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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기생충’을 통해 본 빈부격차

글_ 김석수 경북대학교 철학과 교수



  흔히 기생충(寄生蟲)이라고 하면 다른 생명체에 달라붙어 살아가는 생명체를 의미한다. 사실 모든 생명체는 홀로 살아갈 수 없다. 즉 모든 생명체는 저마다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 다른 존재로부터 무언가를 획득하고 섭취해야 한다. 우리 인간도 이 점에서 예외일 수는 없다. 그렇지만 이런 획득과 섭취가 부당하게 이루어져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우리 인간의 역사에는 정당한 방식으로 노력하지 않고 남의 것을 획득하며 살아온 삶, 즉 기생(奇生)의 삶이 존재해왔다. 힘이 정의인 사회에서는 더더욱 그런 삶이 많이 존재해왔다. 아니 정의가 중시되는 사회에서조차도 이 정의 게임에 참여하기를 거부하거나 참여할 수 없는 존재들은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 이 기생의 길을 선택해왔다. 

  그러나 힘이 정의를 지배하거나 기생이 존재하는 사회는 정글의 사회일 수밖에 없으며, 그 속에 살아가는 구성원들도 야만성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강인한 힘이든 비열한 힘이든 힘을 통해 생명을 유지하려는 사회는 서로가 인격체로 살아가기 어려운 사회이다. 누구나 인격체로 존중받는 존재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각자가 자신의 것을 정당하게 취득하고 소유하는 정의를 확립해야 한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영화 ‘기생충’은 이런 기대에서 벗어나는 가족들의 비애를 다루고 있다. 이 영화는 시장이 지배하는 경쟁 사회에서 추락한 기택네 가족이 최첨단 과학기술 사회의 능력자 박 사장네 가족에 기생하면서 발생하는 자본주의 사회의 비극을 다루고 있다.

  이 영화는, 마치 헤겔이 자신의 『법철학』에서 가족과 시민사회의 변증법적 대립 관계를 잘 보여주고 있듯이, 정서적 연대가 강하게 작동하는 가족과 치열한 생존 논리가 작동하는 시민사회 사이에 전개되는 분열과 파괴의 과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반지하의 삶에 묶인 가족과 고급저택의 삶을 누리는 가족 사이에는 넘어설 수 없는 장벽이 존재하고 있다. 이 장벽은 두 집 사이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대저택 내부의 지하와 지상 사이에도 존재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 처해 있는 이들 가족 사이의 차이는 단순한 경제적 차이를 넘어 문화적 차별로까지 이어진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바로 ‘냄새’다. 박 사장이 견디기 어려워하는 냄새, 그의 가족들이 특별하게 느끼는 반지하 인생의 냄새, 이 냄새는 도무지 수용하기 어려운 불쾌한 냄새다. 이 냄새는 부르디외(Pierre Bourdieu, 1930~2002)의 주장처럼 이들 가족들 사이에 서로를 구별 짓는 아비투스(habitus, 특정한 시간과 장소에 따라 내면화된 성향의 체계)로 자리하여 문화적 차별을 낳는다.


우리는 인간 존엄성을 구현하는 소극적 차원의 정의 사회를 넘어
타자의 가난과 고통을 섬세하게 바라보고 배려하는 적극적 차원의
연대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경제적 차이를 넘는 문화적 차별을 극복하려면

  오늘날 우리는 경제적 차이를 넘어 문화적 차별을 겪고 있다. 그런데 이런 차별은 인간의 자존심에 손상을 주어, 냄새가 살인을 부르듯, 우리 사회를 위험사회로 내몰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차별의 문화를 극복해야 한다. 그런데 이는 정의의 문화만으로는 가능하지 않다. 정의는 기본적으로 권리담론에 기초하고 있다. 즉 정의는 각자가 자신의 몫을 정당하게 취득하고 소유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 이런 정의 문화만으로는 능력 차이에서 비롯되는 소유 차이와 이로부터 비롯되는 차별의 문화를 쉽게 극복할 수 없다. 우리는 인간 존엄성을 구현하는 소극적 차원의 정의 사회를 넘어 타자의 가난과 고통을 섬세하게 바라보고 배려하는 적극적 차원의 연대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정의 중심의 사회는 타인의 권리와 존엄성을 부당하게 침범하지는 않지만, 소수자와 약자에 작동하는 배제의 폭력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정의 중심의 사회가 낳는 경제적 차이가 문화적 차별로 이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즉 냄새가 사람을 살해하는 상황으로까지 이어지는 비극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소수자 및 약자와 함께 살아가는 좀 더 적극적인 배려 사회를 일구어내야 한다.

  다른 한편 정의 사회에 밀려난 구성원들도 자신들의 어려움을 기생의 방식으로 해결하려는 부당함을 지양할 수 있어야 한다. 물론 이 기생의 삶이 가진 자의 성공 중심의 삶과 결코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 영화에서도 보여주듯이 성공을 향해 끊임없이 계단을 오르는 자와 여기에서 밀려나 계단 아래로 떨어져 지하로 추락해야 하는 자 사이의 삶의 처절한 아픔이 자리하고 있다. 여전히 우리 사회에는 개인이든 집단이든 자신들의 이익과 성공에 몰입한 나머지, 이로부터 비롯되는 타자의 고통을 더 깊이 고뇌하지 못하는 이기주의가 작동하고 있다. 이는 국가 명령사회와 시장 경쟁사회를 급진적으로 겪으며 살아온 우리 사회에 암초처럼 자리하고 있는 유사공동체주의(집단이기주의)와 유사자유주의(개인 이기주의)의 여진이 아닐 수 없다. 이제 우리는 자유주의가 중시하는 합리적 개인의 자율성과 공동체주의가 강조하는 공감적 개인의 연대성을 함께 조화시켜내는, 그래서 서로 화이부동(和而不同)하는 무지개의 나라를 만들어야 할 것이다. 이럴 때에만 비로소 우리는 차별을 낳는 아비투스를 극복할 수 있으며, 또한 이 아비투스로부터 비롯되는 가족들 사이의 비극도 지양해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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