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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근본적 불안이 낳은 점술문화

글_ 김석수 경북대학교 철학과 교수

 

불안한 사회일수록 마력에 휩쓸려
칸트 비판철학, 믿음과 법칙 세계 구분
안정감과 도덕적 삶에 기여하는 역할 기대

 


  새해가 되면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의 한 해 운세를 알아보려고 한다. 올해는 황금돼지의 해여서 더 더욱 그럴 것 같다. 이런 운세를 점보는 일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줄곧 있어왔다. 서양의 점성술에도, 동양의 역학에도 그 전통이 자리하고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왜 이렇게 점을 치며 살아갈까? 아마도 이는 인간이 처해있는 존재 상황이 근원적으로 불안을 안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인간은 이 세상에 올 때 이미 자신이 마주하고 있는 존재로부터 낯설음을 경험한다. 자유를 갈망하는 우리 인간은 이 낯설음이 안겨주는 불안을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

 

첨단과학 시대와 점술문화의 공존  
  그래서 인간은 이 불안을 극복하기 위해서 자신이 마주하고 있는 세계에 대해 예측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한다. 이를 위해 인간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세계에 대해서 일정한 법칙을 찾아내거나 법칙을 설정하려고 한다. 인간의 이런 법칙 지향적 삶은 불안이 해소될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유한한 이상, 이 법칙 설정에 대해서도 한계를 자각할 수 있어야 한다. 인간이 자신의 한계를 자각하지 못한 채 과도하게 법칙을 설정하려고 하면, 오히려 이로부터 우리는 더 큰 어려움에 직면할 수도 있다. 실제로 우리 인류의 역사는 이런 어리석음을 낳기도 하였다. 우리는 하나의 믿음으로 여겨야 할 형이상학적 원리를 마치 과학적 법칙인양 절대화하여 많은 사람을 부당하게 구속한 어두운 역사를 잘 알고 있다. 불안이 가중되는 사회일수록 이런 현상은 더욱 더 심해지기 마련이다. 이런 사회일수록 예언자를 기다리며, 그의 마력에 휩쓸리는 경향이 높아진다.
  그래서 인간의 자유와 존엄성을 제대로 마련하려고 했던 저 유명한 서양의 철학자 칸트도 형이상학적 독단이 낳은 비애를 벗어나기 위해 비판의 칼을 들었다. 그의 비판철학은 형이상학적 질서원리와 과학적 법칙을 더 이상 혼동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려고 하였다. 그는 보통의 인간과 달리 초능력을 가진 어떤 자가 직관할 수 있는 또 다른 가능성을 부정하지는 않았지만, 이것이 공유 가능한 지식으로 전환되어 학문 형세를 하는 것에 대해서는 강력하게 비판하였다. 즉 그는 인간이 인식할 수 있는 법칙 세계와 그렇게 할 수 없는 믿음 세계를 엄정하게 구분하는 비판의 길을 추구했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종교가 과학을 지배하거나 과학이 종교를 지배하는 것을 경계하려고 하였다. 사실 인간은 이들 중 어느 하나만으로 살아가기가 쉽지 않다. 종교의 과다한 지배는 인간을 무력한 존재로 전락시킬 위험이 존재하며, 과학의 과도한 맹신은 인간을 오만한 존재로 경도시킬 우려가 도사리고 있다. 오늘날 현대사회에서는 이 후자의 현상이 심해지는 것을 우려하는 목소리들이 적지 않게 나타나고 있다.
  그렇지만 21세기 첨단과학 시대인 오늘날에도 여전히 우리의 삶을 맴돌며 우리에게 영향을 주고 있는 점술문화가 존재하고 있다. 우리는 이 점술문화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이것이 현대과학이 강조하는 합리성에서 벗어나있기 때문에 무가치한 것으로 배격해야 하는가? 아니면 과학의 한계를 넘어 새로운 전망을 제공하는 가능성으로서 이를 수용해야 하는가? 점술문화는 한편에서는 비판정신의 부재로 인간의 삶을 비합리적이게 만들 수도 있으며, 다른 한편에서는 인간을 더 안정적이고 도덕적이게 만들 수도 있다. 우리가 전자로 경도되지 않기 위해서는 역술 풀이를 통해 미래의 운세를 점치는 활동이 우리의 미래를 확정하는 결정론으로 이어지는 것에 대해서는 주의를 해야 한다. 우리의 미래가 이미 결정되어 있다면, 우리에게 미래는 아무런 노력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이 되어버린다. 노력 안 해도 잘 되게 되어있고, 노력해도 잘 되지 않게 되어있다면, 우리는 미래와 관련하여 아무것도 할 것이 없다. 이런 결정론적 사고는 우리를 나태하게 만들거나 무력하게 만들 수 있다.

 

형이상학적 욕망을 도덕적 차원으로 승화
  그러므로 운세를 점치는 일이 결정론으로 귀착되는 점에 대해서는 신중을 기해야 한다. 이 세상에 신의 섭리가 작용하더라도, 이를 자연과학자들이 탐구하듯이 법칙으로 확정하기는 어렵다. 이를 확정한다는 것은 인간을 절대화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누군가에게 이런 절대권을 허용한다면 우리는 모두 그를 맹종하는 상황에 처하게 될 것이다. 운세를 점보는 일에 대한 무반성적 수용이나 기복적 맹신은 우리를 미몽 상태로 되돌려놓게 될 것이다. 물론 이를 잘 수용한다면, 이는 우리 삶에 긍정적으로 기여할 수 있다. 이 운세를 점보는 일은 인간의 나약한 마음에 안정을 찾게 해주고, 또한 도덕성을 갖추고 경건하게 살도록 만들어 준다. 그러나 이것이 제대로 가능하기 위해서는, 전체를 확정지으려는 형이상학적 욕망의 마력화로부터 우리를 잘 지켜낼 수 있어야 한다. 나아가 우리는 이를 도덕적 차원으로 승화시켜낼 수 있어야 한다.
  인간은 분명히 과학의 법칙에 한정된 존재로만 살아가지는 않는다. 즉 인간은 생리법칙이나 심리법칙에만 묶여 사실세계에서만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어떤 의미와 가치를 추구하며, 또한 이를 통해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는 목적의 나라를 지향하는 존재이다. 이런 면에서 인간은 자연과학적 법칙을 넘어 형이상학적 원리를 추구하는 존재이다. 과학의 엄청난 발전이 이루어진 오늘에도, 심지어 인공지능 시대가 다가온 오늘날에도 인간은 여전히 과학으로 풀 수 없는 운명에 귀를 기울인다. 아직도 이사를 가거나 결혼을 하면 사람들은 날을 잡고 또 방향을 고민하며, 장례를 치를 때도 조상의 묘 자리를 놓고 고민에 빠진다. 이처럼 인간은 여전히 지성의 한계 속에서 살아간다. 이처럼 지성만으로 살아갈 수 없는 게 인간의 삶이라면, 지성 바깥의 신의 섭리를 알아보려는 일은 우리 삶에서 결코 제거할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하다. 따라서 우리 인간은 점성술과 역술을 통해 운세를 점치는 것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를 비과학적이라고 배척만 할 것이 아니라, 이것이 삶에 긍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는 길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운세를 점보는 일이 때로는 우리에게 희망을 안겨주고 때로는 조심해서 경건하게 살 수 있도록 해주는 역할로 이어지게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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