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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속 작은 독일 남해독일마을

글·사진 김혜영 여행작가

  1960년대 우리나라는 6·25전쟁을 겨우 벗어난 가난한 나라였다. 끝이 보이지 않는 가난을 벗어나 보려고 젊은 광부와 간호사들이 독일 파견을 자원했다. 수십 년이 흐른 뒤 그들은 백발이 되어 귀국했다. 고국에서 여생을 편히 쉬기 위해 선택한 땅은 남해 바다와 일출이 보이는 삼동면 물건리 산비탈. 그들이 독일 건축 양식으로 손수 지은 보금자리가 지금의 독일마을이다. 

독일마을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독일광장. 관광안내소, 기념품숍, 독일음식점 등이 있다.독일마을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독일광장. 관광안내소, 기념품숍, 독일음식점 등이 있다.


독일로 파견된 광부와 간호사들

  파독 광부와 간호사들은 왜 독일행을 선택했을까. 당시 우리나라는 아시아 최빈국 중 하나였다. 실업난이 심각했으며 나라 경제를 살릴 돈이 없었다. 차관을 빌리기도 어려웠다. 마침 독일은 복지 정책이 막 확대되던 때라 간호사와 기피 업종인 광부가 매우 부족했다. 정부는 독일에 광부와 간호사를 파견하는 조건으로 차관을 빌리는 데 성공했다. 


  1963년 파독 광부 모집에 온 나라가 들썩였다. 광부 300명 모집에 46,000명이 지원했던 것. 지원자 중에 고학력자도 많았다. 파독 광부 월급이 국내 사무직 월급보다 10배 정도 많았기 때문이다. 경쟁이 치열해 시험과 체력 검사를 통과해야 선발될 수 있었다. 어렵사리 독일에 도착한 그들 앞에 현실은 냉혹했다. 


  파독 광부들은 1,200m 깊이의 갱도에서 작업했다. 지열로 뜨거워진 공기와 석탄 가루를 마시며 50kg이 넘는 장비를 사용해야 했다. 장화를 거꾸로 세우면 땀이 물처럼 쏟아졌다. 어린 파독 간호사들의 사정도 다르지 않았다. 시체를 닦거나 몸을 가누지 못하는 중증 환자를 돌보는 일을 도맡았다. 파독 근로자 상당수가 월급을 받으면 최소한의 생계비만 남기고 모두 고국에 보냈다. 그 돈은 형제자매의 학비로, 부모의 논밭 구입비로 쓰였다. 국가적으로는 1963년부터 1975년까지 파독 간호사 13,000여 명, 파독 광부 8,000여 명이 벌어들인 외화가 경제 성장의 종잣돈이 되었다. 


남해독일마을의 역사를 정리해 놓은 남해파독전시관남해독일마을의 역사를 정리해 놓은 남해파독전시관


파독 광부의 애환이 담긴 ‘광부의 한’ 막대기파독 광부의 애환이 담긴 ‘광부의 한’ 막대기

아름다운 남해에 스며든 독일 문화

  2000년부터 독일마을 건설이 시작됐다. 귀국을 희망한 파독 광부와 간호사들이 남해군이 분양한 땅을 사고, 독일에서 건축자재를 들여와 전통 독일 양식으로 집을 지었다. 전깃줄을 지하에 묻고, 아름다운 바다 풍경을 살려 작은 독일을 완성하는 데 6년이 걸렸다. 산비탈에 쪼르르 늘어선 주황색 삼각 지붕 사이로 남해의 푸른 바다와 산과 들녘이 펼쳐진다. 뜨거운 햇살 아래 주황과 초록의 대비가 싱그럽다. 


  독일마을 입구에는 독일 문화를 경험할 수 있는 상점가가 조성돼 있다. 언덕길에 독일 수제 맥주, 소시지, 독일식 돈가스 ‘슈니첼’, 독일식 족발 튀김 ‘슈바인 학센’ 등 독일 음식을 파는 식당과 카페, 독일마켓 등이 즐비하다. 상점 건물도 모두 독일풍이다. 


  언덕을 더 올라가 상점가를 벗어나니, ‘독일마을’이 새겨진 표지석이 보인다. 표지석 뒤로 파독 근로자와 가족들이 사는 주택 43채가 그림처럼 자리했다. 이 중 30여 가구가 부업으로 민박을 운영한다. 집마다 문 앞에 ‘파독의 집’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집 이름, 집주인 이름, 독일 근무처, 자기소개 글을 적어 놓았다. 발길이 멈춘 집은 고인이 된 파독 간호사 우춘자 씨의 ‘하이디하우스’. 그녀가 독일인 남편과 알프스 소녀처럼 살겠다는 소망을 담아 지은 이름이었다. 


파독 간호사 고 우춘자씨의 하이디하우스파독 간호사 고 우춘자씨의 하이디하우스

독일마을 A to Z 남해파독전시관

  독일마을의 핵심 공간은 마을 꼭대기에 있는 독일광장이다. ‘도이처플라츠’라고 불리는 이곳에 ‘남해파독전시관’이 있다. 독일 파견 역사, 독일마을 조성 과정, 파독 근로자의 기증품 등을 전시한다. 지하 갱도를 재현한 전시관 통로를 지나며 파독 광부들이 지하 1,200m 갱도에 들어설 때의 절박함을 느껴본다. 광부들은 매일 아침 갱도에 들어갈 때마다 ‘글릭아우프(Glück auf 살아서 돌아오라)’를 외쳤다고 한다. 


  전시실에는 월급 명세서, 파독 광부가 광산에서 사용했던 작업 도구와 작업복, ‘코리아 엔젤’이라는 찬사를 들은 파독 간호사들의 의료기기, 가운 등이 걸려 있다. ‘광부의 한’이라는 설명이 붙은 막대기가 눈길을 끈다. 막대기에 한글, 한자, 영어, 독일어가 빼곡히 적혀 있다. 광부들이 몸이 아프거나 고국의 제사에 가지 못해 마음이 아플 때마다 한풀이 하듯 한 자 한 자 적어 넣은 것이라고. 글자를 해석할 수 있다면, 구구절절한 사연에 가슴이 먹먹해질 것 같다. 


  파독 근로자들이 기증한 생활용품을 통해 독일에서의 일상을 엿본다. 고국의 가족 또는 연인과 주고받은 편지, 파독 간호사가 독일인 남편과 결혼할 때 입은 웨딩드레스, 틈틈이 따놓은 각종 자격증, 책, 집이 그리울 때마다 하나씩 사 모은 향수들, 찻잔 세트 등에 그리움이 가득하다. 영상실에서 ‘독일로 떠난 젊은이’ 영상을 보며 이들의 애환을 짐작해 본다. 


남해 바다가 한눈에 들어오는 곳에 조성된 남해독일마을남해 바다가 한눈에 들어오는 곳에 조성된 남해독일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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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파독전시관

위치    경남 남해군 삼동면 독일로 89-7

문의    055-860-3540

관람 시간 09:00~18:00(월요일 휴관)

관람료 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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