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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5일 광복의 그 날

글_ 강응천 역사저술가(문사철 대표)

 

  1943년 11월 27일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 영국의 처칠 수상, 중국의 장제스 총통이 이집트의 카이로에서 모였다. 그들이 합의한 ‘카이로 공동성명’에는 다음과 같은 특별 조항이 들어가 있었다. “세 강대국은 한국인의 노예 상태에 유의하여 적당한 시기에 한국을 자주 독립시킬 것을 결의한다.”
  이 ‘공동성명’은 그해 12월 1일 테헤란에서 스탈린 소련 원수의 동의를 얻고 4대 강국의 ‘공동선언’으로 격상되어 전 세계 라디오의 전파를 탔다. 중국 충칭에 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카이로선언에 한국 독립 조항이 들어갈 것으로 예상하고 환영 모임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선언이 발표되자 실망해서 모임을 취소해 버렸다. 뿐만 아니라 충칭의 교민들은 선언에 대한 항의집회도 열었고, 임정 간행물에는 선언을 반박하는 글도 실었다.

 

포츠담선언과 일본의 패망
  왜 그랬을까? 특별 조항에 들어 있는 ‘적당한 시기에(in due course)’라는 말 때문이었다. 한국의 독립을 보장하지만 즉시 해줄 수는 없다는 속뜻을 꿰뚫어 보았던 것이다. 이 같은 임시정부 요인들의 불안감은 실제로 해방이 찾아왔을 때 현실로 나타나고 말았다.
  1945년 7월 26일 미국, 영국, 중국의 정상은 다시 독일의 포츠담에 모여 일본에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는 최후통첩을 했다. 그러나 일본은 망설였다. 한국과 타이완만은 놓치지 않으려는 미련 때문이었다. 그러자 미국은 8월 6일 일본의 히로시마에 리틀보이라는 이름의 원자폭탄을 떨어뜨렸다. 역사상 최초로 인류를 향한 핵 공격으로 7만 명이 그 자리에서 죽고 훨씬 더 많은 사람이 후유증으로 죽었다. 그리고 8월 9일 0시를 기해 소련군이 만주와 한반도의 일본군을 향해 진격을 개시하고, 미국은 나가사키에 두 번째 핵 공격을 감행했다.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던 일본은 포츠담선언을 받아들일 뜻을 밝히고 미국을 상대로 한 화평 공작에 나섰다. 공산 소련에 점령당하는 것보다는 미국과 협상하는 것이 그나마 일본이 덜 죽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화평 공작이 진행되는 중에도 소련군은 빠른 속도로 남하해 한반도로 밀고 들어왔다. 조선 총독 아베 노부유키는 소련의 서울 점령을 기정사실로 보고 유력한 좌익 정치인 여운형을 만났다. 한국에 있는 일본인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 달라고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선언한 8월 15일, 한반도는 진공 상태와도 같은 힘의 공백기로 빠져들었다. 아베의 부탁을 받아들인 여운형은 그날 바로 서울에서 조선건국준비위원회(건준)의 문을 열었다. 건준은 곳곳에서 일본인을 대체하는 한국인의 자치 기구를 만들어 나가고, 김구가 이끄는 임시정부를 비롯한 해외의 독립운동 세력은 귀국을 서둘렀다.

 

광복 한 달, 험난한 자주 독립의 길
  그러나 미국을 상대로 한 일본의 화평 공작은 헛되지 않았다. 8월 22일 서울이 포함된 38선 이남을 미군이 점령한다는 방침이 아베 총독에게 전해졌다. 조선총독부나 한국인은 모르고 있었지만, 미국과 소련 사이에는 이미 38선을 경계로 한반도를 분할 점령하자는 합의가 이루어졌던 것이다. 조선총독부는 아연 생기를 되찾고 다시 한국인을 상대로 한 치안 유지에 나섰다. 미군이 들어와 일본군을 무장해제하기 전에는 아직 자기들의 조선 지배가 끝나지 않았다는 태도였다.
  여운형은 미군과 소련군이 들어오기 전에 한국인의 독자적인 정부를 세우고 이를 바탕으로 그들과 협의에 나설 생각을 했다. 그래서 9월 6일 건준을 국가 체제로 전환한 조선인민공화국의 수립을 선언했다. 그러나 바로 다음 날 미 극동군사령부는 미군이 38선 남쪽에 들어오면 군정을 실시할 것이라고 밝혀 여운형의 김을 빼 버렸다.
  미군은 9월 8일 인천에 상륙하고 이튿날 서울에 들어가 조선총독부의 공식 항복을 받았다. 소련군은 미군보다 훨씬 더 빨리 움직여 이미 8월 21일 원산에 상륙하고 이튿날에는 38선 이북에서 일본군의 항복을 받았다. 이처럼 38선 양쪽에 미소 양군이 진주를 마치자 9월 11에는 남북을 잇는 경의선 철도의 운행이 중단되었다. 남과 북으로 귀국하는 해외 독립운동가들은 무장해제를 당한 채 개인 자격으로 들어와야 했다.
  한국이 완전 독립을 이루는 ‘적당한 시기’는 도대체 언제 찾아올 것인가? 해방 한 달을 맞이한 우리 민족의 앞에는 아직 자주 독립으로 가는 험난한 길이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