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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상을 선물하는 땅, 서천

글_ 강지영 명예기자(수필가)

사진_ 김경수 포토그래퍼



[ 신성리 갈대밭에서 바라본 금강 ]

  잎 진 나무는 회갈색으로 옷을 갈아입고 소슬거리는 바람은 겨울의 도래를 알려온다. 찬 계절이 완연해지기 전에 바람의 울림을 귀에 담아 둬야겠다. 가을의 끝자락이 남아있는 청량함으로 시끄러운 귀를 잠재워야겠다. 숨 고르기가 필요한 연말, 월동 준비를 위해 서천으로 간다. 비상하는 새의 몸짓을 눈에 담을 수 있는 곳, 서걱거리는 갈대 소리를 가슴에 흩뿌릴 수 있는 곳, 고요히 밀려왔다 밀려가기를 반복하는 파도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곳, 12월의 여정은 서천이다.

  금강 강줄기를 벗 삼아 펼쳐진 갈대밭이 자리 잡은 신성리에 들어선다. 이곳은 폭 200m, 길이 1km, 총면적 250,000㎡ 규모를 자랑하는 신성리 갈대밭은 갈대와 억새, 금강을 한눈에 담을 수 있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바람 소리를 따라 갈대밭으로 간다. 사그락사그락. 기분 좋은 울림이 발길을 붙든다. 소리는 들리는데 눈에 들어오는 사람은 없다. 고개를 돌려본다. 갈대와 억새만 겸연쩍게 하늘거리고 있을 뿐, 바람은 자취가 없다. 흙길 소리, 바람 소리, 갈대 소리, 강물 소리. 자연의 소곤거림을 따라 발을 옮긴다. 의미도 알 수 없고 출처도 불명확한 이 울림이 왜 이토록 따뜻하게 느껴지는 것인지. 찬 겨울바람에서 왜 따뜻한 훈기가 느껴지는 것인지. 갈대와 더불어 걸으며 이 빔(空)이 그리웠음을, 소리 없는 소리가 빚어내는 울림이 절실했음을 뒤늦게 알아챈다. 갈대 바람에 안겨서야 한 해가 지나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한다. 갈대밭에 펼쳐진 지난 시간이 고이 가라며 손 인사를 건네온다. 핑 도는 눈물을 삼키며 인사를 건넨다. 값진 추억으로 내년에 다시 만나자며.




  갈대밭을 나와 이른 곳은 한산모시 마을이다. 모시 나뭇가지 껍질로 만드는 모시는 통일신라 시대 때부터 직조된 것으로 현재는 중요무형문화재 제14호에 이름을 올려두고 있다. 까다로운 공정과 번거로운 수작업을 거쳐야 하는 모시 짜기는 그 정성과 전문성으로 인해 2011년 유네스코 무형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바야흐로 한산모시가 단순한 옷감 제조를 넘어 예술로 승화되고 있는 것이다. 염색체험, 침선장 체험, 모시 날기 매기 등이 진행 중인 공예 공방을 둘러 체험관으로 들어간다. 부채 하나를 만들어 들고 모시 짜기와 모시 째기 시연을 눈에 담는다. 전시관에 들어가 옷에 담긴 빛깔과 씨실 날실의 엉김이 빚어내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비단처럼 곱지도 않고 삼베처럼 거칠지도 않은 모시옷에서 투박한 고급스러움을 본다. 전시장을 둘러보며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괜찮다, 시간이 더 걸려도 괜찮다, 품이 많이 들어도 괜찮다, 그게 모시로 거듭나는 길이라면’이라는 속삭임을 듣는다. 이 서툰 건넴에 위안이라는 이름을 붙여두고 다음 목적지로 향한다.


[ 한산모시관 ]



  40여 종 50여 만 마리의 철새가 날아드는 곳으로 알려진 금강하굿둑을 앞에 두고 있다. 철새의 군무를 포착하려 쉴 새 없이 셔터를 누르는 사람들. 그사이에 멍하니 서서 새들의 움직임을 눈에 담는다. 유려한 새들의 춤사위가 자연이 그려내는 붓질이 되어 눈동자에 어린다. 날아올랐다 내려앉고 펼쳐졌다 겹쳐지고 머물렀다 돌진하고. 새들의 날갯짓에는 한계가 없다. 강과 하늘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새들의 춤사위를 마주하고 있자니 가슴이 먹먹해져 온다. 양 날개를 한껏 펼쳐두고 바람에 몸을 맡겨 본 적이 있었던가, 비상이 주는 두근거림을 경험한 적이 있었던가, 모든 걸 내려놓을 각오로 도약을 시도한 적은 있었던가. 방울져 흐르는 눈물 같은 새들의 말을 머금은 채 국립생태원으로 향한다.


[ 금강하굿둑 ]



  수십 개의 축구장 크기의 국립생태원에는 4,500여 종의 동·식물이 살고 있다. 국립생태원은 에코리움, 습지 생태원, 고산 생태원, 사슴 생태원 등 기후를 중심으로 한 생태계를 재현해 놓았다. 에코리움은 열대관, 사막관, 지중해관, 온대관, 극지관의 세계 5대 기후대 생태체험을 할 수 있는 곳으로 여기에서는 2,400여 종의 다양한 동식물을 만나볼 수 있다. 고라니, 담비, 노루, 긴팔원숭이를 친구 삼아 에코리움으로 간다. 상설전시관과 어린 왕자 전시실을 거쳐 열대관으로 들어선다. 보아뱀과 열대 식물들을 눈에 담은 후 목도리도마뱀과 선인장, 사막여우 등이 있는 사막관을 지나온다. 바오밥 나무를 만날 수 있는 지중해관을 거쳐 살모사 등이 있는 온대관에 이른다. 극지관의 자작나무 숲길 너머에서는 펭귄을 만난다. 숨을 고르며 들어선 전시관의 멍들어가는 지구 이야기를 마주하고 서서 상생을 반추한다. 더불어 살아간다는 것은 서로에게 터전이 되어주는 일이지 않을까 하는 자문을 하며 습지 생태원과 고산 생태원, 하다람 놀이터를 지나 생태원을 나온다.


[ 국립생태원 ]


  마지막 여행지는 스카이워크다. 기벌포 해전 전망대로도 불리는 스카이워크는 송림 숲과 바다의 전경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자리 잡고 있다. 허공중 도보의 짜릿함을 선사하는 스카이워크는 시인 하늘길, 철새 하늘길, 바다 하늘길로 구성되어 있다. 느긋하게 송림을 지나 해변을 만난다. 바닷바람이 솔향에 섞여 기분 좋게 코를 간질인다. 바다와 나란히 걸어 이른 스카이워크에서 장관을 선물 받는다. 발아래에는 바다와 땅이 머리 위에는 하늘이 있다. 그리고 해양과 대지와 우주가 만나 새 시간이 시작되는 지점에는 내가 서 있다. 어제까지의 이야기는 일단락되고 내일의 새로운 역사가 쓰일 것이라는 확신이 나를 관통한다. 바다가 되었건 땅이 되었건 하늘이 되었건 시간은 어제와 다름없이 나를 붓 삼아 또 하나의 서사를 써나가리라.

  양팔을 펴고 하늘을 올려다본다. 비상하는 새처럼 바람을 갈라본다. 수평선 가운데서 사지를 쭉 뻗어보는 것, 그것이 숨차게 달려온 나에게 줄 수 있는 선물이 되어 가슴에 안겨 온다. 바닷바람을 맞으며 속으로 이상의 <날개>의 마지막 구절을 중얼거린다. 날개야 다시 돋아라. 날자. 날자. 날자. 한 번만 더 날자꾸나. 한 번만 더 날아 보자 꾸나 라며 값진 선물을 준 서천에 답장을 부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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