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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이라는 이름, 그 무게에 대해①


나의 교직생활은 한마디로 ‘고3 담임’
“교직의 꽃은 담임입니다”

“선생님은 고3 담임을 몇 년 동안 하셨어요?”
“고3 담임만 13년 했어요.”

  한 해도 거르지 않고 13년 동안 고3 담임을 했다고 하면 많은 동료들의 반응은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물어본다. 나의 교직생활을 하나의 단어로 말하자면 고3 담임이다. 초임부터 고3을 가르치고 교과가 주로 고3에 배정되다 보니 생긴 자연스러운 경력이라고 할 수도 있고 또, 자의반 타의반에 의해 생긴 전문성을 기르기 위한 경로였다고도 할 수 있다. 나름 어렵고 힘든 점이 있는 업무지만 그만큼 보람도 큰 자리라 생각했기에 항상 기꺼이 받아들였던 것 같다.



교직에 만연한 담임 기피 현상

  작년에 이어 올해도 교내 인사자문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새해 업무 희망원을 받아 최대한 개인이 희망을 반영하여 업무 배정을 해야 했다. 그러나 역시 가장 큰 문제는 담임 희망 인원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담임을 희망한 선생님의 수는 총 11명이었다. 올해 우리 학교 필요 담임교사는 40명이다.

  담임 ‘불희망’을 하신 분들도 결국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담임을 맡아야 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모를 리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희망’을 하는 이유는 그래도 일단은 피할 수 있다면 피하고 싶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이라 짐작이 된다.

  신규 임용이 되면 선배 선생님들에게 듣게 되는 여러 교직생활에 대한 격언 같은 말이 있다. ‘교직의 꽃은 담임이다.’ 그런데 왜 이런 기피 현상은 더욱 심해지는 것일까. 개인사정으로 또는 삶의 주기에 맞추어 담임을 맡기에 어려운 때가 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설명하기 힘든 교직에 만연한 담임 기피의 원인은 무엇이고, 그 근본 원인을 제도나 시스템의 문제로만 볼 수 있을까.

  동료교사들에게 ‘담임을 왜 하기 싫어할까?’라고 질문했더니 ‘난 업무부서보다는 차라리 담임이 좋아’라는 선생님들도 있었지만 대부분 ‘당연한 거 아냐’라는 반응이었다. 그 당연함에는 ‘어린 아이 육아와 병행하기 힘들어’, ‘학생들의 학교생활에 있어 1차적 책임을 모두 담임이 지어야 한다는 부담감이 너무 무거워’, ‘학부모와의 관계가 힘들어’, ‘아이들과의 관계형성과 감정교류가 힘들어’, ‘교권보호는 너무 부족한 상태에서 학생인권만 지나치게 보호되는 것 같아서 무기력감이 느껴질 때가 많아’ 등이 주된 이유였다. 여성, 엄마이기에 겪는 일과 육아의 어려움을 제외하고 나머지 담임 기피 이유는 ‘학생에 대한 무한한 책임’을 요구받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다.

‘선생님, 많이 상처받으셨군요. 그런데 교직을 정말 그만하실 것이 아니라면 그 상처를 가장 잘 치유하는 방법은 아마도 결국 다시 아이들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나를 향해 따뜻한 시선을 준 아이들

  우리 사회에서 교사는 하나의 단순한 직업군에게 요구되는 직업윤리 이상의 윤리의식을 요구받는다. 유교문화의 역사적 배경이 그러하고 우리 사회의 지배적인 가치관이 그것을 지지하고 있기에 오랜 시간 그것을 무겁지만 빛나는 훈장처럼 생각하며 살아온 선배 선생님들이 많다. 그러한 숭고한 교사의 사회적 역할수행은 ‘담임교사’라는 이름으로 제도화되었고 지금까지 그 깊은 뿌리가 교육문화 속에 자리 잡게 된 것이다. 세상이 변했고 아이들은 더 빨리 변했으며 그리고 선생님들도 새로운 세대로 교체되었고 심지어 교육과정이 다양화되어 교과교실제가 확대되어가는 세상이 되었음에도 아직도 이 담임제도를 포기하지 않는 것은 교사가 그러한 사회적 역할을 수행하기 바라는 사회의 요구가 아닌가 생각된다.

  매일매일 정글 같은 학교현장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왜 늘 의무만을 요구하고 그에 상응하는 보상은 없냐고, 우리에게 그 많은 책임을 지우면서 우리를 위한 보호막은 하나도 없냐고 그래서 지금의 시스템 안에서는 담임을 기피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는 선생님들에게 감히 위로의 말씀을 한마디 건네본다.

  ‘선생님, 많이 상처받으셨군요. 그런데 교직을 정말 그만하실 것이 아니라면 그 상처를 가장 잘 치유하는 방법은 아마도 결국 다시 아이들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3과목을 가르치고 38명의 학급 아이들의 학습장에 매일 멘토링 글귀를 써주며 주말에도 출근해서 자습을 지도를 하던 때가 있었다. 지금은 할 수 없을 것 같은 그런 학교생활이 가능했던 것은 그때는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신출내기였기 때문일 것이다. 나 역시 그 이후 여러 아이들과의 관계에서 마음을 다치고 실망하고 낙담하기를 반복했지만 한 해에 적어도 나를 향해 따뜻한 시선을 준 아이들이 그렇지 않은 아이들보다 많았던 것 같다. 지금도 우리 반에 나를 힘들게 하는 아이들 때문에 나를 위로하는 따뜻한 시선의 아이들과 또한 나의 도움을 더욱 절실히 바라는 아이들을 보지 못하고 있지는 않은가 생각해본다. 결국 ‘어떤 아이를 볼 것이냐가 아니라 아이의 어떤 면을 볼 것이냐’로 관점을 이동해 보면 조금은 쉬워지지 않을까.

  교직에 있는 한 우리는 담임을 피하기 어렵다.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선생님만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그러하다.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는 아름다운 제자 면면을 떠올리며 우리 내년 업무희망원에는 기꺼이 담임 희망에 체크 표시를 해보자. 선생님들~ 우리 같이 담임해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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