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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6: 하나의 사건, 여러 개의 이름


글  강응천 도서출판 문사철 대표(역사저술가)


혁명의 반대편에 있는 정변의 또 다른 측면,
즉 쿠데타가 5.16의 의도와 성격을 올바로 규정하는 이름으로 제기되었다.


  1961년 5월 15일 밤 10시, 제2군부사령관 박정희 소장(육사 2기)을 중심으로 한 일군의 군 지휘관이 영등포의 제6관구 사령부에 모였다. 그들의 목적은 민주당 정부를 전복하고 권력을 장악하는 것이었다. 주력부대로 점찍었던 육군 30·33사단이 움직이지 않자 그들은 김포의 해병여단과 공수단 병력만으로 작전을 감행했다. 5월 16일 새벽 3시 30분, 박정희 소장이 직접 지휘하는 해병여단과 공수단 병력 2,000여 명은 한강 인도교 남단인 노량진에 집결했다. 그들은 불과 30분 만에 50명의 헌병 저지선을 뚫고 용산의 육군본부에 진입해 군의 심장부를 장악했다. 그리고 병력을 분산 파견해 내각 주요 인사를 체포하고 주요 기관을 장악하면서 일사불란하게 대한민국을 접수했다.

  이 사건은 오늘날 공식적으로 ‘5.16 군사정변’이라 불린다. 군인들이 일으킨 정치적 변란이라는 뜻이다. 국방에 전념해야 할 군인들이 정치에 개입했다는 점에서 부정적인 가치판단이 들어 있는 표현이다. 그러나 1884년에 김옥균 등의 급진개화파가 일으킨 ‘갑신정변’은 부정적인 평가만 받고 있지 않다. 보는 사람에 따라 자주적 근대화를 앞당기려 했던 긍정적 시도로 여겨지기도 한다. ‘정변’이란 말 자체는 의도나 성격에 대해 중립적인 뜻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표준국어대사전>도 정변을 ‘혁명이나 쿠데타 따위의 비합법적인 수단으로 생긴 정치상의 큰 변동’으로 풀고 있다. 일반적으로 혁명은 긍정적, 쿠데타는 부정적으로 인식되는데, 정변은 의도나 성격에 따라 둘 중 하나일 수 있다는 뜻이다.


5.16 군사정변의 주역들에게 이 사건은 혁명이었다.

  혁명은 ‘헌법의 범위를 벗어나 국가 기초, 사회 제도, 경제 제도, 조직 따위를 근본적으로 고치는 일’이다. 한국 현대사에서 혁명이라는 이름에 값하는 최초의 사건은 4.19였다. 5.16 주도 세력은 바로 그 4.19혁명을 계승하겠다면서 자신들의 거사를 합리화했다. 그들은 4.19 정신을 저버린 기성정치의 부패와 무능을 응징하고 혼란을 바로잡기 위해 일어났다고 주장했다. 반공을 국시의 제1로 삼고 구악(舊惡)을 일소하며 경제를 재건한다는 등의 다섯 가지 혁명 공약도 발표했다.

  실제로 5.16 직후에는 적지 않은 국민이 이를 반겼다. 심지어 4.19혁명의 주도 세력 중 하나였던 서울대 총학생회도 지지 성명을 냈다. 혁신계 신문인 <민족일보>의 조용수 사장, 민족주의 계열 잡지인 <사상계>의 장준하 사장도 우호적인 반응을 보였다. 이처럼 진보 세력 일각에서 5.16을 반긴 것은 4.19혁명 이후 선거를 통해 집권한 민주당의 제2공화국 정부가 기대를 저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5.16 주도 세력이 혼란을 극복하고 4.19혁명의 정신을 되살리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그러나 박정희 소장은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그는 군으로 돌아가겠다는 약속을 뒤집고 거사 초기에 취했던 일련의 혁신 조치를 거둬들였다. 그가 군복을 벗고 정치인으로 변신하면서 만든 민주공화당은 정치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온갖 비리를 저질렀다. ‘신악(新惡)이 구악을 뺨친다.’라는 말이 나도는 가운데 박정희 정권은 4.19혁명의 정신과는 정반대의 길로 내달렸다. 서울대 총학생회는 다시금 반독재 투쟁의 험난한 길로 나서야 했고, 조용수 사장과 장준하 사장은 기대를 저버린 반혁명 정권에 맞서다 목숨을 잃어야 했다.

  약속을 깨고 대통령이 된 박정희는 1979년 10월 26일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쏜 총탄에 목숨을 잃을 때까지 권좌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그의 죽음과 함께 ‘5.16혁명’이라는 이름도 공식적인 재평가의 대상이 되었다. 혁명의 반대편에 있는 정변의 또 다른 측면, 즉 쿠데타가 5.16의 의도와 성격을 올바로 규정하는 이름으로 제기되었다. 체제의 변혁을 의미하는 혁명과 달리 쿠데타는 ‘지배 계급 내부의 단순한 권력 이동으로 이루어지는 정권 찬탈’이다. 역사가 증명하는 5.16 군사정변은 결코 4.19를 계승해 사회 변혁을 이루어낸 혁명이 아니었다. 그와 반대로 4.19혁명이 초래한 지배 계급의 위기를 무력으로 해소하고 권력을 찬탈한 쿠데타였다는 사실이 한국 사회의 전진과 함께 나날이 분명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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