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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 쌤과 산골 학교 아이들의 좌충우돌 한 해 살이

검은 발자국

글_ 탁동철 강원 조산초등학교 교사





  “6학년들이 외부 손님용 실내화를 신고 다녀요.”


   행정실장이 직원회의 시간에 하신 말씀이다. 6학년이면 우리 학교에서 귀한 손님이나 마찬가지니까 신을 자격이 없는 건 아니지만, 눈에 거슬린다는 말이 나왔으니 이제부터는 안 되겠다. 녀석들이 80킬로 안팎으로 몸이 불어서 작년까지 신던 자기 실내화가 작아지니까 문간에 놓인 어른 실내화를 아무렇게나 끌고 다녔나 보다. 아이들한테 말했다. 앞으로는 손님용 실내화 건드리면 안 된다고, 절대로!

  “6학년이 맨발로 급식소에 들어와요.”

  오후에 영양사 선생님이 하신 말이다. 손님용 실내화 대신 맨발로 식당에 들어간 모양이다. 맨발로 다니면 발바닥을 자극해서 뇌 건강에 좋다는 말이 있지만, 여럿이 밥 먹는 자리에서는 실례가 될 것 같다. 아이들한테 말했다. 맨발로 식당에 들어가면 안 된다고.

  다음 날 아침, 아이들이 어디서 분홍색 실내화를 한 켤레 가져왔다. 신발장에서 찾았다고, 작년 6학년 졸업생이 신다가 버려두고 간 실내화라 한다.

  ‘그래, 남자는 핑크지.’

  쉬는 시간에 산처럼 무거운 윤서가 교실 바닥에 펄썩 앉았다. 예술혼을 불태우는 중이라나. 포스터물감을 찍어 분홍 실내화에 칠한다. 붓이 슥 지날 때마다 분홍이 검정으로 변해 갔다.

  “그거 신고 다닐 건 아니지?”

  “카리스마요.”

  내 물음에 짧게 대꾸하고는 고개 한번 안 돌리고 자기 하던 일 한다. 내가 아이들 하는 일마다 참견하는 고리타분한 어른이 아니니까 그냥 지켜만 보았다.

  ‘포스터물감은 물 묻으면 지워지는데….’

  어둠이 내리는 저녁 산처럼 장엄하게 버티고 앉아 오로지 그 작은 한 가지에 집중하는 모습이 아름답다. 공부 시작 시간이 되었지만 바닥에서 꿈쩍 않는다. 진심이 담긴 목소리로 “십 분만 더요.” 하는데 어쩌겠나. 예술혼 불태울 시간을 더 내줄 수밖에.
드디어 붓질을 마친 윤서가 만족스러운 얼굴로 뒷정리한다. 포스터물감 뚜껑 닫아 제자리에 놓고, 붓 빨아 붓통에 넣고, 검게 칠한 실내화 두 짝은 햇볕 잘 드는 창가에 세워두고, 그리고는 단정하게 앉아 수학 교과서를 폈다.

  “점심시간이다!”

  아이들이 식당으로 달려갔다. 움직이기 귀찮아하는 녀석들이 점심시간에는 갑자기 가벼워지며 발바닥을 불태운다. 나는 아이들 뒤를 따라 걸었다. 식판에 밥을 받아들고 “잘 먹겠습니다.” 하고 돌아서는데 식당 바닥에 뭔가 있다. 동물 흔적 같다. 너구리는 아니고, 개 발자국도 아니고…. 점점이 찍힌 검은 자국이 한 줄로 폭폭폭폭 이어지다가 6학년들 앉아 밥 먹는 식탁 밑으로 쪼르르 들어갔다.

  오, 이건 카리스마 자국! 손님용 실내화는 안 된다 하고, 맨발도 안 된다 하고. 동생들로부터 오빠, 형 소리를 듣는 존경받는 6학년으로서 차마 핑크빛 실내화는 못 신겠고. 그래서 탄생한 검은색 카리스마 실내화가 남긴 발꿈치 자국.

  “윤서야, 발자국이 너 쫓아다녀.”


  “예에?”

  아래 한번 내려다보고 영양사 쪽으로 힐끗 돌려 눈치 보며 어쩔 줄 모른다. 다행스럽게도 영양사, 조리사님들한테서는 별다른 눈치가 없다. 아이들 반찬 밥 담아 주느라 바빠서 못 봤는지, 알면서도 모르는 척인지.

  밥 다 먹은 윤서가 벌떡 일어서지 못하고 앉은 자리를 지킨 채 머뭇머뭇한다.


검은색 카리스마 실내화가 남긴 발꿈치 자국

  “이거 신어.”
  “히이….” 

  내가 벗어준 실내화는 발에 신고, 물감칠이 군데군데 벗겨져 밑바닥이 검고 분홍인 얼룩 카리스마 실내화는 손에 들고, 살금살금 살살 무사히 급식소 식당을 빠져나갔다. 금방 6학년 아이들이 손에 파란 걸레 하나씩 들고 식당으로 되돌아왔다. 바닥에 엎드려 싸악, 싸악. 사람들 많은 곳에서 친구 혼자 청소하게 두면 쪽팔린다나 어쩐다나 떠들어대면서 깨끗이, 깨끗이. 안경 쓴 4학년 여자아이가 밥 먹다 말고 “오빠들 왜 저래요?” 묻는다. 내가 아무것도 모르는 말투로 말했다.

  “와, 6학년 오빠들 착하다. 급식소 선생님 고생하신다고 바닥 청소하네.”

  다음날 내가 검정색 아크릴 물감을 구해 왔다.

  “이걸로 칠하면 안 지워진대.”

  다시 칠했고, 창가에서 말렸고, 반짝반짝 빛이 났다. 아이들이 서로서로 신겠다고 난리다. 안 된다. 앞으로 우리 반에서는 윤봉길, 김구 선생처럼 아름다운 일을 해낸 사람만 신는 거로 규칙을 엄격하게 정했다. 이제부터 검은색 실내화는 동물 흔적 대신 ‘의리 의리’ 소리를 내며 발 딛는 자국마다 아름다운 이야기를 남기게 될 것이다. 2019년 우리 반 윤봉길들의 이야기를 들려주게 될 것이다.

  우리 반이 ‘덜컹덜컹 골목길 음악회’ 나가기로 하고 달력에 표시한 날짜가 다음다음 주 화요일이다. 두 번째 공연이다. 이번에도 손수레에 악기를 싣고 마을 골목을 지나 바닷가 소나무 숲으로 갈 거다. 지금까지 만든 노래 여섯 곡을 부르고 돌아오려 했는데, 계획이 바뀌었다. 새로 한 곡 추가다. 새로 추가할 노래는 <검은빛 슬리퍼>. 윤서가 노랫말을 썼고, 친구들이 곡을 붙이는 중이다.


핑크빛 슬리퍼 핑크빛 슬리퍼
쪽팔려서 검은색으로 칠한다
촤악 촤악 변신!
역시 남자는 검은색 검은색이지
검은빛 슬리퍼 검은빛 슬리퍼
걸어가서 흔적을 남긴다.
하나둘셋넷 발자국 검은 발자국
평화로운 학교에 검은 발자국
발자국이 모두 멋진 검은 발자국

  카리스마 풍으로, 의리의 곡조로, 씩씩하게 힘차게. 교실 창밖으로 뻐꾸기 호반새 울고 우리는 노래한다.
  “발자국이 모두 멋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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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1968년 강원도 양양군에서 태어나 지금까지 같은 마을에서 살며 초등학교 교사로 일하고 있다. 현재 전교생이 39명인 조산초등학교 산골 아이들과 산과 바다를 누비며 작지만 확실한 교육의 행복을 찾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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