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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로 그린 명절 풍경, 백석의 「여우난 곬 족(族)」

글_ 홍정선 인하대 한국어문학과 교수(전 『문학과지성사』 대표)

 

  언어를 매체로 삼은 시와 색채를 매체로 삼는 그림은 다르다. 색채는 의미의 명징함에서 언어를 따를 수 없으며, 언어는 형상의 구체성에서 그림을 따를 수가 없다. 그래서 우리는 공식적인 문서를 그림으로 작성하지 않는 것처럼 타인에게 꼭 보여주어야 할 사물의 모양을 언어로 그리지 않는다. 그럼에도 언어로 묘사한 풍경이 그림으로 그려놓은 풍경보다 훨씬 생생하고 구체적일 때가 있다. 백석의 「여우난 곬 족」이 바로 그런 경우이다.

 

그림보다 더 생생한 언어로 그린 풍경
  백석이 시의 제목으로 제시하고 있는 「여우난 곬 족」이란 말은 ‘여우가 나오는 골짜기에 사는 사람들’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러니까 근대적인 도시세계에 대비되는 전근대적인 산골마을 풍경을 그린다는 사실이 제목에서부터 전제되어 있는 셈이다. 백석은 이 시에서 이제는 우리의 까마득한 할아버지 할머니 시절 이야기가 되어버렸지만 시를 쓸 당시에는 우리 민족 누구에게나 무척 친숙한 삶이었던 생활, 여우와 도깨비와 귀신들과 더불어 살던 사람들의 설화적 생활을 그려 보이고 있다.
  명절은 고향에서 가족이 모이는 날이다. 살아 있는 가족이 모두 모여 안부를 물으며 회포를 풀고, 음식을 나누며 기억을 더듬는 것이 명절날이다. 그렇지만 이런 명절을 가장 순수하게 기다리는 사람은 어른이 아니라 아이들이다. 아이들에게는 명절의 흥성거리는 분위기와 맛있는 음식, 그리고 어른들의 닦달이 유예된 자유스러운 시간이 마냥 행복한 까닭이다. 백석은 이 시에서 한 어린아이의 들뜨고 행복한 시각을 통해 그러면서도 놀랍도록 정밀하게 명절 풍경을 그려나간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얼굴에 별자국이 솜솜 난 말수와 같이 눈도 껌벅거리는 하루에 베 한 필을 짠다는 벌하나 건너 집엔 복숭아나무가 많은 신리(新里)고무 고무의 딸 이녀(李女) 작은 이녀


  한국 근대시의 역사에서 백석이 우리에게 처음 선보인, 독특한 열거체 서술어법의 이 두 행의 시구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정보의 양은 대단히 많다. 아마도 딸 많은 집안의 첫 번째 딸로 보이는 신리 고모는 그리 예쁜 얼굴이 아니다. 어릴 때 마마(천연두)를 앓아서 얼굴이 곰보가 된 까닭이다. 말할 때마다 눈을 껌벅거리는 신체적 특징을 가진 이 고모는 그런데 무척 일을 잘하고 부지런하다. 그 사실은 하루에 베 한 필을 짠다는 이야기와 복숭아나무를 잘 키운 이야기로 알 수 있다. 이 큰고모는 고향 집에서 벌판 하나를 건너 있는 마을의 이씨 성을 가진 남자에게 시집을 가서 두 딸을 낳아 살고 있다.

 

언어 스케치로 떠올리는 기억의 원천
  백석은 「여우난 곬 족」에서 이 같은 방식으로 명절날 집을 가득 채우고 있는 가족들의 면면을 차례차례 묘사해 나간다. 단순하게 열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코끝이 빨간 흰옷이 정하든 말끝에 섧게 눈물을 짤 때가 많은”이란 묘사에서 볼 수 있듯 간결한 언어로 인물의 외모와 성격, 그 인물이 처한 상황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스케치를 진행해 나간다. 백석의 이런 간결한 언어 스케치에서 우리는 이 시에 등장하는 큰골 고모는 코끝이 빨간 얼굴이며 이야기할 때마다 과부 처지를 한탄하며 우는 성격이란 사실을 우리는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백석은 이렇게 그려나간 자신의 그림을 어른들의 면면에 대한 묘사 다음에 화자 자신이 주체가 된 맛있는 음식과 또래끼리의 행복한 놀이에 대한 스케치로 마감한다. 그것은 명절에 대한 우리 기억의 원천에는 가난한 시절에 맛있게 먹었던 음식물과 또래의 친인척 아이들과 즐겁게 어울렸던 시간이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을 일찍이 깨달았던 때문일까? 백석이 열거해 보이는 인절미, 송구떡, 콩가루 차떡, 두부, 뽁은 잔디, 고사리, 도야지비계 등의 음식물들은 결코 비싸거나 화려한 음식이 아니지만 우리 유년의 혀끝을 참으로고 행복하게 만들었던 기억들이다. 동시에 또래의 명절날 모인 아이들이 벌이던 쥐잡이, 숨굴막질, 꼬리잡이, 신랑각시 놀이 등은 장난감 하나 없이 성장했던 당시의 아이들, 지금의 아버지 어머니들에겐 잊을 수 없는 즐거운 시간들이다. 그래서 이 유년의 행복이 명절이 되면 우리를 고향으로 잡아당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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