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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운전을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글  왕유정 명예기자


  아이가 태어나면 자동차를 소유하고 있지 않던 사람들도 차를 사려고 서두른다. 내가 운전면허를 취득한 것은 20대 중반이었고 취득하자마자 작은 트럭을 들이받는 바람에 그날로 나의 운전 경력은 끝이 났다. 그 후 나는 운동신경이 없고 두려움이 많아 운전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스스로 낙인을 찍었다. 그런데 아이란 참으로 위대한 존재라서 나의 필요가 그 두려움을 넘어서게 했다.

  내 아이는 2년 후에 초등학교에 들어가게 된다. 작년에 나는 대안초등학교, 혁신초등학교, 일반초등학교 등 초등학교만으로도 너무 많은 갈래 길이 있어서 이 힘든 세상에 아이의 첫발을 어디에 놓아주어야 할지 고민을 많이 했다.

  나의 학교계획은 단단했다. 아이가 태어나고부터 생각한 것은 다섯 살쯤 공동육아어린이집에 보내고 대안초등학교를 거쳐 대안중학교, 대안고등학교를 보내는 것이었다. 아이가 2살이 되었을 무렵 나는 집에서 제일 가까운 공동육아어린이집을 찾아보았고 미리 전화해서 알아보기까지 했다. 그러던 중 미세먼지의 위험성을 알게 되었다. 나는 개인적인 견해로 미세먼지 농도와 관계없이 바깥 활동을 우선시하는 공동육아어린이집을 포기했다. 2년 후 이 아이는 어떤 초등학교에 들어가게 될까. 아니 2년 동안 나는 어떤 고민을 하고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나의 선택은 옳은 일이 될까.

  거의 20년 만에 운전연수를 시작하고 3일째 되는 날 나는 운전이 매우 즐거운 것임을 알았다. 새롭게 무언가를 시작하는 것은 가슴 떨리는 일이다. 그러나 그 일에 대해 아직 미숙하고 하물며 그 일이 다른 이에게 해를 끼칠 수 있다면 무섭기도 하다. 그럼에도 나는 설렌다. 짧게는 6개월 혹은 1년 후의 나는 운전을 할 줄 아는 사람일 것이기 때문이다.


아이란 참으로 위대한 존재라서 나의 필요가 그 두려움을 넘어서게 했다.


  아이에게 세상은 어떤 의미일까. 이제 겨우 제 이름을 그리는 여섯 살 아이. 그 아이에게 한글은 앎의 기쁨을 느끼는 첫 관문일 것이다. 소방차 사진을 보고 ‘소방차’라고 말하고는 사진 아래에 적힌 글씨를 읽었다고 의기양양해 한다. 운전연수 강사님이 내게 말했다. 지인이 운전을 가르쳐 주면 자기가 경험한 것만 말해줄 수 있다고. 그리고 한번 말하면 알아들을 거라고 생각해서 매우 답답해한다고. 나도 내 아이에게 그런 지인일 것이다. 내가 아이에게 좋다고 생각해서 들이미는 것들이 모두 나의 경험과 짧은 지식에서 기인한 것이기 때문이다. 나를 세상의 전부인 줄 아는 아이는 “나는 초콜릿을 먹고 싶지만 먹으면 안 돼. 초등학교에 가면 먹을 수 있어.”라는 말을 너무 예쁘게 말해서 미안하기도 하고 정말 너무 예쁘기도 하다.

  나와 나를 감싸는 세계는 늘 변한다. 익숙해졌다 싶으면 이제 다른 것을 고민하고 선택할 때라며 내 등을 밀친다. 앞으로 닥칠 일을 미리 대비해서 떠밀리고 싶지 않은데도 매번 나는 밀쳐지고 밀린다. 지난해까지 나는 먹거리에서 내 아이의 건강과 앞으로의 식생활 습관을 위한 쇄국정책을 펼쳤다. 그런데 이제 외교가 필요한 시기가 된 것 같다. 어디까지 외교정책을 펼쳐서 무엇을 받아들이고 무엇을 얻을 것인지 결정해야 한다. 나는 우선 초콜릿을 1회 개방한 상태다.

  4일간의 운전연수가 끝나고 나는 혼자 길을 나섰다. 몇 번이고 이리저리 흔들리는 핸들과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깜빡이를 켰다 끄기를 반복하는 도로의 무법자가 되었다. 나는 또 망설인다. ‘모르겠다. 우선 몰아보자.’하며 달리는 것이 먼저인지, 지금 내가 하는 운전이 앞으로의 내 운전습관을 결정하는 일이 될 것이므로 지금부터 정석대로 하기 위해 노력할 것인지.

  하지만 어떤 것이 되었든 이미 시작한 운전을 그만두지는 않을 것이다. 20년을 두려워하며 나는 운전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편견에서 빠져나왔기 때문이다.

  난 지금 어쩌면 이상을 꿈꾸는 교육관에 갇혀 내 아이가 걸어갈 현실을 마주하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런 내 고민과 상관없이 아이는 자라고 있고 내 품을 벗어나 온갖 정보와 자극을 쏟아내는 세상과 마주하게 될 것이다. 이 속에서 나는 신호등을 켤 수는 있지만 어떤 방향으로 갈지는 아이의 선택이다.

  내 삶이기도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그 아이의 삶이다. 앞으로는 나의 고민을 아이와 함께 나누는 시도를 해야겠다. 너와 관련된 일을 함께 고민하고 좋은 길을 찾아가자고. 그러다 그 길이 막다른 골목이면 같이 손잡고 뒤로 돌아오면 된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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