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교육
‘부캐’ 열풍, 여러 가면을 쓰는 사람들

글 _ 김종엽 강릉원주대 초빙교수

  ‘부캐’로 표현되는 멀티 페르소나가 새로운 사회적 현상으로 안착했다. 사회적 현상은 대중의 공감으로 꽃을 피운다. ‘본캐(본래 캐릭터)’와 ‘부캐(부캐릭터)’의 구별은 원래 온라인 게임 분야에서 출발한 용어였다. 그 후 유명인의 손을 타면서 생활 부분으로 그 의미가 확대됐다. 예능 프로그램에 등장한 마미손, 유산슬, 린다G 등은 부캐 열풍을 앞에서 이끌었다. ‘부캐 유니버스’라는 신조어가 등장할 정도로 한국 사회에서 그 위세가 당당하다. 살아 있는 언어란 사회현상을 담아내는 그릇과도 같기에 신조어의 등장이 부담스럽지는 않다.


  부캐 열풍은 현대인의 당연한 권리 행사일까, 아니면 여느 때처럼 거품처럼 사라질 일시적 현상에 불과할까? 멀티 페르소나는 두 질문을 동시에 품을 수 있는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 먼저 사태를 있는 그대로 들여다보자.


첫째, 멀티 페르소나는 현대사회를 진단할 수 있는 단면이다.

  시대가 달라졌다. <공감의 시대>의 저자 리프킨(J. Rifkin)의 표현에 따르면, 현대는 집단 공감을 나누는 시대이다. 현대인은 자신이 직접 쓴 대본의 배우가 되어 동시대를 살아가는 20억의 다른 배우와 함께 글로벌 무대를 공유한다. 작품의 배역에 따라 자유롭게 변신하는 페르소나는 충분히 매력적이다. 배우 의식은 경제 분야의 변화에도 충분히 적용될 수 있다. 멀티 페르소나는 ‘긱 이코노미(Gig Economy·비정규 프리랜서 근로 형태가 확산되는 경제 상황)’의 전성시대를 예고한다. 노동 개념의 무게중심이 본캐 위주인 직업에서 역량 중심인 프리랜서로 이동할 것이다. 각 페르소나는 본업에 얽매이지 않는 독립성과 프로젝트로 세분화된다.


둘째, 부캐 열풍은 일상으로부터의 탈출구로 그 역할을 드러내고 있다. 

  물론 일탈은 아니다. 생활 무대가 넓어지면서 ‘바쁘다 바빠 현대사회’가 또 다른 사회적 코드로 등장하였다. 열정, 노력, 용기, 긍정적 마인드로 무장한 본캐는 하루가 다르게 지쳐갔다. 베스트셀러 도서 주제가 성공, 자기계발, 사회적 능력에서 힐링, 미니멀리즘, 워라밸로 이동한 배경이다. 멀티 페르소나, 즉 다양한 부캐로 활동하는 동안만큼 우리는 본캐로부터 오는 삶의 무게를 잠시 내려놓을 수 있다. SNS에서 다양한 계정을 만들어 요리, 음악, 반려동물 등 타인과 작은 관심사를 공유하고 소통하며 지친 본캐를 위로한다. 부캐는 본캐에게 회복 탄력성을 부여하는 은밀한 휴식처가 되었다. 


셋째, 멀티 페르소나는 현대인의 정체성 변화와도 관련이 있다. 

  프랑스 철학자 들뢰즈(G. Deleuze)는 특정 가치와 삶의 방식에 포획되지 않고 끊임없이 새로운 자신을 창조하는 현대인을 ‘노마드’, 즉 도시의 유목민으로 표현한 바 있다. 도시어부, 도시농부, ‘차박 여행(차에서 숙식하며 즐기는 캠핑)’까지 유목민의 코드가 확실히 현대어로 부활하였다. 자신의 경험과 주관만을 고집하는 고독한 주체는 ‘꼰대 정신’을 벗어나기 어렵다. 꼰대의 문제는 생각의 고루함에 있지 않다. 외로운 주체가 정박하고 있는 시간과 공간은 자신이 세운 위계질서에 의해 고착되어 있다. 그 속에서 타인에게 특정한 질서를 강요한다. 폭력의 근원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유형의 ‘중심주의’는 꼰대 정신의 발현이다. 그 대상이 인간일지라도 말이다. 꼰대 정신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등장할 수 있다.


멀티 페르소나는 이제 사회적 현상이 되었다

  대중의 공감을 통해 꽃을 피우고 그 화려함을 연장한다. 그동안 중심부에 눌려 주변부에만 맴돌던 삶의 자그마한 자락이 척박한 땅을 뚫고 피어난 형태라 그 꽃도 퍽 아름답다. 멀티 페르소나가 자아의 분열이 아니라 사회적 매력으로 지각되는 이유이다. 하지만 언젠가는 초라하게 지는 날도 올 것이다. 그때가 언제일까? 당연히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많을 때이지 않을까.


  페르소나는 사회적 가면에 어원을 둔 용어이다. 지금도 여전히 그러하다. 사회적 가면은 중요하다. 그러나 페르소나가 선택할 수 있는 자아실현의 폭은 무제한이 아니다. 본캐가 자아의 전부가 될 수 없듯, 부캐도 역시 그러하다. 사회적 가면은 이미 정해진 시나리오에 따라 움직일 가능성이 크다. 이때 가장 큰 유혹은 아마도 대중의 관심, 즉 흥행이 될 것이다. 클릭 수에 목을 매는 기자, 구독자에 목숨을 거는 유튜버, 유권자의 표에 인생을 거는 정치인, 모두 특정 페르소나에 빙의된 결과이다. SNS 중독, 디지털 허언증, 인정 강박증은 좀비 페르소나이다.


  개인은 멀티 페르소나로 살아갈 권리가 있다. 그러나 우리가 멀티 페르소나를 ‘위해서’ 살아갈 수는 없다. 이 차이를 놓치면, 삶이 그대를 속여서 슬퍼하거나 노여워하게 된다. 페르소나는 반드시 우리를 떠날 것이기 때문이다. 상실의 시대는 멀티 페르소나의 어두운 이면이 될 수 있다. 페르소나와의 사회적 관계에서 오는 자존감 하락, 공황장애, 우울감은 종종 정체성의 빈곤을 집요하게 파고든다.


인생은 연극과도 같다 

  근대 영국의 극작가 셰익스피어의 선견지명이다. 다양한 배역을 맡을 수 있는 세상이 열린 것은 고무적인 현상이다. 부캐 열풍이 지속가능한 이유이기도 하다. 각자의 꿈이 특정 페르소나에 맞춰지는 것도 용인될 수 있는 현상이다. 그런데 연극의 생명이 작품성에 있다는 사실에 유의해야 한다.


  우리는 각자 자신의 방식으로 시간의 바다를 건너고 있다. 매 순간 우리는 타인과 페르소나로 만난다. 사회적 관계가 곧 페르소나와의 만남이다. 그러나 “인간은 천 개의 페르소나를 지니고 있으며, 상황에 따라 적절한 페르소나를 쓰고 관계를 이루어 나간다.”라는 현대 분석 심리학자 칼 융(C. Jung)의 지적은 그저 무미건조하게 들릴 뿐이다. 우리에게는 그 관계맺음에서 한발 더 나아갈 수 있는 정서가 필요하다. 바로 자신의 내면에 감춰진 또 다른 자아를 바라볼 수 있는 용기를 말한다. 그때야 비로소 우리는 부캐가 자신의 방식으로 시간의 바다를 건너는 각자의 권리임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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