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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여행자의 낙안읍성 느린 여행

글 · 사진 _ 김혜영 여행작가


  ‘순천 낙안읍성 버킷리스트’를 만들었다. 관람객이 모두 빠져나간 초저녁에 골목 산책을 하고, 할머니가 사는 민박집에서 잠을 자고, 성곽 위에서 일출을 보고, 낙안팔진미가 차려진 아침 밥상을 받는 것이다. 같은 여행지일지라도 어떻게 즐기느냐에 따라 추억이 다르게 적힌다. 그저 그런 여행이 될지, 잊지 못한 추억이 될지는 계획하기 나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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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는 날이 웃장 오일장 날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순천에 온 날 ‘웃장(5·10)’이 섰다. 웃장은 순천 구도심 북쪽에 있는 장으로, 1920년대에 조성된 역사 깊은 전통시장이다. 웃장 남쪽에는 ‘아랫장(2·7)’이 선다. 오일장 날에는 장터 옆 골목과 인도에까지 좌판이 들어선다. 인도 좌우에 좌판이 늘어서 통행이 불편할 만도 한데, 오가는 사람들의 얼굴빛이 환하다. 


  오일장에 가면 제철 과일·나물·채소·생선 등의 식자재와 지역 특산물을 살펴보는 재미가 있다. 좌판에 앉은 할머니 상인들은 새벽부터 농사지은 잡곡과 밭에서 캔 고구마·상추·파·쑥·냉이 등을 장터에 이고 지고 와 판다. 채소와 나물값이 캐고 다듬는 품삯도 안 나올 만큼 싸다. 


  웃장에서 가장 소문난 것은 전국 제일 규모를 자랑하는 국밥 거리다. 웃장 국밥의 특징은 돼지 머리 고기와 콩나물을 듬뿍 넣고 맑게 끓이는 것. 2인분 이상 주문하면 수육과 선지 순대도 덤으로 준다. 푸짐한 인심에 배도 든든하고, 마음도 부르다.


낙안읍성 안에 초가 90여 채가 옹기종기  모여 있다.낙안읍성 안에 초가 90여 채가 옹기종기 모여 있다.

순천 웃장은 매월 끝자리 5일과 10일에  열리는 역사 깊은 오일장이다.순천 웃장은 매월 끝자리 5일과 10일에 열리는 역사 깊은 오일장이다.





유채꽃이 만발한 낙안읍성의 4월 풍경유채꽃이 만발한 낙안읍성의 4월 풍경


마을 전체가 사적지인 낙안읍성민속마을

  낙안읍성민속마을은 마을 전체가 사적지로 지정됐을 만큼 조선 시대 읍성의 형태가 잘 보존돼 있다. 읍성 안 90여 채의 초가집에는 실제로 주민이 산다. 마을에 들어서면 쪽진 할머니가 마중 나와 반겨줄 것 같은 분위기다. 


  이 마을에서는 문화재로 지정된 성곽 1,410m와 중요민속자료 가옥 9동, 노거수 15그루, 객사, 임경업장군비 등을 눈여겨보며 관람하는 것이 포인트다. 삽살개 석상 두 기가 지키고 있는 낙풍루를 통과하자, 너른 길이 시원하게 뻗어 있다. 길 오른편에는 수령이 공무를 보던 동헌, 중앙 관리가 출장 와서 묵었던 객사, 낙안면의 역사와 풍습을 소개하는 낙민관자료전시관 등이 자리했다. 길 왼편에는 민가가 올망졸망 둥지를 틀었다.


  객사 홍살문 앞 비각은 1628년(인조 6년)에 세운 임경업장군비를 보호한다. 이 마을에 임경업 장군(1594~1646)이 낙안읍성을 하룻밤 만에 쌓았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사실은 1626년 낙안군수로 부임한 임경업 장군이 토성이었던 낙안읍성을 석성으로 고쳐 지은 것이다. 임경업 장군이 병자호란과 정묘호란 때도 공을 세우는 등 선정을 베풀었기에 백성 사이에서 그런 전설이 만들어졌으리라 짐작해본다.


  낙안읍성에서 경치가 가장 좋은 곳은 서문과 남문 사이의 성곽 구간이다. 서문 왼쪽 계단을 통해 성곽에 올라 남문 쪽으로 향한다. 하늘 높이 자란 대숲을 감상하며 걷다가, 모퉁이를 돌면 가슴 뛸 만큼 놀라운 풍경이 펼쳐진다. 장방형의 성곽이 초가집들을 아늑하게 품고 있다. ‘낙안’(樂安)이라는 마을 이름이 땅과 백성이 두루 평안하다는 ‘낙토민안’(樂土民安)에서 비롯된 이유를 알 것 같다. 


낙안읍성민속마을의 초가 민박집. 읍성  안에 민박집이 많고 시설이 깔끔하다.낙안읍성민속마을의 초가 민박집. 읍성 안에 민박집이 많고 시설이 깔끔하다.



낙민관자료전시관에 전시된 낙안면의 옛  생활용품들.낙민관자료전시관에 전시된 낙안면의 옛 생활용품들.



낙안읍성에서는 누구나 시간 여행자

  성곽 위에서 마을이 손금 보듯 훤히 보인다. 돌담을 끼고 이어지는 고샅길이 꼬불꼬불 마을 안으로 흘러 들어간다. 초가 처마 아래에는 농기구와 메주가 주렁주렁 달려 있다. 볕이 좋은 담장 아래에는 장독대가, 아궁이에는 가마솥이 걸렸다. 반쯤 열린 사립문 사이로 강아지들이 꼬리를 흔들며 컹컹 짖어댄다. 초가집 사이로 수령 100년 이상 된 노거수들이 마을 수호신처럼 늠름하게 서 있는 모습도 인상적이다.


  낙안읍성의 참모습은 관람 시간이 끝난 이후에야 드러난다. 초가 민박집에 하룻밤 묵으며 초저녁부터 이른 아침까지의 마을 분위기를 느껴본다. 초저녁이 되면 창호 밖으로 노란 불빛이 새어 나오고, 초가지붕 굴뚝 위로 밥 짓는 연기가 하얗게 피어오른다. 이웃집 소리꾼의 노랫가락이 잦아들면 잠자리에 들 시간이다. 동틀 무렵이면 수탉이 요란하게 모닝콜을 한다. 이 마을에서는 시계를 보며 서두를 일이 없다.


  이른 아침, 안개가 자욱하게 깔린 고샅길을 산책하고 돌아오면, 식당들이 문을 열기 시작한다. 가마솥에서 풍기는 구수한 밥 냄새에 식욕이 돋는다. 낙안읍성에는 무·미나리·석이버섯·녹두묵·천어 매운탕·더덕·고사리·도라지 등의 여덟 가지 식자재로 만든 ‘낙안팔진미’를 맛볼 수 있다. 푸짐하게 차려진 밥상 위로 수저가 날아다닌다.


  낙안읍성과 이웃한 ‘뿌리깊은나무박물관’도 들러볼 만하다. 이곳에서 순 한글 잡지 ‘뿌리깊은나무’를 창간한 한창기(1936~1997)가 남긴 유물 6,500여 점을 볼 수 있다. 우리 토박이 문화에 관심이 많았던 한창기는 청동기 시대부터 광복 이후까지의 손때가 묻은 생활용품을 살뜰히 수집해두었다. 삼국시대 토기와 불교 용구, 한글과 한문이 섞여 쓰인 ‘정순왕후국장반차도’ 등은 박물관 중요 유물로 손꼽힌다. 



낙안읍성 민박 예약 : 낙안읍성 누리집(www.suncheon.go.kr/nagan/)에 민박집 정보 공개. 민박집에 전화로 직접 예약. 2인 기준 5만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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