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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 쌤과 산골 학교 아이들의 좌충우돌 한 해 살이


도마뱀 허물 벗는 자리

글_ 탁동철 강원 조산초등학교 교사

  잠바 안주머니에서 꽃 한 송이 꺼내 들었다.

  “발가락이다!”

  “발가락꽃.”

  “내가 지은 거야. 오도도도 걸어가는 병아리 발가락 같다고.”

  이름 붙인 성원이가 마구 자랑스러워한다. 이번엔 연분홍 꽃 뭉치를 내밀었다.

  “한의원꽃이요.”

  “잎이 씨거워.”

  맘대로 지은 이름이니 대답도 맘대로. 자주괴불꽃? 수수꽃다리? 원래 이름 따위야 아무려면 어떠냐. 학교 뒤뜰에 연분홍 꽃나무도 “공책에 적어라, 외워라, 수수꽃다리!” 해서 아는 이름보다는 퉤퉤 이파리를 뱉어내며 “아이고 씨거워, 한의원이야.” 하는 목소리가 반가울 것이다. 지금 당장 가서 말 걸어보라. “한의원꽃아, 안녕.” 하고. 나무가 벙긋 웃으며 “응.” 대답할 거다.

  성원이가 얼른 병에 물을 받아와 꽃을 꽂는다. 발가락꽃 한의원꽃 꽃병 놓인 환한 교실에서 꽃노래 두 곡 불렀다.

  해바라기가 참 착하다. / 벌들이 붙어도 가만히 서 있네. (해바라기, 이성윤)
  해바라기야 해바라기야 너는 내 동무 / 해바라기야 해바라기야 너는 해님의 아들 (해바라기, 이원수)


손바닥 위의 씨앗 두 알

  손바닥 펴라 해서 내민 손바닥에 톡톡, 씨앗 두 알 떨구며 “어떤 꽃을 피울까?” 물었다.

  씨앗 두 알 꼭 쥐고, 호미 챙겨들고 학교 텃밭으로 갔다. 지난주에 심은 감자 옥수수는 아직 싹이 안 나왔다. 한 달 전에 뿌린 밀만 새파랗게 일어섰다.

  “빵 어떻게 해요?”

  현빈이 묻는 말에 나는 못 들은 척 고개 돌렸다. 밀밭 지날 때마다 물었고, 똑같은 말 여러 번 대답했다. 5월에 대궁이 쭉 빠져 올라와 이삭 생기고, 6월에 이삭 누렇게 익으면 낫으로 베고 작대기로 털고 맷돌로 갈고, 그거 반죽해서 빵 만들 거다, 하는 말. 알고 있으면서 괜히 묻거나, 아니면 대궁이니 이삭이니 맷돌이니 이런 게 도무지 떠오르지 않아 머릿속에 저장이 안 되거나, 아무려면 어떠냐. 지금부터 여름까지 겪어보고 먹어보면 저절로 알게 될 것을.

  아이들이 텃밭 아무 곳 자기 땅에 가서 자리 잡았다.

  “어떻게 심어요?”

  이것도 여러 번 대답했다. 씨앗 크기의 두세 배, 아니면 아무렇게나 맘대로. 눕혀 심든 세워 심든, 호미로 심든 숟가락으로 심든.

  “저를 심어도 돼요?”

  “맘대로.”

  성원이가 정말로 자기 발밑에 구덩이를 파더니 그 속에 들어갔다.

  “땅 더 넓힐까요?”

  맘대로. 이제껏 그래 왔는데. 첫날엔 한 뼘 손바닥만 하게 일궜다. 거기에 씨감자 두 알 묻고 조개껍데기로 울타리를 둘렀다. 다음날엔 강낭콩 심는다고 땅을 넓혔고, 그 다음날엔 옥수수 토란 심는다고 넓혔고, 또 뭘 심는다고 양말 벗고 풀뿌리 캐고 맨발로 흙을 싸악싸악 간지럽히고 손바닥으로 아기 뺨 만지듯 도독도독 매만지며 넓혀 왔다. 첫 호미질부터 지금 백 번 이백 번 호미질까지 한 뼘 한 뼘 때가 묻은 땅이다. 예뻐야 내 것. 비뚤비뚤 줄 안 맞고, 동그랗고 네모나고 배부른 풍선이고, 무질서 속에 창조가 나오고 예술이 나오고, 조개껍데기와 돌멩이와 솔방울과 작대기로 둘러친 울타리와 울타리가 어울리며 은하수 별자리가 생겨났다.

  땅을 넓힌다 땅을 넓힌다 / 말을 타고 달리는 개척자처럼
  호미소리 캉캉 타각타각캉캉 / 이제부터 여기는 내 땅
  조개껍데기로 내 땅을 표시한다. / 감자 심고 해바라기 심고
  콩 옥수수 토란 고구마 / 난 부자다!
(4.9 김태준)


우리들 느낌과 표현으로 어루만지는 세상

  작년에는 가꿀 사람 없어 묵힌 땅이라 한다. 일이 싫었던 까닭이야 뻔하지. 손바닥 발바닥 맘대로 심는 자유 농법이 아니라, 학년 나누고 구역 나누고 가로 세로 줄 꽉꽉 맞추는 군국주의 농법으로 심어야 했겠지. 하나를 심어도 제대로 배워서 하라는 잔소리의 땅, 간섭 통제 일제 질서 원칙 가르침의 땅이 되었겠지.

  학교 텃밭은 실패가 곧 성공인 곳, 기쁨 가득 아이들의 땅, 내가 내 손발 움직여 땀 흘리는 흙 놀이판 땅, 감자 옥수수 대신 잡초를 길러본 것도 소중한 경험이라 보아주는 땅.

  “내일 집에서 옥수수 씨 더 가져와 심어도 돼요?”

  맘대로. 나는 공룡 알을 가져와 심을 거다.

  일 끝내고 호미 갖다 놓으러 가는데 창고 처마 밑에서 새 한 마리가 튀어나간다. 꽥꽥 놀랐다며 물수제비 튕기듯 허공에 몸을 던지며 사라진다.

  “와, 저건 위로아래로새다. 위로 아래로 날아.”

  “외톨이새. 혼자야.”

  저 새는 이름이 직박구리라고, 동무끼리 어울려 다닐 때가 많으니까 외톨이새 아니라고 하려다가 그만뒀다. 한 아이가 이 지구 위에서 한 글자 두 글자 세 글자 네 글자, 꼭 그만큼 호미질하며 가꾸어낸 이름이다. 이 세상 땅 중에서 말 중에서 날아가는 저 새의 등때기만큼의 땅은 아이의 자리다. 지금 여기 이 순간은 외톨이새가 맞다.

  교실 들어가는 동안 세상에 없는 이름 몇 개 더 얻었다.

  “이건 도마뱀 나무야. 껍데기가 허물 벗겨지잖아.”

  영한이가 산수유나무를 만지며 말했다. 이제부터 30년 동안 이 나무 이름은 도마뱀 나무다.

  “이건 피눈물 꽃. 할머니가 고생하는 것 같아서.”

  할머니 고생을 말하는 현빈, 고마운 입이다.

  지금 여기는 할머니가 고생하고 도마뱀이 허물 벗는 자리, 한 뼘 한 뼘 때 묻히며 일구어가는 자리, 우리들 느낌과 표현으로 어루만지며 세상을 새로 일으키는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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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1968년 강원도 양양군에서 태어나 지금까지 같은 마을에서 살며 초등학교 교사로 일하고 있다. 현재 전교생이 39명인 조산초등학교 산골 아이들과 산과 바다를 누비며 작지만 확실한 교육의 행복을 찾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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