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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정 교사의 ‘교육연극’ 웃음과 탄식, 공감으로 가득 찬 교실

교직경력 31년차의 노정 상주여고 교사는 학년 초 첫 수업 때 ‘노정 샘의 문학 시간 사용 설명서’를 나눠주며 오리엔테이션을 한다. 1년간 교육연극에 단련된 학생들은 학년말이면 시 한편으로 10~15분간 뚝딱 연극을 만들만큼 성장한다. 성적이 나빠 수업 시간에 주인공이 되기 어려운 학생들이 교육연극을 통해 급부상하고, 모둠장이 되어 모둠을 이끈다.

 

 

“오늘은 이근삼 희곡 ‘원고지’에 나오는 억압을 토대로 즉흥극을 만들어보죠. 교육연극에선 대본을 미리 짜면 MSG를 치니까 진정성이 없어요. 잘하려고도, 예쁜 척도 하지 말고 내가 겪는 억압에 대해 충분히 이야기해 보세요.”


  12월 11일 오후 경북 상주여고 2학년 1반. 국어과 노정(54) 교사가 즉흥극을 제안하면서 “5분간 모둠별로 얘기하고 2분간 배역을 정하라.”고 시간을 정해주자 마음이 급해진 학생들은 “아~” 하는 탄식을 터뜨렸다. 이어 5, 6명씩 6개 모둠으로 나뉘어 열띤 토론을 벌였다. 한 학생은 온갖 제스처를 써가며 목소리를 높였고, 또 다른 학생은 손뼉 치며 동의를 구한 후 노트에 대사를 적었다. 공연 시간이 가까워오자 교실은 더 왁자지껄해졌다.

 

 

1. 2. 고3의 심리적 압박감을 상황극으로 표현하는 학생들

 

 


우리들의 이야기를 즉흥극에 담다
  책상을 한 켠으로 옮겨 커튼을 치니 제법 무대 분위기가 났다. 첫 무대를 맡은 ‘상담담당’ 모둠은 예비 고3의 스트레스를 실감나게 표현했다. 이회리 학생이 시험지를 허공에 던진 후 온몸을 흔들며 ‘오두방정’을 떨자 웃음이 터져 나왔다. ‘오답노트’와 ‘생기부(학교생활기록부)’로 분한 학생들의 압력에 이 학생의 얼굴은 이내 울상이 됐다.


  ‘붉은팥풋팥죽’ 모둠 학생들은 친척들의 수능 압박감, 외모 품평, 교실의 경쟁 기류를 묘사한 즉흥극을 선보였다. 짧은 커트머리를 한 김연희 학생은 외모로 인해 억압 받는 역할을 했다. 친구들은 복도에서 마주친 김연희 학생에게 “저게 남자냐? 여자냐?”며 수군댔다. 김연희 학생은 “실제 제가 겪은 실화”라고 했다.


  한 모둠은 고교뿐 아니라 대학, 직장생활로 이어지는 억압을 즉흥극으로 꾸몄다. “현아야. 성적표에 ‘3’(3등급)이란 숫자가 존재해야 돼?” 엄마의 다그침이 괴롭지만 “대학 가면 고생 끝! 행복의 시작”이라는 환상으로 버틴다. 그런데 대학에 입학한 후에도 주인공은 학교 과제 PPT에 파묻힌다. 취업한 후에는 고참사원이 던져준 일거리를 해치우느라 야근을 밥 먹듯 한다. 신입사원(권다연)을 괴롭히는 고참사원 역할을 한 류주원 학생은 “문학 작품은 이론으로 배우는데 교육연극을 하면 학습 내용이 머리에 쏙쏙 들어오고 더 깊이 공감된다.”고 했다.


  마지막 즉흥극은 ‘확률분포표’ 모둠이 꾸몄다. 암전이 된 무대에서 고교생(지예진)을 빙 둘러싼 환영이 “고3이야, 고3이야.”를 반복하자 주인공은 머리를 쥐어뜯으며 괴로워한다. 조명이 켜진 후 교사(박지은)는 “밤 12시까지 공부해도 부족한데 11시 야자(야간자율학습)를 안 온다는 게 말이 되느냐.”며 주인공을 닦달한다. 밤늦은 귀갓길에 만난 옆집 아주머니는 “우리 딸 이번에 1등급 받았다.”며 자랑한다. 주인공이 천연덕스럽게 “축하드려요”라고 반응하자 학생들 사이에서 웃음이 터졌다.

 

 

속마음 터놓는 교육연극, 힐링되다
  여섯 모둠의 즉흥극이 공연되는 동안 교실은 웃음과 탄식, 공감으로 가득 찼다. 3월이면 본격적인 수능 전선에 나서는 학생들은 억압의 소재로 주로 공부를 꼽았다. 가정에선 엄마, 학교에선 담임교사가 스트레스를 주는 주범이다. 즉흥극이 마무리된 후 노 교사는 허니컴보드와 펜을 학생들에게 나눠주곤 “자기에게 쓰고 싶은 말을 쓴 후 칠판에 붙이라.”고 했다. “참~ 사는 게 쉽지 않다. 그치 얘들아?” “주원아, 잘했고, 잘하고 있고, 잘할 거야.” “딱 1년만 더 고생하자.” 같은 책상을 쓰는 친구들이 속마음을 털어놓자, 어느새 학생들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송현서 학생은 “기말고사를 치르며 다소 우울했는데 오늘 우울감이 싹 가셨다. 우리가 겪는 억압에 대해 속 터놓고 얘기하니 힐링이 된다.”고 했다.


  교육연극에 대한 학생들의 호응은 뜨겁다. 김연희 학생은 “어려운 현대시나 고전소설 어휘가 머리에 쏙쏙 들어온다. 시험 칠 때 교육연극으로 배운 지문이 나오면 문제 풀이가 쉽다.”고 말했다.

 

 

3. 노정 교사는 “내 마음속에 있는 나도 모르는 걸 끄집어내서 토닥거리는
과정에서 학생들은 위로를 받는다.”며 교육연극의 힘을 설명한다.

 

 

“연극은 배설” 내 마음 속 나를 위로
  이날 노정 교사는 수업 후 연극동아리도 지도했다. 학생들은 윤대성 희곡 ‘꿈꾸는 별들’을 상주여고 버전으로 바꿔 축제 전야제 때 공연하려고 리허설을 반복했다.


  교육연극은 국어교과서에 나오는 문학 작품을 소재로 한다. 유형은 즉흥극뿐 아니라 만화연극, 그림연극 등 다양하다. 공연 전 단계에선 음악 듣기, 그림 그리기 등으로 마음 열기 놀이를 한다. 노 교사는 고2 문학교과서에 나오는 페미니스트 시인 김혜순의 ‘납작납작-박수근 화법을 위하여’의 경우 1차시에선 크레파스를 이용해 모둠별로 시를 읽은 느낌을 그림으로 그리고, 2차시에선 박수근 미술관을 무대로 모둠원 중 1명은 박 화백, 1명은 김 시인이 돼 그림에 대해 얘기 나누는 연극으로 꾸며보라고 했다. 연극을 안해 본 학생들이 어느 순간 박수근 그림 속 화면이 됐다. 봉산탈춤 해석본을 읽은 후 오늘의 학교 상황이나 정치판으로 옮겨와 패러디했고, 윤동주의 명시 ‘별헤는 밤’을 연극으로 꾸민 후 영상시로 바꾸기도 했다.


  여름방학 보충수업 때는 고전소설을 교육연극으로 꾸며 상호평가토록 했다. 노 교사는 고전소설을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 순으로 A4 한 장에 요약해서 나눠줬다. 학생들은 고전소설, 고전시가를 싫어하고 어려워한다. 고전소설은 연극, 고전시가는 말풍선을 곁들인 만화로 꾸미게 했더니 내용을 쉽게 이해했다. 중학교 재직 때는 훈민정음 제자 원리를 가르치려고 모둠별로 타임슬립물을 올렸고 소설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를 1인칭 주인공, 3인칭 전지적 작가 시점 등 4개 시점 공연으로 시점을 가르쳤다.


  노 교사는 “미리 예습을 시키는 경우는 거의 없다.”며 “집에서 연습해올 가능성이 커서다. 그러면 세련될지 몰라도 솔직하게 말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의 지론은 “연극은 배설”이라는 것이다. “내 마음속에 있는 나도 모르는 걸 끄집어내서 토닥거리는 순간 위로를 얻는다.”는 것이다.

 


노정 샘의 문학 시간 사용 설명서
  학년 초 첫 수업 때 그는 ‘노정 샘의 문학 시간 사용 설명서’를 나눠주며 오리엔테이션을 한다. 1년간 교육연극에 단련된 학생들은 학년말이면 시 한편으로 10∼15분간 뚝딱 연극을 만들만큼 성장한다. 성적이 나빠 수업 시간에 주인공이 되기 어려운 학생들이 교육연극을 통해 급부상하고, 모둠장이 돼 모둠을 이끈다. 연극을 통해 마음을 열고 상상력과 언어 능력, 토론능력, 감성을 키우고 문제해결력도 기르게 된다. 노 교사는 “국어와 발표를 싫어하고 획일화 교육에 반감을 느껴 자퇴를 원한 학생이 있었다. 그 학생이 국어일기에 ‘수업을 통해 성장했다’고 고백한 걸 보고 뿌듯했다.”고 말했다.


  올해로 31년차 교사인 노정 교사는 “교육연극이 일반 수업과 달라 시도도 안 해보는 교사들이 많다.”며 “실패할까봐, 망할까봐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교사는 멍석을 깔아주는 사람이다. 수업은 아이들의 에너지로 만들어진다.”고 말했다. 


  초임 때부터 10년간 연극 교육을 해온 그는 지난 ’98년 한국예술종합학교 김석만 전 교수, 최영애 교수가 교사들을 대상으로 한 연수에 참여한 후 연극을 교육 매체로 활용하는 교육연극의 매력에 푹 빠졌다. 극단 소백무대에 입단해 배우와 스태프로도 활동했으니 뜨거운 열정을 미뤄 짐작할법하다.


  노 교사는 2002∼2006년 상주여고 재직 당시 연극동아리 ‘마당세실’을 이끌었다. 전국청소년연극제에 3회 출전해 두 차례 우수상을 받았고, 노 교사는 우수 지도교사상을 수상했다. 경북 지역을 중심으로 교육연극 강사로 활동 중이며, 경북국어교과모임 ‘씨앗’ 회장도 맡고 있다. 그가 운영하는 블로그(http://blog.daum.net/nojeong)에서 자세한 교육연극 정보를 얻을 수 있다.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교육연극에 대한 이해가 낮았다. 밀도 높은 수업으로 보지 않았다. 시끄럽다는 반응에 학교 옆 공터로 나갔고, 체육관도 빌려야 했다. 요즘은 학생 활동 중심 수업이 대세가 되면서 ‘그게 수업이냐’고 질타하던 관리자들이 ‘노정 샘, 수고 많다’고 격려하니 격세지감을 느낀다.” 

 

 

tip 교육연극


➊ 모둠 활동부터 익숙해져라
입과 귀가 트이지 않으면 연극이 불편해진다. 무대에서 어떤 얘기를 하든 교사가 수용하다는 걸 학생들이 믿어야 한다.


➋ 수업 초반에 학습 목표와 평가 기준을 알려주라
왜 교육연극을 하고, 어떤 결실을 얻을 수 있는지 알려줘야 한다.


➌ 공연 시간을 정해주라
러닝타임을 분명히 정해주지 않으면 즉흥극 공연 시간이 한없이 늘어진다.


➍ 모든 행동을 허용하라
바닥에 눕거나 과자를 먹거나 뛰어다녀도 상관없다. 단 수업을 이탈해선 안 된다.


➎ 연기력을 논하지 마라
연기를 잘하네, 마네 해선 안 된다. 연극 시간이 아니라 국어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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