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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눈뜸’을 암시해주는 재난의 서사

사라마구의 「눈먼 자들의 도시」

글  유성호 문학평론가(한양대학교 국문과 교수)



일상의 평범함이 자명하게 저절로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재난과 문학

  최근 우리는 자연적, 사회적 재난을 숱하게 겪으면서 그것을 극복해야 하는 순간을 빈번하게 맞고 있다. ‘재난’이란 뜻하지 않게 생긴 변고나 천재지변으로 생긴 불행한 사고를 뜻한다. 얼마 전 호주에서 큰 산불로 수많은 목숨이 사라져간 것이 자연적 재난이라면, 세월호 사건이나 일본 후쿠시마 원전 유출 등은 인공이 가미된 사회적 재난일 것이다. 지금 우리가 겪는 ‘코로나19’ 사태는 이러한 자연적, 사회적 재난이 합쳐진 총체적 재앙이다. 이 혹독한 위기는 우리에게 인간의 왜소함과 무력함을 가르쳐주고, 그럼에도 인간의 지혜와 용기로 이 사태를 이겨나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 과정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공포와 초조는 어느새 평범함에 대한 간절함으로 바뀌면서 인간에게 중요한 것이 한없는 겸손임을 암시해준다.

  카뮈의 「페스트」(1947)는 재난을 당하고서도 강인한 의지를 잃지 않는 인간의 존엄성을 담아낸 소설이다. 작가는 가혹한 현실 앞에서 희망을 잃지 않는 것이 인간의 진정한 저항임을 역설한다. 이 작품의 의미는 ‘페스트’와 싸우는 인간의 사랑에서 찾을 수 있다. 그들이 펼쳐가는 악에 대한 저항과 인간들 사이의 공감 능력은 카뮈가 추구했던 문학 정신이기도 했을 터이다. 이처럼 작가는 재난의 원인을 인간의 과잉 욕망에서 찾음으로써 우리에게 반성적 사유를 강하게 요청한 바 있다.


육체의 질병에서 정신과 영혼의 타락으로

  사라마구의 장편소설 「눈먼 자들의 도시」(1995)는 살아 있는 것들의 욕망에 관한 극한의 드라마를 통해 무섭도록 생생한 리얼 판타지를 보여준다. 노벨문학상을 받은 포르투갈의 소설가이자 언론인인 그는, 가난한 농부의 집에서 태어나 기능공, 번역가, 기자 등을 거치며 삶과 문장을 충실하게 배웠다. 눈에 보이는 세계에 갇히지 않고 초자연적 요소까지 수용하는 거대한 상상력을 특징적으로 보여주는 작가로 유명하다.

  「눈먼 자들의 도시」는 한 도시의 시민 거의가 알 수 없는 이유로 집단 실명하면서 빠른 속도감으로 몰락해가는 인간 사회를 담아낸다.

  「눈먼 자들의 도시」는 한 남자가 도로에서 신호를 기다리다가 눈앞이 하얘지면서 눈이 머는 장면에서 시작된다. 그를 만난 사람들도 연쇄적으로 실명하게 되고, 이제 집단 실명은 전염병이 되어 사람들에게 크나큰 불안과 공포를 가져다준다.

  정부는 사람들을 격리하여 전염 확산을 막아보려 한다. 남자를 치료한 의사의 아내는 눈먼 남편을 위해 자신이 실명한 것으로 속이고 격리시설로 자발적으로 들어간다. 거기서 그녀는 군인들에 의한 살육과 악인들에 의한 약탈과 폭력이 얼룩진 세계를 목도한다. 육체의 질병은 어느새 정신과 영혼의 타락으로 몸을 바꾼 것이다. 그녀는 눈먼 사람들을 데리고 그곳을 탈출하여 돌아오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눈먼 자들은 하나씩 시력을 회복하지만, 정작 그녀는 눈앞이 하얘지는 것을 느끼면서 이야기는 끝이 난다.


눈이 멀고 볼 수 있는 세계와 눈뜨고도 못 보는 세계

  이 탁월한 재난 소설은 ‘눈멂’과 ‘눈뜸’의 의미를 역전시키면서 우리에게 눈이 멀고서야 비로소 볼 수 있는 세계와 눈을 뜨고도 못 보는 세계가 있음을 알려준다. 그것은 바로 ‘평범함의 소중함’일 것이다. 우리는 나날의 일상에서 평범하게 일을 하고 사랑을 하고 휴식을 한다. 하지만 그 평범함이 자명하게 저절로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눈 밝은 이들에게만 보이는 ‘위대한 축복’이라는 것을 이 소설은 우리에게 전한다. ‘진정한 눈뜸’을 암시해주는 우뚝한 재난의 서사가 아닐 수 없다.

  바이러스와 싸우는 동안 어느새 봄이 와버렸다. ‘봄(spring)’은 원래 ‘봄(seeing)’이 아니던가. 이 봄에, 우리는 중요한 것을 제대로 볼 줄 알아야 한다. 김수영은 「공자의 생활난」(1945)에서 “이제 바로 보마”라고 했고, 랭보도 현상 너머를 볼 줄 아는 ‘견자(見者)’가 되고자 하지 않았던가. 재난의 파국에 대한 윤리적 성찰을 수행한 「눈먼 자들의 도시」는 우리로 하여금 ‘평범함의 소중함’을 ‘바로 보게끔’ 해준다. ‘눈멂’은 ‘눈뜸’의 반대말이 아니라, ‘진정한 눈뜸’을 위한 불가피한 과정임을 알아가게끔 해주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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