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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 쌤과 산골 학교 아이들의 좌충우돌 한 해 살이

말하는 대로 펼치기

글_ 탁동철 강원 조산초등학교 교사


한 사람의 말이 노래가 되고 춤이 되고
집과 길과 마을이 되는 곳.



  신문지 둘둘 말아 가늘고 긴 막대기 만들었다. 만든 막대로 무얼 할까. 아이들이 아무렇게나 말했다.

  “칼싸움!”
  “독화살!”
  “창던지기.”
  “인중에 대고 오래 버티기.”
  “피 빨기.”
  “손바닥에 올리고 중심 잡기.”
  “리듬 치기.”
  “카누 타기.”

  아이들이 말한 모든 것을 하게 했다. 눈 가리고 마주 서서 칼싸움을 했고, 밀림에서 짐승 사냥하는 것처럼 훅 불어서 독화살 쏘았다. 빙 둘러 앉아서 퉁탁탁탁 타닥닥닥 투닥다닥 닥닥다닥툭 리듬을 만들어 쳤다. 인중에 대고 버티기는 입술을 앞으로 위로 내밀고 코는 아래로 내리고 그 사이에 막대를 끼웠는데, 서로 마주 보고 버티다가 웃음이 터져서 떨어뜨렸다. ‘피 빨기’는 난감했다. 말을 꺼낸 아이가 그건 장난으로 한 말이니까 안 해도 된다고 했지만, 이미 입에서 말이 나와 버렸으니 어쩌나. 그 말을 꺼낸 사람이 윤서니까 윤서 피라도 빠는 수밖에. 아이들이 고도비만 윤서를 바닥에 눕혀놓고 종이 막대로 빠는 시늉을 했다. 쭙쭙 소리가 날 때마다 윤서 몸이 줄어들었다.

  “칼싸움, 투호, 독화살, 카누 타기, 빨대, 리듬 치기가 한꺼번에 나오는 이야기가 있을까?”

  내가 묻자 아이들이 한 마디씩 보탰다. 이야기 제목은 「캐리비안의 해적」이다. 우리는 막대기 하나씩 들고 「캐리비안의 해적」 놀이를 했다. 보물 찾으러 간다고 영차영차 노를 젓는다. 배 위에서 축제가 벌어지자 리듬에 맞추어 춤을 추고, 손바닥에 올려세워서 중심 잡고, 인중에 대고 오래 버티다가 드디어 보물섬을 발견한다. 그런데 섬에서 다른 도둑들을 만나 칼싸움을 벌인다.

  막대 하나면 안 되는 것이 없다. 이번에는 ‘술병’이다. 술병 하나면 안 되는 게 없지. 술병에 바람을 불어 넣을까, 꽃 한 송이를 꽂을까, 술병을 세워놓고 볼링공을 던질까, 술이 조종해서 벌어지는 술꾼들의 세계를 보여줄까. 아냐, 술병은 아무래도 문제가 생길 수 있다. 학교에서 공부 안 가르치고 술을 가르친다고 항의 신고가 들어올지도 모른다. 술병 대신 ‘시’로 하자. 시 한 편이면 안 되는 게 없지. 시 읽는다고 신고할 학부모는 없을 테니 말이다.

  아이들이 교실 책꽂이에서 시집을 꺼내 펼쳤다. 고른 시로 무엇을 할까. 리듬 치기를 할까, 독화살을 날릴까, 술을 빨아들일까, 꽃을 꽂을까. 금방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궁리하는 동안, 손에 든 시집이 자꾸 바뀌고 시가 바뀌고 책장에는 침이 묻고 때가 묻는다. 그러는 동안 더러는 시와 친해지는 아이도 있을 것이다.

  윤서가 고른 시는 정연철의 「우산 사용법」이다.

  두 개보다는 / 한 개
  큰 것보다는 / 작은 것 //
  우산 속에서 팔짱 낀 두 사람 / 어깨동무한 두 사람
  더 따뜻해 / 더 정다워

  “떨어진 것보다는 붙어있는 게 아름답잖아요. 그러니까 신문지 막대를 서로 붙여서 아름다움을 표현해요.”

  말하는 대로 다 이루어진다. 막대기와 막대기를 서로 이어서 따뜻하고 정다운 것을 표현하기로 했다. 무엇이 따뜻하고 정다울까? 한 사람씩 이야기했다.

  “같이 우산 쓰고 가는 두 사람!”

  두 학생이 막대기 우산을 쓰고 걸었고, 그러는 동안 다른 아이들은 자기 몸과 신문지 막대기를 서로 이어서 빗줄기와 바람과 지나가는 자동차를 만들었다.


  “햇볕 쬐는 고양이!”

  고양이 두 마리가 서로 기대고 누워 햇볕을 쬘 때, 아이들이 지붕과 마당을 만들고, 뻗어 나오는 빛을 표현했다. 한마음으로 모이니까 따뜻하고 정답고 아름다운 것 맞다. 말하는 대로 다 펼쳐진다.

  영한이는 송진권의 「아무것도 하기 싫을 때」를 읽었고, 연극을 하자고 했다.

  아무것도 하기 싫을 때는 / 아무것도 하지 말아요 //
  티브이도 켜지 말고 / 게임도 하지 말고 / 무엇도 되지 말아요//
  나는 나도 아니고 / 누구도 아니에요//
  어떤 생각도 내 속엔 없어요 / 이런 글도 쓰지 말고 /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 봐요//
  아무것도 하기 싫으니까 / 무엇도 되기 싫을 때니까


  아이들과 아무것도 하기 싫을 때가 언제인지 차례대로 이야기해 보았다.


  “아침에 일어나기 싫을 때요.”
  “눈꺼풀에 빛이 닿을 때 더 일어나기 싫어요.”
  “잔소리 들을 때 아무것도 하기 싫어요.”
  “아침에 깨울 때 몸은 일어나도 영혼은 누워있어요.”


  아이들 말이 대체로 비슷하다. 아이들 말을 모아서 칠판에 적었다.


  아침에 / 떠오른 해의 빛 / 눈꺼풀에 닿는 해의 빛 / 포근하다 이불이.
  울 엄마는 소리친다. “빨리 일어나!”/ 편안하게 몸을 동글이며 잠을 잔다.
  “이불 개! / 음, 어디지. 졸리다 더 자고 싶다.
  “밥 먹어!”/ 아, 하기 싫다.
  “다 해!”/ 음…
  몸은 바닥에 있지만 / 내 영혼은 다른 데 가서 놀고 온다.

  아무것도 하기 싫어서 영혼이 탈출하는 장면을 연극으로 만들었다. 닫혀있던 막대기 창문이 양쪽으로 떨어지며 드르륵 열렸고, 진짜 몸과 영혼의 몸이 나란히 이불 덮고 누워있다가 잔소리가 시작되면 유체이탈. 진짜 몸은 그대로 바닥에 누워있고, 영혼의 몸만 스르륵 일어나서 밖에 나가 춤추고 기차놀이 하며 놀다가 다시 제자리에 들어와 누웠다가 둘이 똑같이 일어나서 세수하고 양말 속에 발을 넣고 가방 메고 학교로 가는 연극이다.

  말하는 대로 안 될 게 무어냐. 아이들과 시를 읽는 지금 여기 이 자리는 한 사람의 말이 우뚝 서는 곳, 한 사람의 말이 노래가 되고 춤이 되고 집과 길과 마을이 되는 곳.



필자는 1968년 강원도 양양군에서 태어나 지금까지 같은 마을에서 살며 초등학교 교사로 일하고 있다. 현재 전교생이 39명인 조산초등학교 산골 아이들과 산과 바다를 누비며 작지만 확실한 교육의 행복을 찾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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