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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교육

왜 행복을 갈망하는가

글_ 김석수 경북대 철학과 교수

 

인간은 결코 홀로 행복할 수 없으며 타자를 통해서 비로소 행복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타자를 존경하는 윤리적 활동, 타자를 사랑하는 미적 활동, 타자를 믿고 타자를 위해 헌신하는 종교적 활동을 통해서 비로소 행복할 수 있다.

  인간에게 ‘행복’이란 무엇인가? 행복(幸福)이란 말뜻 그대로 다행스러운(幸) 복(福), 이른바 인간이 살아가면서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즐거움과 보람에 대해서 감사함을 느끼는 경우이다. 물론 이 삶의 즐거움과 보람은 노력 없이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의 경우는 아무리 노력하여도 고난과 실패를 거듭하기도 한다. 이 경우, 우리는 이 사람에 대해서 불행하다고 한다. 그렇지만 그런 사람의 경우도, 언젠가는 자신의 삶에 정성을 다하면 반드시 즐겁고 보람된 날이 있을 것이라고 우리는 믿고자 한다. 따라서 행복은 노력으로부터 주어지는 선물이라고 할 수도 있다. 자유를 갈망하는 인간이라면 그 어떤 인간도 이 행복이라는 선물을 쉽게 포기할 수 없다. 그래서 일찍이 서양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도 행복을 인간이 추구해야 할 최고선이자 궁극목적이라고 주장하였다. 그 역시 행복(εὐδαιμονία)을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자신의 능력, 즉 이성을 잘 발휘하여 자기실현을 이루어내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칸트의 ‘행복’은 옳음을 행하려는 선의지
  그런데 인간이 자신의 이성 활동을 통하여 자기실현을 이루어낸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이 활동이 그저 잘 먹고 잘 즐기는 생리적 활동이나 심리적 활동에만 머물러 있다면, 이 활동은 인간의 자연적 한계, 즉 질병이나 죽음이라는 한계가 안겨주는 허무함을 넘어설 수 없다. 따라서 이런 활동으로는 인간은 자기실현을 제대로 이루어낼 수 없다. 참된 자기실현은 자신의 자연적 한계를 넘어서는 자유의 지평을 마련할 때 가능하다. 이 지평은 이성이 자기를 보존하고 욕구를 충족시키려는 생리법칙이나 심리법칙을 넘어 타자를 배려하고 타자와 더불어 살아가려는 활동이나 타자를 위해서 희생도 감당해내는 활동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이성의 이런 활동은 윤리적 활동으로 이어져야 하며, 나아가 미적 활동이나 종교적 활동으로도 이어져야 한다. 인간은 결코 홀로 행복할 수 없으며 타자를 통해서 비로소 행복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타자를 존경하는 윤리적 활동, 타자를 사랑하는 미적 활동, 타자를 믿고 타자를 위해 헌신하는 종교적 활동을 통해서 비로소 행복할 수 있다.
  따라서 행복은 자기보존이나 자기만족에만 집중하는 쾌락을 넘어 타자에 대한 배려와 공감, 그리고 헌신을 통해서만 실현될 수 있다. 그러므로 행복은 타자를 도구화하는 기술적 삶을 넘어 타자와 더불어 살아가는 덕스러운 삶을 요구한다. 덕은 본래 힘을 의미하지만, 이 힘은 타자를 부당하게 지배하려는 힘이 아니라 자신의 탁월성을 제대로 길러내어 타자와 더불어 살아가려는 활동력이다. 그래서 저 유명한 철학자 칸트도 행복이 쾌락으로 전락할 수 있음을 염려하여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의 근거를 좋음을 추구하는 쾌락 의식보다 옳음을 수행해야 하는 의무 의식에서 찾으려고 하였다. 좋음이라는 가치보다 옳음이라는 가치에 주목하는 그는 행복을 최고선으로 보는 아리스토텔레스와 달리 옳음을 행하려는 선의지를 더 중시하였다. 그는 옳음을 수행하는 의무 이행 없이 행복만을 추구할 경우, 인간은 자신의 존엄성의 근거인 자유를 상실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옳음을 추구하는 의무를 통해서 행복에 이르려고 하였다. 물론 그가 주장하듯이 의무와 행복이 일치하는 최고선에 이르는 것은 유한한 인간에게는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옳음과 좋음의 조화로 참된 자기실현
  실제로 우리의 삶에는 옳음을 추구하는 길과 좋음을 추구하는 길, 즉 해야 하는 것과 하고 싶은 것 사이에 부단히 갈등이 존재한다. 옳음을 지나치게 추구할 경우 도덕적 형식주의나 보편주의에 빠질 수 있으며, 반대로 좋음을 지나치게 추구할 경우 쾌락주의나 이기주의에 매몰될 수 있다. 이 갈등을 풀어가기 위해서는 우리는 먼저 좋음을 추구하는 서로의 마음들이 조화를 이루어 아름다움에 이르도록, 즉 심리적 쾌락을 넘어 미적 공감에 이르도록 해야 한다. 나아가 이를 통해 우리는 미적 감정으로부터 선한 감정으로 나아가야 한다. 역으로 옳음을 추구하는 길이 형식주의나 보편주의로 흐르지 않도록, 이른바 화이부동(和而不同)을 실현할 수 있기 위해서는, 이 길이 미적 공감의 도움을 받아야 하며, 나아가 이를 통해 각자의 좋아하는 감정들에 열려 있되 조화를 이루어내야 한다. 따라서 옳음과 좋음의 조화, 의무와 행복의 조화는 생리적이고 심리적인 삶을 넘어서는 미적인 삶의 과정을 요구하며, 이를 통해서 비로소 우리는 진정한 도덕적 삶을 일구어낼 수 있다. 이럴 때에 우리는 또한 참된 자기실현에 이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