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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와 용의 기운이 감도는 도시, 울산

글 강지영 객원기자

햇살이 눈처럼 흩날린다. 사방 밝은데 앞이 보이지 않음은 세상이 너무 눈부시기 때문일 것이다. 

시간이 굳어버린 것 같았는데. 봄은 세사(世事)를 앞질러 가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 앞을 지키고 있었던 모양이다. 

이른 봄바람에 회색이 일상을 물들인 날들을 날려 보낸다. 

운동화 끈을 조여 맨다. 마스크를 쓰고 봄기운이 넘실거리는 도로를 달린다. 

2021년의 첫 만남은 울산이다. 학 두 마리가 금으로 만든 기물을 가지고 노니는 터전이라는 뜻의 ‘학성(鶴城)’이라는 이름을 가진 도시, 울산으로 간다.



장생포 고래문화마을장생포 고래문화마을



  학의 날갯짓이 하늘을 잠재우기라도 한 것일까. 구름 한 점 없는 도시의 하늘은 창연하기 그지없다. 강 같은 도로를 가로질러 대왕암 공원으로 간다. 대왕암 공원은 사후 호국룡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던 문무왕의 무덤인, 경주의 대왕암 전설과 닿아 있는 곳이다. 애국정신이 투철했던 문무왕은 외세의 침입을 우려하여 자신이 죽으면 바다에 능을 만들어 달라는 유언을 남긴다.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는 의지였다. 실제로 경주 바다에는 문무왕릉인 대왕암이 있다. 문무왕의 호국(護國) 의지는 신문왕의 감은사로 이어진다. 신문왕이 감은사를 지어 금당에 구멍을 내고 해룡이 된 문무왕이 그곳을 드나들 수 있도록 했다는 이야기가 <삼국유사>로 전해져 내려온다. 


  문무왕 정신과 이어져 있는 또 다른 사연이 울산 대왕암 공원에 있다. 대왕암 공원은 신문왕의 어머니이자 문무왕의 왕비였던 자눌왕후가 숨을 거둔 이후, 남편을 따라 호국룡이 되어 바다를 지키고 있다는 이야기를 머금은 곳이다. 


  죽어서도 나라를 굳건히 하고자 한 정신을 기리며 솔숲으로 들어선다. 바다 내음이 코를 타고 들어오는데 물은 보이지 않는다. 숲은 바다를 가려놓은 까닭이다. 녹음 짙은 솔(松)의 물결을 벗 삼아 파도 소리를 따라간다. 굽은 나무가 선산을 지킨다고 하였던가. 웅크리고 있던 우리네 시간이 역사라는 선산을 지탱하고 있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하는 사이 발은 어느새 바다 앞에 있다. 


  대왕교 앞. 바람의 손길이 물의 이야기를 전해온다. 물거품이 인 기암괴석 사이를 지나온다. 바위에 남겨지고 있는 하얀 거품은 용의 비늘인 걸까. 일렁이는 파도가 승천하는 용이 되어 눈에 담긴다. 눈을 뜨고 있는데 감고 있는 것 같다. 시린 날들을 지나와 만난 봄의 온기가 금이 간 가슴을 어루만졌기 때문이리라. 눈물로 보낸 우리네 일 년이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고자 한 왕과 왕비의 마음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리라. 


울산대교 전망대에서 담아보는 도시

  가지를 뻗어 올린 해송의 잎은 용의 뿔일지도 모른다. 솔잎 하나를 주워들고 울산대교 전망대로 향한다. 2015년 문을 연 전망대는 화정산 정상에 자리 잡고 있다. 유리 벽으로 둘러싸인 전망대에 올라서니 울산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멀리 보이는 산과 발아래의 바다와 그 위를 수놓은 대교와 산업단지. 자동차와 조선 해양의 선봉에서 시대의 방향타를 돌려온 뜨거운 도시의 숨결이 밀려든다. 고려의 신분 해방에서 빼놓을 수 없는 효심의 봉기, 삼포왜란을 거쳐온 울산의 역사는 1962년 특정공업지구로 지정되면서 변환점을 맞게 된다. 현대자동차 설립 이듬해인 1968년, 울산에 현대자동차 공장이 건설되고, 이후 울산은 한국 최대 규모의 자동차 생산지로 자리매김하며 한국의 경제를 뒷받침해 온다.


  망원경으로 바다를 오가는 배와 그 배를 채운 차와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을 넘어다본다. 첨단 과학기술이 세상을 지배하고 산업이 새로운 옷을 갈아입는 시대라고는 하지만 망치를 들고 용접기를 돌리는 저들의 노고가 없었다면 오늘의 대한민국은 없었으리라. 



대왕암 공원대왕암 공원



고래 시대로 들어가다

  바다에 아른거리는 것을 따라 전망대를 나온다. 고래다. 울산대교 너머에 고래가 있다. 선사시대에 그 뿌리를 둔 울산의 고래잡이는, 1970년대 전성기를 맞았다가 1986년 고래잡이가 금지되면서 관광자원으로 그 맥을 이어가고 있다. 울산시는 실물 고래골격과 포경유물을 전시하고 있는 고래박물관과 돌고래 수족관이 있는 고래생태체험관, 고래문화마을 등을 마련하여 그 시절 향수를 공유하고 있다. 대교를 거쳐 고래 시대로 들어가 배를 통해 나오며 고래를 닮은 선박들을 생각한다. 포물선을 그리며 떨어지는 고래의 등에서 우리네 아비의 굽은 등을 본다. 현역에서 물러나 아이들의 등을 다독이는 두껍고 거친 손에 담긴 이야기를 상상한다. 그 위에 코로나라는 광풍을 온몸으로 막아 온 어미들과 아비들의 모습을 덧대본다. 우리네 부모의 땀이 그러했듯 우리의 이 막연한 견딤이 먼 훗날의 누군가를 위한 터전으로 다져지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태화루로 간다. 신라의 태화사까지 올라가야 그 기원을 찾아볼 수 있는 태화루는 태화교 너머에 자리 잡고 있다. 임진왜란에 잃었다가 2015년 새롭게 준공된 태화루는 그 위치만으로도 도곡 이의현의 표현처럼 ‘아름답게 꾸미지 않아도 무방한’ 자태를 자랑한다. 강바람을 타고 온 도시의 기운이 누각을 매만진다. 알록달록한 단청으로 단장한 누각은 그 온기를 안아 다시금 강에 실려 보낸다. 여객(旅客)은 멀리 태화교를 넘어다보며 강을 건너온 바람으로 마른 목을 적신다. 



장생포 고래박물관장생포 고래박물관



태화루태화루



바위가 들려주는 그림 이야기

  마지막 종착지는 암각화 박물관이다. 암각화는 선사시대의 바위 그림 중 새겨진 그림을 이른다. 주민들 사이에 익히 알려져 있던 암각화는 그 가치를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가 불교 유적을 찾아온 조사단 눈에 들면서 학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고래, 사슴, 호랑이, 거북이 등 이십삼 종, 백육십구 점에 이르는 동물상과 삼십 점의 인물상이 새겨진 반구대암각화는 선사시대인들의 사고와 생활상을 추적해 볼 수 있는 한국 최초 회화다. 동굴 같은 암각화 박물관에 마련된 고래 사냥 그림 위로 일렁이는 파도를 본다. 바위에 새겨진 최고(最古) 고래 사냥 그림이라는 명목으로 세계적인 문화유산으로 평가받고 있는 암각화. 바위가 들려주는 그림 이야기에서 소리 없는 파문을 읽는다. 눈물과 땀으로 버텨온 지난 한 해가 어쩌면 문화유산 그 자체다, 거리를 유지하며 공포와 고독을 감내해 나오는 사이 우리 모두는 찬란한 유산이 되어가고 있었다는.



암각화 박물관암각화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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