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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잎 소리가 손짓하는 길목, 담양

글_ 강지영 명예기자(수필가)  사진_ 김경수 사진작가

 

 

죽녹원, 대숲과 담양의 정자를 한눈에
  훤소로 가득 찬 귓속을 비워내고 싶었다. 티끌 한 점 없는 맑은 물 같은 소리로 귀를 씻어내고 싶었다. 투명한 소리를 찾아 들어가 보면 굳어가는 이 귀도 물렁하게 만들 수 있을까. 바깥귀를 뒤덮은 소리를 벗기려 쭉 뻗은 대가 푸른 소리를 울려내고 있는 곳, 죽녹원을 찾아 들어간다.
  2003년 조성된 죽녹원은 대숲과 담양의 정자들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관광 명소다. 대나무 그늘을 지붕삼아 죽림욕을 즐길 수 있는 산책로로 들어선다. 길은 운수대통길, 죽마고우길, 사랑이 변치 않는 길, 철학자의 길, 선비의 길 등 8가지 주제를 따라 이어진다. 어떤 행로를 택하느냐에 따라 풍경도 달라질 터, 입구를 지나 죽마고우길로 방향을 잡는다. 길게 늘어선 대나무가 만들어낸 그늘이 이마의 땀을 식혀준다. 대나무를 지나온 바람이 발그레 달아오른 볼을 매만진다. 숨을 고르며 걷다 보니 몸은 어느새 식어있다. 덜어냄이란 시간을 들이는 것과 같은 것이라는 깨우침이 나를 지나간다.
  운수대통길 끝에 이이남 아트센터가 있다. 오랜 동양화를 미디어 아트로 재해석해내는 것으로 유명한 작가 이이남의 이야기가 발을 이끈다. 어둠을 수놓은 빛의 향연. 김홍도의 묵죽도에서 박연의 폭포를 거쳐 아사천에 핀 매화까지. 원화의 여백을 배경으로 미디어가 만들어낸 움직임이 묘한 여운을 전한다. 21세기 동양화를 눈에 담아서일까. 미술관을 나오니 대나무가 새삼 달라 보인다. 보는 눈에 따라 사물도 다르게 마음에 맺히나 보다. 사색의 길을 지나 이른 곳은 철학자의 길이다. 이끼 낀 돌담을 따라 이어지는 독일 하이델베르크의 철학자 길과 강을 가운데 둔 일본 쿄토의 철학자 길이 겹쳐진다. 걷는 행위는 철학과 닿아있다. 걷기와 성찰은 사고하는 인간의 숙명일지도 모른다. 사유하는 인간은, 스스로를 돌아볼 줄 아는 인간은 고독할지언정 외롭지는 않으리라.

 

  

 죽녹원

 

  갈림길에서 시가문화촌으로 들어선다. 가사문학으로 국문학사를 풍성하게 한 담양의 면면을 모아둔 이곳에서는 면앙정, 식영정, 소쇄원, 광풍각, 송강정, 환벽당 등을 볼 수 있다. 길을 가다 보면 면앙 송순, 하서 김인후, 송강 정철, 제봉 고경명 등 조선 중기 문인들의 작품을 현대의 서예작가들의 손을 빌어 빚어 놓은 시비도 만나게 된다. ‘굽어보면 땅이요, 우러러보면 하늘이라, 그 가운데 정자 짓고 흥취 호연하다’던 송순의 시 구절처럼 하늘과 땅을 올려다보기도 하고 내려다보기도 하며 자신을 살펴 가는 것이 우리네 삶이 아닐까.
  죽녹원 근방 국수촌에서 허기를 달랜다. 커피 한 잔을 들고 찾은 곳은 관방제림이다. 관방제림은 관방천 제방에 조성된 노거수 숲이다. 빼곡하게 자리 잡은 200~300년 수령의 고목(古木)들이 멋스러운 풍치림을 이루고 있다. 짙은 녹음과 그림자 때문인지 여름인데도 여름 같지 않은 청량감이 감돈다. 푸조나무, 팽나무, 개서어나무. 줄줄이 늘어선 나무가 들려주는 하늘과 땅 그리고 바람의 사연에 막혀 있던 귀가 뚫리는 것 같다. 나무가 관통해 온 시간과 뜨거운 해를 가리고 선 나뭇잎과 나무그늘 속을 걷는 사람들. 자박자박한 발소리가 기분 좋게 귀를 울린다.
  다음 행선지는 메타세쿼이아 길이다. 아름다운 길 일 위에 선정되었다느니 어느 드라마의 배경이었다느니 출사지로 각광받고 있다는 수식어는 메타세쿼이아 길에 들어서는 순간, 까마득히 지워진다. 여기는 초록비가 하염없이 쏟아져 내리는 동화 속이다. 지금 나는 절정의 녹음이 뱉어낸 푸르름이 눈과 귀, 코와 입을 간질거리게 하는 초록 행성을 거닐고 있다. 메타세쿼이아 숲의 공기를 온몸으로 받아들이며 해와 녹음, 나무와 길의 어우러짐이 준 감동을 가슴에 새긴다. 길은 굴곡진 데가 없고 하늘은 청명하고 나무는 곧게 뻗어있다. 드문드문 놓여 숲의 운치를 더해주는 벤치와 오두막과 조각상들. 사각사각, 소곤소곤, 속살속살. 귀를 간질이는 이 소리는 푸른 잎을 빌어 숲이 전해온 응원가일지도 모른다. 그래, 이 길을 걸으며 나를 그리고 나와 인연이 닿았던 누군가를 반추해 보는 것만으로도 나는 한 걸음을 더 내딛고 있는 것일 것이다.

 

 

  

가시문학관

나무박물관

 

가사문학의 정수를 느끼다
  청량한 공기로 귀도 씻었으니 숨을 골라야겠다. 가사문학관으로 간다. 가사는 고려 말에 생겨나 조선 사대부가 문학 양식으로 확립시킨, 음보를 가진 율문(律文) 작품이다. 사대부 이야기를 적은 사대부 가사에서부터 부녀자의 목소리가 들어 있는 규방가사, 서민들의 이야기를 풀어 놓은 서민가사까지, 작가층이 다양한 가사는 어느 문학 장르보다 더 다양한 내용을 담고 있다. 정쟁에 환멸을 느끼고 한양을 떠나온 사림들이 모여들기 시작하면서 담양은 가사문학의 중심지로 자리 잡았다. 이서의 낙지가, 송순의 면앙정가, 정철의 성산별곡 등 18수의 가사가 이곳에서 태어났다.
  공들여 장식한 정원 같은 경내를 지나 문학관으로 들어선다. 면앙정 현판과 송강서원 현판, 면앙 송순과 송강 정철 등의 작품이 있는 제1전시실을 지나온다. 제2전시실에 들어가니 소쇄원 그림과 정극인의 상춘곡, 허난설헌의 규원가 등이 있다. 정철의 성산별곡 한 구절을 곱씹으며 1층으로 내려간다. 제3전시실에서 석천 임억령, 하서 김인후, 제봉 고경명 등의 작품을 만난다. 오래전 교과서에서 읽었던 작품들의 원본을 본 데서 온 먹먹함과 붓이 뱉어낸 글이 건넨 묵직한 울림을 담고 문학관을 나온다. 송강 정철의 성산별곡 한 구절을 형상화했다는 피리 부는 목동 동상이 뒤늦게 눈을 지나간다. 동상을 가만 보고 있자니 수백 년 전 어느 목동이 불었다던 피리소리가 귀를 두드리고 들어오는 것도 같다.

 

 

조선 중기 정원의 백미, 소쇄원
  다음 여행지는 소쇄원이다. 소쇄원은 소쇄옹 양산보(1503~1557)가 스승 조광조의 유배에 낙심해 담양으로 내려와 만든 정원이다. ‘깨끗하고 시원하다’는 뜻을 가진 소쇄원은 조선 중기 정원의 백미로 꼽힌다. 대나무 길을 지나 소쇄정에 닿는다. 소쇄원의 중심이라는 너럭바위를 거쳐 제월당으로 향한다. 황토와 돌, 기와로 만들어진 담장 가운데 ‘소쇄원 주인 양산보의 소박한 보금자리’라는 뜻의 우암 송시열 글이 남아있다. ‘비개인 하늘의 상쾌한 달’을 뜻하는, 양산보의 서재 제월당. 지붕 아래 편액에 양산보를 찾아온 벗들의 이름이 빼곡하게 적혀있다. 수많은 이들이 백리 길도 마다않고 달려오게 한 마음에는 벗을 향한 그리움이 자리하고 있었을 것이다. 제월당 아래에 ‘비개인 뒤 해가 뜨며 부는 청량한 바람’이라는 의미의 광풍각이 있다. 손님을 맞기 위한 사랑방이다. 마루에 등을 기대앉아 본다. 대숲에서 불어오는 바람과 졸졸거리는 물소리와 나지막한 담장이 한 점의 그림이 되어 나를 지나간다. 귀를 막고 있던 뭔가가 ‘툭’하고 떨어져 나간 듯한 짜릿함이 등을 쓸고 간다. 이런 순간에는 청명해진다는 말이, 비워졌다는 말이 더없이 탁월한 표현이리라. 

  

소쇄원

 

 

느림을 만끽하는 슬로우 시티, 삼지천 마을
  해가 넘어가고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하는 시간, 느림을 문두에 내건 ‘슬로우 시티’, 삼지천 마을로 들어간다. ‘슬로우 시티’는 현지 재료로 만든 제철 음식을 먹자는 ‘슬로우 푸드’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자연과 더불어 사는 삶과 느림과 여유를 슬로건으로 내 건 ‘슬로우 시티’ 운동은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세계 각지로 전파되었다. 아시아에서는 전남 완도군의 ‘청산도’, 목포시 신안군의 ‘증도’, 담양군의 ‘삼지천 마을’, 장흥군의 ‘장평, 유치지역’이 슬로우 시티로 선정되어 있다. 아름드리 고목과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나지막한 담, 담장을 뒤덮은 덩굴과 예스러운 가옥 마당의 장독대. 마을 안으로 들어갈수록 시계초침은 느려지고 발은 가벼워진다. 숙소에 들어가기 전, 돌담에 적힌 나옹선사의 시를 속으로 읊조려 본다. ‘청산은 날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창공은 날보고 티 없이 살라하네, 사랑도 벗어놓고 미움도 벗어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청산은 날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창공은 날보고 티 없이 살라하네, 성냄도 벗어놓고 탐욕도 벗어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어둠이 내려앉는다. 공명하는 시구(詩句)가 가슴을 울린다. 새소리가 들려온다. 내일은 정처 없이 담양을 거닐어 봐야겠다. 면앙정도 좋고 환벽당도 좋고 담빛 예술창고도 좋고 미암 박물관도 좋다. 발 닿는 대로 다니며 오늘 비워낸 말간 귀에 세월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담아봐야겠다.

삼지천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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