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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에서 시간 여행을 하다

글 _ 강지영 객원기자


  낮게 깔린 구름 때문일까. 차가운 바람 때문일까. 겨울을 불러들여 두고 이별을 고한 2021년을 배웅한 후 고요히 2022년을 맞는다. 붉게 타오르는 태양을 앞두고 한 해의 평온을 기원해 본다. 길게 이어져 온 혼란과 침묵의 시간이 걷히기를 염원하며 2022년의 새날을 맞아들인다. 새해의 첫 달은 하루의 새벽과 같을 터. 긴 길을 가기 위해서는 천천히 호흡을 골라 마음을 정비해 둘 필요가 있다. 2022년의 시작을 강과 섬, 바다로 둘러싸인 도시 군산에서 시작한다. 새벽 공기를 벗 삼아 홀로 걸으며 혼자만의 사색을 즐길 수 있는 도시, 군산을 찾아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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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강, 만경강, 새만금, 서해로 이어지는 군산은 물이 빛이 되어 찰랑거리는 곳이다. 초록빛 물결이 잔잔하고 고요하게 도시를 감아 돈다. 파고마저 잠잠해져 있는 고요한 도시 군산. 군산의 시간은 옆에서 옆으로 이어진다. 군산에는 위에서 아래로 흘러 지난날을 무색하게 만드는 군림의 시간이 아닌, 어제라는 그림자를 발아래 두고 오늘이라는 태양을 마주 보게 하는 공존의 시간이 깃들어 있다. 


  오밀조밀 놓여 있는 건물 때문일까. 건물 사이를 관통하는 아스팔트 도로가 물결이 되어 눈에 들어온다. 도로를 따라 느릿느릿 달린다. 부산하지 않은 거리가 적당히 데워진 겨울 온기로 여객의 차가운 손을 매만져준다. 자전거를 타고 여유롭게 길을 가는 이들과 엄마의 손을 잡고 걷는 아이들, 보행기를 끌고 가는 어른들은 군산을 여백의 깊이를 담고 있는 한 점의 그림으로 빚어내고 있다. 




군산항쟁관군산항쟁관

철길을 따라 거쳐온 시간

  대로변을 따라 놓인 옛 철길을 찾아 들어간다. 경암동 철길 마을로 유명한 이곳은 1944년 일제강점기 때 신문용지 재료 운송을 위해 만들어진 데서부터 유래를 찾을 수 있다. 이후 주민들이 철길을 중심으로 하나둘 모여들면서 주변이 마을을 이루게 된다. 철로를 가운데 두고 길게 이어진 판자촌은 집집이 하나의 객차가 되어 저마다의 굴곡진 시간을 철길에 실어 보냈다. 2008년을 끝으로 기차가 달리지 않게 된 녹슨 철길은 이후 알록달록한 색으로 단장을 하였다. 오랜 철로는 과거로 가는 타임머신이 되어 태어났다. 기차 소리를 이불 삼아 잠자리에 들 수밖에 없었던 우리네 서글픈 삶이 오늘의 고단함을 덜어주는 명주 이불이 된 것이다. 


  무지개색으로 채색된 철로와 철로를 채운 자갈과 선로를 따라 이어지는 아기자기한 가게들. 추억의 먹거리와 장난감을 눈에 담으며 천천히 길을 걷는다. 바다가 땅이 되고 땅에 철길이 놓이고 그 위로 기차가 달리고. 바람이 철길이 거쳐온 시간을 눈앞에 데려다 놓는다. 나란히 이어지는 시간 사이에서 그 시절 교복을 입고 가방을 들고 철길을 거닐어 본다. 나의 어미와 어미의 어미가 지나온 시간이 등을 다독인다. 더 멋진 내일이 나를 기다리고 있으니 지난날을 가슴에 머금되 고개는 앞을 향해 있어야 한다는 속삭임을 듣는다. 닿을 수 없는 먼먼 옛 시절이 희망찬 내일의 기적을 울린다. 기차 소리가 물결이 되어 넘실거린다. 



군산근대미술관군산근대미술관


군산근대미술관군산근대미술관



근대 건축물을 따라 걷는 여정

  기찻길이 전해 온 시간의 터널을 지나 본격적인 시간 여행을 떠난다. 시간 여행에서 길을 잃지 않기 위해 오늘이라는 나침반을 가슴에 넣는다. 그렇게 이른 첫 목적지는 호남관세박물관이다. 대한제국으로 그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호남관세박물관은 현재는 본관 건물만 남아 있다. 관복, 관인, 관세 물품 등으로 채워진 관세박물관은 서양식 건축 양식을 보여주는 몇 안 되는 건축물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국경을 넘나들었던 물품들이 시간의 유물이 되어 박물관을 지키고 있다. 박물관을 채운 전시품을 보며 우리가 지나고 있는 이 시련의 날들이 찬란한 유물이 되어 남을 먼 훗날을 그려본다. 


  나지막한 2층 건물인 장미갤러리를 거쳐 근대미술관으로 간다. 일본 제18은행이었던 이 미술관은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것으로 미곡 반출과 토지 강매를 위한 곳이었다. 숫자 18은 은행 설립인가 순서를 의미한다. 이후 광복과 함께 대한통운에서 이곳을 사용하다가 2008년 등록문화재가 되면서 근대미술관이라는 이름을 달게 되었다. 하얀 벽을 둘러 놓인 그림 사이를 걷는다. 드문드문 놓인 작품에서 왠지 모를 깊이를 느낀다. 군산이라는 도시가 머금고 있는 시간의 여백이 그만큼 깊고 눅진하기 때문이리라. 


  근대 건축 모형물로 채워진 근대건축관을 지나 마지막으로 이른 곳은 군산항쟁관이다. 이곳은 3.1 독립만세운동 이후 한강 이남에서는 최초로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난 곳이 군산임을 기념하기 위해 만든 곳이다. 군산항쟁관은 100년의 역사를 머금고 있는 건물을 리모델링 하여 독립을 향한 열의를 담아내고 있다. 김구, 안중근, 윤봉길…. 이름만으로도 가슴을 울컥하게 하는 많은 이들의 사진이 항쟁이라는 이름 아래 한곳에 모여 있다. 고문을 당하면서도 독립을 외치며 죽음을 향해 가야 했던 아픈 시간이 나를 지나간다. 


  정수리 위로 겨울 같지 않은 따사로운 햇살이 쏟아져 내린다. 이마를 어루만지는 햇살에서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타오르는 모닥불의 온기를 느낀다. 군산이 가져다준 시간 여행이 지열을 피워올리며 천천히 호흡을 고르는 법을 일러준다. 이 순간의 내가 순식간에 뚝딱 만들어진 것은 아닐 터. 기적(汽笛)이 강이 되어 흐르는 군산에서 지난날을 품으며 먼 앞날을 내다보고 가는 삶의 지혜를 배운다. 


 호남관세박물관 호남관세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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