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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 쌤과 산골 학교 아이들의 좌충우돌 한 해 살이

후회되는 일

글_ 탁동철 강원 조산초등학교 교사



  4교시에 전교생이 운동장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이제 점심밥 먹으러 갈 시간이다. 우리 반 아이들이 “배고파요. 밥 빨리 먹으러 가요.” 재촉하는 걸 내가 무뚝뚝한 말투로 “동생들 먼저 먹으라 해야지.” 이 한마디 했다가 아주 난리가 났다. “6학년이 먼저 먹어야 한다고요!”

  태준이는 동생들이 먼저 밥 먹으면 자존심이 상하니까 차라리 밥을 안 먹겠다고, 체 게바라처럼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 싸우겠단다. 난 밥 안 먹어요, 버럭 말하며 저쪽으로 가버리는 녀석을 보니 속에서 부글부글 미운 감정이 치밀었다. 그러나 내가 뭘 어쩔 수 있겠나. 딱 고만큼 생각하고 행동하면 딱 고만한 크기의 자기 자신인 것. 더 말해봤자 쓸데없는 잔소리로 여길 테고, 나만 초라해질 테고.

  오후에 밥에 대한 이야기를 마저 나눴다. 정말 6학년이 먼저라고 생각하는 것인지, 아니면 자기들도 알고 있으면서 일부러 심술을 부려 본 것인지 확인하고 싶다.

  “나는 동생들한테 양보하는 게 옳다고 생각해. 너네는 여전히 6학년이 앞장서야 한다 생각하고. 그렇지?” 성원이는 아니다.

   “저는 1학년부터 먹는 게 맞다고 생각해요. 6학년 먼저 먹는 것 반대.” 고맙기는 하지만 이런 옳은 말은 따돌림감이 되기 쉽다.

  덩치 큰 아이들은 다르다. 신념 가득한 얼굴로 6학년이 먼저 먹는 게 옳다고, 중학교에 가면 3학년이 먼저 먹고 1학년이 나중에 먹는다고, 자기들도 곧 중학생이 되니까 고학년부터 먹어야 한단다. 집에서 웃어른이 먼저 숟가락을 드는 것처럼, 6학년은 우리 학교의 기둥이니까 늦게 먹으면 질서가 흩어진다고, 6학년이 먼저 먹어줘야 한단다.

  산처럼 너그러운 마음으로 선입견 없이 들어보자고 아무리 다짐해 봐도 내 귀에는 말이 밉다. 평소에는 ‘배고파요, 배고파요’ 해서 내가 4교시 수업을 조금 일찍 끝내줘서 밥 먹으니까 밥 먹는 순서 따위 안 중요하다. 하지만 전교생이 똑같이 끝난 자리에서 6학년이 밥 먼저 먹겠다고 달려가서 앞을 차지하면 동생들 보기에 먹퉁이 형 심퉁이 오빠로 보이는 것 아닌가?

  “6학년이 가장 공부하는 시간이 많고 공부도 어렵기 때문에 6학년이 밥을 먼저 먹어야 해요.”

  “음식에 독이 있을 수도 있어요. 6학년이 먼저 먹고 위험한지 아닌지 알아내야 동생들이 안전하잖아요.”

  차라리 말이나 못 했으면. 나는 아이들 말에 전혀 동의할 수가 없고, 설득하고 싶지 않고, 설득할 자신도 없고, 더는 말 듣고 싶지 않다. 스스로를 비추는 거울 하나 덜렁 구해다가 너네 모습 한번 들여다보라 해주고 싶다.

  “다른 학년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아보는 것 어때? 설문지를 돌려서 6학년이 먼저 먹어야 된다는 의견이 많으면 앞으로는 무조건 6학년이 먼저 먹는 거로 하자.”

  가라앉았던 교실이 갑자기 들썩 신났다. 다른 사람도 6학년과 같은 의견이면 나한테 문제가 있는 거다. 내가 틀린 것이라면 아이들한테 고개 숙여 정중하게 사과하리라, 이제부터라도 다시 새롭게 새 마음으로 살아야지 다짐했다.

  아이들과 함께 의논해서 설문지 문구를 만들었다.

  “‘6’이 아니라 ‘고’로 글자를 바꿔요.”

  “유치원은 빼요.”

  6학년보다는 고학년이라 해야 편드는 숫자가 늘어날 거라는 계산, 우리 학교는 저학년보다 고학년 숫자가 2명 더 많다는 것을 꿰뚫고 있는 치밀한 작전이다. 성공 확률이 아주 높다.

  아이들은 복사한 설문지를 나눠 들고 환한 얼굴로 흩어져 갔다. 밥 먼저 먹는다는 말에 마냥 헤헤거리는 저 순박한 모습들을 보며 어느새 내 속이 좀 풀렸다. 짠하다. 동생들과 일대일로 만나 설득하겠지. 고학년이 먼저 먹게 써 달라고. 좋은 말로 살살 꼬시면 성공할 수도 있을 거야. 이번 일을 기회로 동생들이랑 서로 이야기 나누며 친해지기도 하고, 친절을 베풀기도 하고, 이런 시간이 되면 좋겠다.

  붕붕 날며 교실을 떠났던 아이들이 무거운 걸음으로 하나둘 돌아왔다. 받아온 설문지를 내 책상 위에 내려놓고 돌아서는 낯빛들이 어두워 보인다. 내가 쌓아놓은 설문지를 집어 들며 말했다.

  “읽을게. 보나 마나 6학년 먼저 먹으라는 의견이 많겠지? 그랬으면 좋겠다. 약속대로 내일부터는 무조건 우리가 1등으로 먹는 거로.”

  아이들 얼굴에 살짝 기대감이 돌았다. 설문지를 읽었다.

  “1학년 먼저. 1학년 만이 머고 크야 하니까.”

  “1학년 먼저. 어린 학생들은 배고픔을 참는 힘이 없어서.”

  교실이 어수선해졌다. 에휴 한숨 소리도 나오고, 우우 소리치기도 하고, 주먹으로 책상을 치기도 하고, 욕도 나오고. 계속 읽었다.

  “1학년 먼저. 꼬마 아이들이 더 힘이 없고 6학년은 충분히 힘도 세기 때문이다. 그리고 6학년, 이런 거로 무슨 설문입니까. 말이 되는 소리 하시기 바랍니다.”

  “저학년 먼저. 1, 2학년들이 많이 놀고 그러니까 저학년이 먼저 먹는 게 맞다. 그리고 6학년의 자존심은 개뿔, 너가 유치원이냐?”

  너무하다. 서운하다. 6학년을 뺀 나머지 모든 학년에서는 1학년, 또는 저학년이 먼저 먹어야 한다고 의견을 썼다. 어떻게 편들어 주는 동생이 하나도 없단 말인가. 아이들 몸이 뒤로 늘어졌다. 기대에 찼던 얼굴들이 분노로 일그러졌다.

  “있다! 6학년 먼저 먹으라는 설문지도 있어.”

  아이들이 그것 보라며 고개를 바싹 당기며 다시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번 것은 너무나 귀한 특별 설문지니까 내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또박또박 읽었다.

  “6학년 먼저. 6학년은 연세가 많이 드셔서 밥도 많이 처드셔야 하니까.”

  “6학년 먼저. 왜냐하면 6학년이 우리 학교에서 가장 저학년이니까.”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아이들은 아무 말 없이 빗자루 꺼내 청소하고 아무 인사도 없이 푹 숙이며 교실을 떠났다. 나 혼자 빈 교실에 앉아 머리를 쥐어뜯으며 괴로워했다. 말이란 게 부질없구나. 너 말 틀린 것을 따질 것이 아니라 서로 바짝 붙어서 바람 부는 바닷가라도 함께 걸을 것을 그랬다. 나와 아이들 사이는 확 깨져 버렸다. 이제부터 아주 여러 날 동안 아이들은 자기네를 이긴 얼굴을 미워하게 될 것이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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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1968년 강원도 양양군에서 태어나 지금까지 같은 마을에서 살며 초등학교 교사로 일하고 있다. 현재 전교생이 39명인 조산초등학교 산골 아이들과 산과 바다를 누비며 작지만 확실한 교육의 행복을 찾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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