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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산, 어미의 품에 안기다

글 _ 강지영 객원기자

지천이 열매다. 가지 끝에 매달린 바알간 과실이 여름을 알려온다. 붉디붉은 앵두가 비처럼 우두둑 떨어져 내리는 계절, 나뭇잎이 머금긴 햇살이 흙으로 되돌아가는 시간을 타고 도로를 달린다. 구름은 하늘을 유유히 떠다니고 바람은 잔잔히 땅을 쓸어오며 열매는 그 가운데서 나지막이 풍성함을 더해간다. 어미가 젖을 내놓듯 먹거리를 한 아름 안겨 오는 땅, 예산으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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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희 선생의 시간을 복원한 추사 고택

  첫 여정은 포개진 처마가 하늘을 캔버스로 만들어 두고 있는 곳, 추사 고택이다. 추사 고택은 금석학자이자 추사체를 완성한 서예의 대가 김정희 선생이 어린 시절 기거했던 곳이다. 예산 끝자락, 추사 기념관, 추사 묘지, 화순 옹주 용문, 백송과 더불어 김정희 선생의 혼이 투명한 먹빛으로 잔잔한 파문을 일으킨다. 46점의 전시물로 김정희 선생의 시간을 복원해 둔 기념관으로 들어선다. 금석학자로의 치밀한 궁구(窮究) 흔적과 서예가로의 예술혼이 깃든 작품으로 채워진 전시실 출구 앞, 주어진 소명을 다하기 위해 열 개의 벼루를 밑창 내고 천 자루의 붓을 짧게 만들었다는 추사의 말이 발을 붙든다. 탄식이 인다. 세대를 넘어 감동을 전하는 작품에 불어 넣었을 뼈를 깎는 노력이 가슴을 두방망이질한다. 


  선생의 묘를 앞두고 고개를 숙인다. 바람이 푸르디푸른 무덤을 부드럽게 매만지고 간다. 앵두가 쏟아져 내리는 길목 옆 우물을 지나 사랑채와 안채, 사당으로 둘러싸인 고택으로 들어선다. 마른 우물에 물이 들게 하며 세상에 난 추사의 고택이어서일까. 문지방을 넘어서는데 먹 냄새가 번져오는 듯한 착각이 인다. 지붕 아래 자리 잡은 제비집이 벼루이기라도 한 듯, 활공을 거듭하는 제비의 몸짓이 붓질이 되어 눈에 담긴다. ㄱ자 사랑채와 ㅁ자 안채가 포개져 묘한 공간감을 연출하는 고택을 둘러 사당 앞에 선다. 내려 감은 두 눈에 검은 물이 맺히는 듯한 감상을 물리고 되돌아 나와 선 곳에서 세한도를 본다. 유배 시절 제자이자 문우였던 이상적 선생에게 선물로 주었다는 작품이다. 사제의 마음이 깃들어 있기 때문일까, 대가의 손길을 기리는 열여섯 명사의 시와 제자들의 배관기(拜觀記)와 찬문(讚文) 때문일까. 나무도, 집도, 글귀도 모두 비어 있는데 차디차다는 세한도에서 충만과 따스함이 넘쳐흐른다. 



추사 김정희 고택추사 김정희 고택



백송에 담긴 시간의 흐름

  한복의 겹침을 닮은 처마의 닿음이 묘한 울림을 빚어내고 있는 고택에서 하늘을 올려다본다. 정수리 위에 파랗고 하얀 도화지가 놓여 있다. 눈동자를 먹 삼아 기념관에서 본 글귀를 찍어본다. 인천안목 길상여의(人天眼目 吉祥如意). 사람과 하늘이 살펴주어 뜻과 같이 잘 될지어다. 마른 대지 같은 마음에 필요했던 한 마디를 뱉어두고 숨을 고른다. 턱까지 차오른 숨이 비로소 바닥으로 내려진다. 


  꺾이고 겹쳐진 처마는 제비의 날갯짓일 터. 김정희 선생이 중국에서 가져와 심었다는 백송을 만나러 간다. 만리타국에서 귀한 백송을 받아왔다는 것은 그만큼 학식과 덕망이 높았다는 뜻이리라. 허연 자태를 뽐내기까지 긴긴 시간을 지나야 한다는 백송의 둥치에서 세월을 본다. 비워 채워진 구멍에 삭인 세월을 덧대며 김정희 선생의 증조모이자 조선 왕실 유일한 열녀인 화순옹주홍문을 둘러 나온다.


예술가의 숨결 어린 수덕사와 수덕여관

  수덕사로 방향을 잡는다. 열매 가득한 예산의 길목은 곳곳이 풍요롭다. 이제 막 모심기를 끝낸 땅에서 누런 들판을 보는 것은 서슴없이 먹거리를 내놓는 예산의 품에 어미의 젖줄 같은 넉넉함이 깃들어 있는 까닭이다. 수덕사 초입, 선(禪) 미술관에서 이응노 화백의 그림 몇 점으로 눈요기를 한 후 수덕여관으로 향한다. 수덕여관은 나혜석 화백과 승려 일엽, 이응노 화백의 이야기가 서려 있는 곳이다. 무엇하나 수월한 게 없는 게 인생이기는 하지만, 몰아치는 생에 쫓겨 방향도 모르고 무작정 내달렸던 예술가들의 사연 많은 이야기가 귓가를 지나간다. 초가지붕 위 이름 모를 잎을 지나는 바람이 서글프게 느껴지는 이유는 살아내는 일이 어쩌면 생각보다 무심한 것이기 때문일지도. 꾹 다문 입에 살아갈 날을 머금고 대웅전으로 향한다. 국보 49호 수덕사 대웅전은 건립 연대가 확실한 목조건축물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법당 안에는 보물로 지정된 삼존불상이 모셔져 있다. 건축 양식의 변곡점을 보여주기 때문일까. 단청을 하지 않아서일까. 대웅전에서 번져오는 소박한 세련미가 찰랑거리며 가슴을 두드리고 들어온다. 수덕 도령이 사랑하는 이를 위해 지은 절이 불타 없어지기를 반복하다가 불심을 찾으며 완성은 하였으나, 여인은 사라지고 버선 꽃만 있더라는 창건 설화가 깃든 관음보살상을 눈에 담고 절을 벗어나는 길, 길가에 놓인 오디가 선물이 되어 마른 입을 채워준다. 


윤봉길 의사의 희생을 기리다

  마지막 여정은 윤봉길 의사 기념관이다. 의사가 영면한 나이 스물다섯. 암담한 현실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앞날을 꿈꿨던 청춘이 아리고 쓰려 멈칫하고 섰다. 차마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굳어 있는 게 스물다섯 짧은 생에 보낼 수 있는 최선의 애도라는 사실에 속이 무너져 내린다. 걸음 마디마디에 도시락이 보이고 시계가 아른거리고 결박된 의사의 모습이 서린다. 선조들이 목숨을 다해 지켜낸 대한민국의 오늘에 너는 과연 당당할 수 있는가. 전시실을 나와 이른 충의사에서 무성(無聲)의 편지를 받는다. 곳곳에 숨겨둔 선물로 여행객을 두 팔 벌려 맞아주었던 어미의 땅 예산이 등을 다독이며 말한다. 지난날 희생이 무색해지지 않게 앞을 향해 달려야 할 때라고. 그들이 그러했듯 다음 세대를 위해 나아가야 할 때라고. 추사 고택을 지키고 있던 해시계와 윤봉길 의사와 김구 선생의 시계가 겹쳐진다. 모양은 다르나 내일이라는 같은 곳을 향해 가고 있는 두 시계를 가슴에 품는다. 



예산 용궁리 백송예산 용궁리 백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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