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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의 쉼표를 더하다 ㅣ 강화도

글_ 양선구 명예기자   사진_ 김경수 사진작가

 

 

  여행이란 누군가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길을 만들어가는 것이라는 글을 읽은 적 있다. 잠시 바쁜 일상에서 벗어나 설레는 마음으로 찾아보니 역시 강화도이다. 강화는 내가 자주 떠나는 여행지이다. 스무 살이 되어 처음 자전거 여행을 떠난 곳도 강화였다. 아무래도 강화가 집에서 가깝고 다리만 건너면 쉽게 갈 수 있기 때문이랄까. 그러나 지금처럼 교통이 발달하기 이전의 강화는 천혜의 요새로 불렸다. 예성강, 임진강, 한강 등 3대 하천이 흘러들어 물살 흐름의 변화가 잦고 선박 운항이 힘든 지역이다. 또 조석간만의 차가 커서 넓게 펼쳐진 갯벌로 인해 상륙할 곳이 극히 한정되어 외세의 접근이 어려웠다고 한다.

 

세계 5대 갯벌, 동막해변
  강화로 가는 길은 매년 변하고 있다. 이미 커다란 단지를 이룬 인천 청라를 지나 검단과 김포로 들어서면 건물들이 줄지어 지어지고 있다. 높아지는 건물들을 보며 원래 바다이고 갯벌이었던 과거를 떠올린다. 여행이 일상에서 보지 못하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을 상기시켜 주는 것이라면 나는 까맣게 잊어버린 과거를 끌어 올려 새롭게 되새김질한다. 차가운 철 구조물로 만들어진 건물들 사이로 출렁거리던 파도 소리가 들려온다.
  처음 목적지는 동막해변이었다. 동막해변은 세계 5대 갯벌이라 불리는데 물이 빠지면 직선거리로 4km까지 갯벌이 펼쳐진다. 내가 도착했을 땐 물이 빠지고 매끄러운 갯벌이 그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갯벌에는 어린 남자아이와 여자아이 그리고 아빠로 보이는 남성이 열심히 무언가를 함께 만지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썰물에는 각종 조개를 비롯한 칠게, 가무락, 갯지렁이 등 다양한 바다 생물을 볼 수 있다고 하니 어린이들에게는 이것다 좋은 놀이터도 없는 셈이다. 한쪽에는 갈매기 떼들이 점점 사라져가는 자신들의 서식지에 대해 골똘히 생각하는 것처럼 먼 해안선을 바라보고 있다. 갈매기와 다르게 모래사장에 설치된 그늘 천막 아래에는 사들이 돗자리를 펴고 앉아 쉬고 있다. 그들처럼 잠에서 깨었을 때, 탁 트인 푸른 바다를 붉게 물들이는 저녁노을을 보고 싶었지만, 아쉬운 마음으로 다음 목적지인 전등사로 향해야 했다.

 

보물 제178호 전등사 대웅전. 작지만 단정한 결구에 정교한 조각 장식으로 꾸며져 조선중기 건축물로서는 으뜸으로 손꼽힌다.

등사에는 여느 사찰과는 달리 일주문이나 불이문이 없다. 그 대신 호국의 상징이었던 삼랑성 동문과 남문이 일주문 구실을 하고 있다. 전등사로 진입할 때 가장 먼저 보이는 동문


고구려 때 창건된 유서 깊은 사찰, 전등사
  전등사로 올라가는 길목은 울창한 나무와 숲으로 이뤄져 보기만 해도 마음이 트인다. 현재 전등사 입구는 정문인 동문과 남문으로 나뉘는데 우리는 정문인 동문으로 들어섰다. 입장료를 내고 들어서자 ‘큰 나무’라 이름을 지닌 커다란 나무가 반갑게 맞이한다.
  강화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사찰인 만큼 전등사를 둘러싼 나무들은 모두 크고 아름다웠다. 특히 대웅전 뒤로 높게 솟은 소나무들은 고고한 자태를 뽐내며 절을 포근하게 에워싸고 있었다. 


 

 그늘에 잠시 앉아 나무들을 바라봤다. 바람이 내 생각을 가지고 함께 날아갔는지 더위도 잊고 멍하니 잠시의 여유를 누린다. 그리고 내 삶을 되돌아본다. 아르바이트와 병행하는 대학공부, 경쟁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쌓아야 하는 스펙들이 사실은 내 미래를 위한 투자가 아니라 내 발목을 붙잡는 족쇄일지도 모른다. 진짜 행복은 미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사는 현재에서 찾는 것은 아닌지 생각하며 다시 사찰 주변을 걷기 시작했다.
  전등사에는 보물 제178호인 전등사 대웅전(大雄殿), 보물 제179호인 전등사 약사전(藥師殿), 보물 제393호인 전등사 범종(梵鐘)이 있다. 이 중에 대웅전에 대한 재미있는 전설이 있다. 대웅전의 네 모서리 기둥 위에는 쪼그리고 앉아 있는 벌거벗은 여인상을 볼 수 있다. 이는 공사를 맡았던 목수의 재물을 가로챈 주모의 모습이라고 한다. 목수는 주모를 사랑했고 자신의 재산을 주모에게 주며 사랑을 고백했는데 주모가 재산을 가지고 도망쳤다. 재물을 잃은 목수가 주모의 죄를 씻게 하려고 발가벗은 모습을 조각하여 추녀를 받치게 했다고 한다. 네 모서리 중 한 귀퉁이만 한 손으로 처마를 받치고 있는데 목수가 사랑을 잃고 상심에 빠져서 그런 건 아닐까.

약 400년 된 전등사 느티나무

 

강화해협을 지키던 요새, 덕진진
  마지막 목적지인 덕진진으로 향했다. 덕진진은 조선시대 강화해협을 지키던 요새이다. 1866년 병인양요 때는 양헌수의 군대가 덕진진을 거쳐 정족산성으로 들어가 프랑스 군대를 격파하였으며, 1871년 신미양요 때는 미국 함대와 가장 치열한 포격전을 벌인 곳이다. 그러나 초지진에 상륙한 미국군대에 의하여 점령당한 아픔이 서려있다. 그 후, 1976년에 성곽과 돈대를 고치고 남장포대도 고쳐 쌓았으며, 앞면 3칸·옆면 2칸의 누각도 다시 세웠다. 그 당시 대포가 복원된 1971년에는 사적 제226호로 지정된 바 있다.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곳이지만 지금의 덕진진은 평화로웠다. 멀리 강화 초지대교가 보였고 한눈에 바다가 들어왔다. 고요하게 부는 바람, 덥지만 않다면 산책하기 정말 좋은 곳이다.
  강화도는 지친 일상에서 쉼이 필요할 때 차로 쉽게 오갈 수 있는 섬이다. 매일 본다고 잘 아는 것이 아니듯 가깝고 늘 똑같아 보이는 여행과 일상에도 항상 새로움이 있다. 익숙한 삶을 새롭게 느끼고 싶다면 일단 강화도로 떠나보자. 

신미양요 당시 가장 격렬했던 격전지 덕진진 광성보

덕진진 남장포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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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문화콘텐츠닷컴(문화원형백과 한민족 전투), 한국콘텐츠진흥원,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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