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부
행복한 교육

학교상담 전문가가 전하는 우리 아이 심리


우울증에 걸린 아이

글_ 김서규 경기대 교육상담학과 겸임교수(전 유신고등학교 진로진학상담교사)


학업, 친구, 가족. 셋 중에서 하나라도 잘못되면
아이들은 우울증에 빠진다.
정신과에서 치료를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들이 학교에 왔을 때 도움을 주는 것도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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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고등학교 2학년 재진은 진로상담을 하러 상담실에 왔다. 담임선생님이 “너는 성적이 꼴찌에 가깝고 종일 엎드려 잠을 자는데, 이제부터라도 뭘 좀 해봐야 하지 않겠니?”라고 하신 덕분이다. 상담 선생님이 재진에게 먼저 차를 한 잔 마시라고 하자, 재진은 온수기 옆에서 종이컵을 뽑으려고 했다. 그런데 누가 보아도 매우 이상한 동작으로 허둥거리다가 그만 종이컵 보관함까지 잡아 뽑아버렸다. 재진은 당황하면서 바닥에 흩어진 컵들을 모으려 했지만 수습이 되지 않아 상담 선생님이 거들어 도움을 줬다. 그런데 이번에는 컵에 물을 붓다가 다시 물을 바닥에 엎지르기까지. 재진은 당황한 나머지 우두커니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진단  그제야 상담 선생님은 재진이가 이상하다는 걸 알아차리고 다중인성검사를 권했다. 또, 1학년 때 실시했던 정서·행동검사의 결과를 살펴봤더니 우울증 수치가 심각하게 높았다. 부모님께 알려 드렸더니 “우리 애는 우울증약을 먹었다 안 먹었다 한 지 5년 됐어요.”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이렇게 심각한데 왜 다들 몰랐을까? IQ 87인 학생이 공부를 못하는 학생들 틈에 있으면 눈에 띄지 않듯, 우울한 아이가 조용한 아이들 틈에 있으면 눈에 띄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늦게 발견할수록 학업도 망가지고 인성과 대인관계도 엉망이 된 뒤다.

지도  재진 어머니가 상담실에 오셔서 말씀했다. “얘는 새아빠와 사이가 나빠요. 그래서 단독주택을 사서 새아빠는 1층에, 얘는 2층에 살게 했어요. 새아빠와 마주치는 것도 싫어해서 뒷문을 통해서 2층으로 올라가는 전용 계단을 따로 만들었어요. 저도 일찍 나가고 늦게 들어오기 때문에 얘가 어떻게 된 건지 확인할 기회가 별로 없었어요.” “그런 사정이 있으신 줄 몰랐어요. 정말 수고가 많으셨어요. 재진이는 심리검사를 해보니까 우울증이 심하고 대인기피증도 있다고 나왔어요. 이걸 해결해주고 싶은데 좋은 방법이 없나 해서 오시라 했어요.”

  재진 어머니는 우울증에 대해서 별로 걱정하지 않으셨다. 나이가 더 들면 철이 들겠고, 공부를 못하면 재산을 물려줘서 먹고 살게 하면 되지 않겠느냐 하셨다. 상담 선생님이 우울증의 위험에 관해서 얘기해드리자 어머니는 그게 그렇게 무서운 병인 줄 몰랐다고 하시더니 이내 정신과에서 준 약을 규칙적으로 먹이겠다고 하셨다. 또, 아들과 자주 시간을 가지고 아들 앞에서 부부싸움을 하거나 고함지르는 것을 줄이겠다고 약속하셨다. 상담 선생님이 “저는 학교에서 매주 아드님과 상담을 하겠습니다. 담임선생님께도 잘 설명해 드려서 재진이가 좀 더 배려받도록 신경을 쓰겠습니다.”라고 하자 어머니는 고마워하면서 집으로 돌아가셨다.

  재진은 정신과 약을 먹으면서 상담을 받기 시작했다. 2주쯤 지나자 약효가 나면서 쓰디쓴 기분을 느끼게 만드는 우울감이 많이 누그러졌다. 담임선생님께서 교실 뒤의 벽 쪽으로 자리로 옮겨 주셔서 재진은 남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한결 편안하게 지낼 수 있었다. 상담시간에는 일주일 동안 있었던 일을 풀어내면서 힘겨움을 털어내는 시간을 가졌다. 여러 사람이 정성을 모아 돕는 시간이 흐르자, 재진은 어눌했던 말씨가 풀리고 경직된 자세가 이완되면서 활기가 생겼다. 어느 날 상담실에 오더니 “선생님, 모든 게 귀찮아서 매일 침대에 누워 지냈는데 문득 생각해 보니 이게 더 힘들어요. 편하려고 손도 까딱 안 했는데, 왜 이게 더 불편하죠? 힘들지 않으려면 일을 조금 해야겠어요.”라고 했다.

  우울증에서 서서히 벗어나는 연습을 하던 어느 날, 그는 핸드폰을 사려고 매장에 들어가 30분 동안 위축되지 않고 판매원과 얘기하고 나온 후 들떠서 상담실에 왔다. “선생님, 그날은 무섭지도 불안하지도 우울하지도 않았어요. 매장에서 나오는 길에 몇 년 만에 처음 고개를 들고 걸었어요. 길거리의 간판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오고 생생하게 읽히는 거예요. 자신감이 막 생겨요!”

  그 후 재진은 우울증에서 더 멀어졌다. 어머니와 새벽 운동을 다니면서 체력을 키우고, 저녁에는 어머니 음식점에서 일을 도왔다. 예전에는 부모님이 말다툼하면 ‘내게 왜 저런 부모님이 주어졌을까? 너무하다.’라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자꾸 운명을 탓하면 뭐하나? 그러느니 바꾸는 게 낫겠다.’라고 생각하면서 두 분을 말려 각자 방으로 들어가시게 했다.
3학년이 되어서 늦봄의 기운이 온 천지에 가득할 무렵, 재진이가 말했다. “전 공부를 못한다고 생각했는데, 요즘 생각하니 잘하고 못하고의 문제가 아니고 사람에겐 공부가 필요한 것 같아요. 명문대가 아니어도 상관없어요. 제가 원하는 학과면 돼요.” 빙고! 재진아, 긴 터널이 끝나고 드디어 출구가 보이는구나. 잘 가렴. 네가 가고 싶은 그곳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