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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 쌤과 산골 학교 아이들의 좌충우돌 한 해 살이

개학

글_ 탁동철 강원 조산초등학교 교사



  ‘너무 집에만 있어서 얼른 학교 보내고 싶네요.’

  ‘핸드폰만 붙잡고 있어요. 빨리 학교에 보내고 싶어요.’

  어제 저녁에 학부모들한테 받은 카톡 문자다.

  아침 학교 길에 만난 아이들은 다르다.

  “선생님, 방학이 너무 짧은 거 아니에요?”

  “겨울방학은 언제 해요?”

  입술 비죽 내밀며 아쉬워하는 두 아이를 불러 세워놓고 제발 사진 한 번만 찍혀 달라 부탁했다. 늦여름 들꽃을 배경으로 하나 둘 셋, 찰칵! 길섶에 돌메밀꽃 달개비 바랭이 강아지풀 수크렁이 한창이다. 풀밭 주인 바뀌는 걸 보니 계절 바뀌는 걸 알겠다. 풀 사이로 가늘게 꽃대를 올린 부추꽃 두어 줄기 뽑아 들고 교실로 들어섰다.

  “이건 무슨 꽃?”

  아이들 한 명 한 명 코앞에 하얀 꽃송이를 내밀었다. 꽃이 다가갈 때마다 흡, 후웁 콧구멍 벌룩벌룩 숨을 들이켠다.

  “폭죽 터진 거 같아.”

  “엄마 냄새.”

  “장떡 부칠 때 넣는 건데.”

  한 사람이 한 줄씩 아무렇게나 말을 지어내 노래처럼 불러보라 했다.

  가을에 눈이 내렸다./어머니 품처럼 포근한/하얀 이불꽃/새 걸로 나왔다.

  노래 부르는 동안 꽃병에 물을 채워 ‘하얀 이불꽃’을 꽂았다.

  “이불꽃 말고 다른 꽃도 있어.”

  우리 반이 새롭게 피어나는 2학기가 되기를 기대하며, 가을이 올 거라 기대하며, 임길택 시에 붙인 노래 <부추꽃>을 들려주었다.

  하얗게 부추꽃 피어올랐다/이제 가을이 올 거라고/하늘에 뜨는 달이 높아질 거라고/하얗게 부추꽃 피어올랐다.

  10시에 개학식 한다고 체육관으로 모이라 해서 교실을 나서는데 다시 연락이 왔다. 운동장 공사 중이라 어수선하니 밖으로 나오지 말고 학급별로 개학식을 하라 한다. 자리에 앉아서 개학식 어떻게 할까, 의논했다.

  “첫 번째로 뭘 할까?”

  “애국가 불러요.”

  눈이 맑은 영한이가 말했다. 칠판에 ‘1번 애국가’라고 적었다.

  “애국가 만든 안익태가 친일 작곡가야.”

  태준이가 말했다. ‘친일’이라는 말에 아이들이 찌푸렸다.

  1학기 사회시간에 유관순 윤봉길 홍범도를 배웠기 때문이다. 일제와 친한 작곡가 대신 아이들과 친한 작곡가가 만든 노래 ‘영미’를 부르기로 했다. 

  “두 번째는?”

  “교장선생님 말씀요.”

  학교 행사 때마다 ‘국기에 대한 경례, 바로, 애국가 제창, 다음은 교장선생님 말씀이 있겠습니다.’ 이런 식으로 수없이 되풀이되던 차례니까 안 봐도 훤하겠지. 

  칠판에 ‘2번 교장선생님 말씀’이라고 적었다. 그런데 교실에서 하니까 교장선생님 말씀을 구할 수가 없다.

  “선생님이 대신 하세요.”

  “난 싫은데.”

  내가 다른 건 몰라도 교장 말씀 흉내는 하기 싫다. 누가 교장선생님 대신 개학식 인사말을 할까. 교장선생님과 비슷한 사람이 교장을 하기로 했다. 보건실에 가서 몸무게를 쟀다. 윤서 86.5, 현빈 78.4, 태준 73.6, 동철 69.5……. 가장 무게감 있는 윤서가 오늘 교장이다.

  개학식 순서를 마저 정해서 칠판에 썼다.


  1. <영미> 노래 부르기 
  2. 교장선생님 말씀
  3. 방학 지낸 이야기
  4. 숙제 발표
  5. <부추꽃> 노래 부르기


  “지금부터 2019년 2학기 개학식을 시작하겠습니다.”

  첫 번째 차례로, 아이들과 친한 백창우가 작곡한 노래 <영미>를 불렀다.

  “영미는 늘미기 고갯마루에서 촛불을 켜고 산다. 검은 염소와 개 두 마리…….”

  “다음은 교장선생님 말씀이 있겠습니다.”

  윤서가 의젓한 걸음걸이로 앞에 나왔다.

  “차렷, 경례.”

  “효도합시다!”

  학교 인사말은 귀에 거슬린다. 왜 일제히 똑같아야 하는지. 70년대 “단결!” 하는 인사말과 뭐가 다른지.

  윤서가 교장선생님 같은 눈빛으로 아이들을 둘러보며, 교장선생님 같은 말투로 말했다.

  “여러분이 한 명도 안 다치고 온 걸 기쁘게 생각합니다. 방학 동안 부모님께 효도했나요?”
  “…….”
  “어떤 효도를 했는지 한 명씩 말해 보세요.”
  “저는 부모님이 샤워장을 운영했는데, 거기서 일 도와드렸어요. 샤워장 청소하고 쓰레기 치우고, 그래서 돈 5만 원 받았어요.”

  현빈이가 말했다. 교장선생님이 “참 잘했어요.” 칭찬했다. 다음은 태준이가 말했다.

  “저는 부모님과 같이 여행했어요. 원래는 혼자 집에서 게임하고 여행 안 가려고 했는데, 여행 같이 가줬어요.”

  방학 동안 중국 하얼빈 외갓집에 갔다 왔나 보다. 교장선생님이 “좋은 추억을 남겼구나.” 칭찬했다.

  다음 차례는 숙제 발표. 시를 써온 아이가 시를 읽었다. 시를 읽는 동안 나머지 아이들은 천천히 무대 앞으로 걸어 나와 동무가 쓴 시의 배경이 되어주었다. 몸으로 시의 집 지어 주기, 느리게 움직이다가 조각상처럼 굳어지며 얼음.

   햇볕 쬐는 고양이
우리 집 앞마당/고양이 세 마리/햇볕을 쬔다./빛을 더 달라는 듯/손을 위로 아래로/요리조리 배를 까며/애교 부린다./신의 축복이라도 온 듯/행복해 보인다./입을 쫙 하품도 해주고. (8.21 윤서)


  욕먹는 돼지
  논에 구덩이가 생겼다/멧돼지가 흙탕 놀이 했나 보다/쓰러진 벼가 새까맣다/“아고 이게 뭔 일이너.”/할머니 할아버지 얼굴이 새까맣다/벼농사 망치고/밭에 옥수수도 다 망치고/마을이 새까맣다/사람들이 멧돼지 욕을 하며/논두렁을 메꾼다. (8.21 성원)
다 함께 <부추꽃> 노래 부르며 2019년 2학기 개학식을 마쳤다.




필자는 1968년 강원도 양양군에서 태어나 지금까지 같은 마을에서 살며 초등학교 교사로 일하고 있다. 현재 전교생이 39명인 조산초등학교 산골 아이들과 산과 바다를 누비며 작지만 확실한 교육의 행복을 찾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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