는 일이 잦아진 오늘의 사회에서는 서로의 처지를 제대로 인식하기란 쉽지가 않다. 이런 상황에서는 서로의 갈등이나 충돌도 사무적으로 처리하거나 배타적으로 처리하기가 쉽다. 그래서 그런지 ‘무지의 베일’에 기초하여 ‘원초적 입장’에서 정의를 마련하고자 한 롤즈의 자유주의적 기획도 공동체주의자들로부터 비판을 받곤 한다. 이들의 비판에서 의하면, 비록 그의 기획이 공정성을 약속해주기는 하지만 공동체 구성원들 사이의 처지에 기초한 연대적 관계 마련에서는 미흡하다. 실제로 샌델도 롤즈의 이런 입장에는 고립된 ‘무연고적 자아’들이 자리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이런 자유주의적 자아관에 작동하는 자아의 고립성 문제는 오늘날 신자유주의에 이르러 더욱 더 심해지고 있다. 더군다나 익명성에 바탕을 두고 간접적 만남을 추구하는 아바타들 사회에서는 더 더욱 그러하다.

 

 

타자에 대한 책임과 나의 존엄성
  이처럼 타자의 처지에 대한 인식 부재에 기초한 간접적 만남이나 익명적 만남이 더 심해질수록 서로에 대한 편견도 더 강해질 것이며 형식적 관계 맺기도 더 잦아질 것이다. 이런 사회에서는 혐오의 강도도 더 높아질 것이다. 더욱이나 과다한 의심과 경쟁으로 인해 타자와 관계를 끊은 채 자기놀이에 더 몰입하는 사회에서는 그 같은 상황이 더 깊어질 수 있다. 자기놀이에 쏠리는 현대인은 현실 속에 존재하는 타자가 자기에게 다가오는 것을 매우 불편해하기도 하며, 심지어는 부담스러워하기도 한다. 게다가 현대인은 자기를 부정하는 타자에 대해 견디기 어려워하며 타자를 서둘러 거부하려는 움직임도 보여준다. 이로 인해 현대인은 분노조절장애를 보여주기도 한다. 현대경제연구원 장후석 연구원의 조사(2014, 「OECD 비교를 통해 본 한국 사회자본의 현황 및 시사점」)에 의하면 이미 2012년에 우리나라는 OECD 회원국들 중 관용과 배려 지수가 최하위 수준에 속하는 처지였다.
  사르트르가 주장하듯이 타자의 시선이 나의 지옥인 이상 타자에 대한 나의 혐오는 극복이 쉽지 않다. 나르시시즘적 주체가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한 우리는 혐오 현상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러므로 이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타자와 나 사이의 새로운 관계 정립이 요구된다. 나치가 가한 유대인에 대한 혐오를 몸소 경험한 철학자 레비나스는 서구 근대성에 내재된 주체 중심의 삶과 이 삶이 낳은 폭력을 비판하고 있다. 그는 이를 넘어서기 위해 규정 불가능한 타자의 자리를 마련하려고 하며, 이를 통해 주체의 자리를 재정립하려고 한다. 그는 주체의 진정한 자유는 타자에 대한 윤리적 책임에 기초하고 있음을 주장한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 확산되고 있는 혐오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각자 자신의 존재 이유와 가치가 타자를 통해 마련됨을 알아차릴 필요가 있다. 이제 우리 사회도 자신의 자유와 권리만을 주장할 것이 아니라 타자에 대한 책임을 통해 자신의 존엄성을 마련하는 길을 모색해야 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