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 이달의 기사 전체보기

이념에 사로잡힌 인간의 광기, 그리고 상처의 치유


글_ 홍정선 인하대 한국어문학과 교수(전 『문학과지성사』 대표)




『노을』은 갑수라는 소년의 시선에 비친 6·25를,
아니 아버지의 행태와 그로 말미암은 가족의 수난을 정밀하게 그려낸다.



  김원일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집요하게 그리고 누구보다 깊이 있게 분단문제를 다룬 소설가이다. 그는 소설가로서의 삶 대부분을 6·25 전쟁과 이념의 대립 문제를 다루는 데 바쳤다. 특히 6·25 전쟁과 이념의 대립이 개인의 삶을 파탄시키고, 고통스런 기억에 시달리게 만드는 모습을 그리는 데 바쳤다. 그것은 그의 가족과 그 자신에게 덮어씌워 진 악몽 같은 아버지, 남로당 간부였던 아버지 때문이다. 그 기억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아버지를 아버지로 인정하기 위해 김원일은 평생동안 고통스럽게 소설을 썼다.

  김원일이 쓴 수많은 분단소설 중에서도 『노을』은 단연 뛰어난 작품이다. 우리나라에서 이 소설만큼 인간과 이념의 관계를, 아니 이념적 망상에 선동당한 인간의 모습을 생생하게 그리고 있는 소설은 달리 없다. 회상의 형식을 취하고 있는 이 소설에서 소설가는 자신이 유년기에 겪어야 했던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바탕으로 갑수라는 소년의 시선에 비친 6·25를, 아니 아버지의 행태와 그로 말미암은 가족의 수난을 정밀하게 그려낸다.


김원일의 『노을』, 가족의 수난기로 그려낸 6·25
  이 소설에서 주인공의 아버지는 공산주의에 대해 제대로 아는 것이 없는 사람이다. 그는 이성적인 인간이 아니라 본능적인 인간이었고 오랫동안 가족과 이웃에게 폭력을 밥 먹듯 휘두르는 인간망종으로 살아왔다. 직업이 백정인 아버지의 별명은 그래서 ‘개삼조’이다. 그런 그가 어느 날 갑자기 완장을 찬 공산주의자로 돌변했다. 그가 당당하게 “부자와 가난뱅이 차밸 없어지는 시상이 되고, 양반 상늠 차밸 않고, 똑같이 일하고 똑같이 나나 묵는다 카는 기 공산주의”라고 떠벌리고 다니는 세상이 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배선상도 장선상도 내한테 똑같은 말을 배아줬다”는 그의 말에서 알 수 있듯 자신의 생각이 아니라 지식인들이 본능적 인간에게 주입한 망상이다. 그것이 망상이라는 것은 아버지가 주인공에게 하는 다음과 같은 말에서 알 수 있다.


  갑수야 인제 쪼매마 있어봐라. 애비가 구루마에 쌀 수십가마를 져다 날을 테이께. 그리고 이런 돼지우리 같은 집에서 안 살게 될 끼 데이. 김상조 동무가 근사한 기와집에서 내 보란 듯 딩까딩까하며 안 사는가 두고 봐라.


  이 같은 망상에 사로잡혀 아버지는 6·25 전쟁기에 인민의 대표라는 완장을 차고 가축을 도살하는 백정이 아니라 반동을 때려잡은 무자비한 인간 백정이 된다. ‘혁명의 영웅’이라고 떠받들어 주는 지식인들의 꼭두각시가 되어 핏발이 곤두선 눈으로 광란의 춤판을 벌인다. 그래서 주인공의 유년기에 각인된 아버지의 얼굴은 공포 그 자체이다. 가족들에게, 특히 어머니에게 수시로 자행되는 순사들의 문초와 매타작을 가져온 재앙의 얼굴이며, 29년 전의 어느 여름날 주인공이 ‘개만도 몬한 자슥’이라고 욕설을 퍼부었든 얼굴이며, “죽어뿌려. 총알 맞아 뒈져 뿌려! 이제 우리 앞에서 영영 사라져뿌려!”라고 마음속으로 소리쳤던 얼굴이다. 그 때문에 주인공에게 아버지는 반드시 없어져야 할 기억이다. 한사코 표면으로 떠올라 오지 못하게 꼭꼭 밟고 있어야 할 두려운 기억이다.


잘못된 이념이 불러온 비극을 고발하다
  김원일의 『노을』은 그러한 아버지의 모습을 삼촌의 죽음을 계기로 다시 떠올리게 되는 이야기이다. 이념에 휩쓸린 인간의 모습과 그 후유증을 어렵게 다스리고 치유해 나가는 한 가족의 안쓰러운 모습을 생생한 사실성으로 그려내고 있는 소설이다. 어떤 특정한 이념에 대해 비판을 하거나 부정하는 소설이 아니라, 제주도의 4·3 사건과 6·25 전쟁 시기 수많은 비이성적 살상이 말해주듯, 이념이 우리 인간을 잘못된 방식으로 추동할 때 일어나는 비극을 고발하고 증언하는 소설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소설은 주인공이 유년기의 고향, 아버지의 얼굴로 상징되는 끔찍한 어둠과 벌이는 사투이다. 그 기억과 정면으로 맞서서 견딜 수 있는 상태에 도달하기까지의 기록이다. 이런 점에서 주인공이 삼촌의 죽음을 계기로 고향으로의 여행길에 오르는 것은 이제 어둠의 공포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한 일종의 통과제의적 절차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이 소설의 다음과 같은 마지막 장면은 소설적 의미에서뿐만 아니라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그릇된 이념적 갈등에 시달리고 있다는 측면에서도 의미심장하다. “지금 노을 진 차창 밖을 내다보는 현구 눈에 비친 아버지 고향도 반드시 어둠을 기다리는 상처 깊은 고향이기보다, 내일 아침을 예비하는 다시 오고 싶은 아버지 고향일 수 있으리라.” 이념에 구애되지 않고 행동하는 새로운 세대를 보며 주인공이 참으로 힘들게 도달한 이런 생각의 전회에 우리 모두가 도달할 수 있다면 앞으로 남과 북의 관계도 크게 달라질 것이다.

열람하신 정보에 만족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