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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 동화, 빛이 노래하는 포천

글_ 강지영 수필가(명예기자) 사진_ 이대원 포토그래퍼


 

  선물이 되어 안기는 여행이 있다. 함께 하는 것 자체가 무언의 말이 되어 맺히는 시간이 있다. 찬 바람이 불어오는 2018년의 마지막 달, 젊은 날의 혈기를 잠재우고 중년의 산을 넘어서고 있는 벗들과 함께 포천으로 향한다. 미안하다, 고맙다, 이해한다는 말을 제때 전하지 못해 상처로 남은 순간들을 매만지기 위해 차에 오른다.

 

 허브아일랜드 산타 마을

 


겨울의 빛 축제, 허브아일랜드
  떨어지는 해를 따라 포천으로 달린다. 빛의 섬, 허브아일랜드로 들어가고 있다. 빛과 향의 조합이 선사할 저녁을 기대하며 묵은 이야기로 시간을 채운다. 날은 어두워지고 이야기는 깊이를 더해간다. 산으로 둘러싸인 굽은 길을 지나 산타가 손짓하는 허브아일랜드로 방향을 튼다. 경사진 길을 오른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빛이 번져온다. 어둠 속에서 곱다시 불을 밝혀두고 여객을 기다리고 있는 허브아일랜드다. 검은 산중에서 만난 장관을 앞에 두고 연신 감탄이다. 휘황한 조명이 이렇게 눈을 사로잡는 걸 보니 밤 외출이 예상을 넘어선 멋들어진 선물을 주려나 보다. 매년 11월이면 새 단장을 하고 초대장을 보내오는 허브아일랜드 불빛 동화 축제는 올해로 십 회를 맞았다. 열 살 된 빛의 섬이 여행객을 동화 속으로 끌고 들어간다. 알록달록한 조명과 그리스 신화에 등장할 것 같은 건물과 여기저기서 번져오는 허브향. 풍등이 더없이 멋있었던 영화 라푼젤 속 한 장면에 들어온 듯 기분 좋은 걸음으로 허브아일랜드를 거닌다. 화려한 조명 때문인 걸까. 코끝은 찬데 가슴은 따뜻하다.
  허브아일랜드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역사 전시관을 지나 향초 가게의 아기자기한 소품들을 구경한다. 길목마다 빛이 일렁이고 곳곳에 향이 깃들었다. 향기에 취해 힐링 센터로 향하는 길, 할러윈 호박 앞에서 포즈를 잡기도 하고 신데렐라가 된 듯 호박 마차에도 올라보고 프랑스 마을에도 들어가 보며 잃어버린 동심을 되찾는다.
  힐링 센터가 남긴 빛의 다독임을 곱씹으며 들어선 곳은 허브 식물 박물관이다. 노란 조명을 밝혀둔 박물관이 은은한 향을 내뿜으며 손을 이끈다. 향과 빛, 여객의 온기가 빚어내는 공기가 더없이 포근하다. 이 순간이 푸근하게 느껴지는 것은 밤의 여정을 함께 하는 벗들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향기를 한껏 담고 들어선 곳에 빛을 머금은 산타 마을이 있다. 곳곳에 놓인 산타와 라벤더밭을 메운 조명과 빛으로 만든 터널. 허공을 메우는 노래를 들으며 캐럴이 울려 퍼지는 계절이 왔음을 실감한다. 핑크빛 굴을 나와 12월에는 축복이 가득하기를 하고 소원 종이에 소망을 적어본다. 아기자기하게 꾸민 집들을 따라 걷다 들어선 곳에서 프랑스 상통 인형을 만난다. 아기 예수의 탄생을 기념해 만든 프로방스산 인형이 소박한 경건함을 전해온다. 밤은 더 깊어 있고 빛에 잠긴 산타 마을은 성탄 선물이 되어 품에 안긴다. 긴 이야기가 이어지는 저녁을 또 하나의 선물로 간직하게 되리라.

 허브아일랜드 식물 박물관

 

 

협곡과 절벽이 빚은 절경, 비둘기낭 폭포
  다음 여행지는 비둘기낭 폭포다. 집단으로 비둘기를 키우는 곳이냐는 말에 한바탕 웃으며 차에서 내려선다. 풀 내음과 나무 내음이 섞여 코를 간질이고 들어온다. 겨울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비둘기들이 하나둘 모여든다 하여 비둘기낭 폭포라는 이름을 가지게 된 이곳은 현무암 협곡과 옥색 계곡, 색색의 나무들이 어우러져 장관을 연출하고 있는 포천의 보고(寶庫)다. 절리와 동굴, 현무암으로 둘러싸인 이곳은 천연기념물 제537호로 지정되어 있다. 멋들어진 풍경으로 ‘추노’, ‘선덕여왕’, ‘늑대 소년’ 등의 작품에도 등장한 것으로 유명세를 치르고 있기도 하다. 검푸른 동굴과 바닥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맑은 물과 뽀얀 물안개가 빚어내는 신비감에 젖어 폭포 앞에 섰다. 허브아일랜드와는 또 다른 빛이 가슴을 두드리고 들어온다. 바위와 물, 나무와 협곡이 만들어내는 이 오묘함은 자연의 손을 거쳐서야 완성되는 것이리라. 이 멋진 풍경을 거저 받은 여행객들이 할 수 있는 건 길동무와 손을 맞잡고 이 광경을 눈에 꾹꾹 눌러 담는 것뿐이리라.
  비둘기낭 폭포에서 십여 분 떨어진 곳에 한탄강 협곡을 가로질러 있는 보행교가 있다. 하늘다리로 불리는 다리가 중앙 바닥에 유리로 만든 스카이워크를 설치하여 하늘을 걷는 듯한 느낌을 선사한다. 아찔한 높이에 현기증이 인다. 주춤하며 물러서는 객꾼에게 길 친구가 말을 걸어온다. 두 눈 질끈 감고 발만 내디디면 아무것도 아니니 함께 가자는 소리가 귀를 지나간다. 교각만큼 흔들리는 두 다리를 끌고 한 걸음, 두 걸음 옮겨가는 내 곁에 생의 난관을 무던하게 거쳐온 연륜 있는 벗들이 있다. 어깨를 내주고 손을 잡아주는 이들이 있어 인생은 살아봄 직한 게 아닐까. 흔들릴지언정 멈춰 서지는 않게 되는 게 아닐까. 유약한 나를 마주해가며 이른 하늘다리의 끝, 어깨를 펴고 뜨뜻한 국물로 목을 축인다. 건너지 않았더라면 보지 못했을 풍경이 눈앞에 있다.

비둘기낭 폭포

 

 

전통술과의 고즈넉한 만남, 산사원
  나란히 걸어 한차에 올라 도착한 마지막 종착지는 산사원이다. 어떤 닿음은 우연이 아닌 필연이 되기도 한다. 산사원 관장 배명호와 누룩 틀의 만남이 그렇다. 전통술 빚기를 배우고 있던 관장의 눈에 어느 날 문득 들어 온 낡은 누룩 틀. 이 만남은 훗날 ‘산사원 전통술 박물관’ 건립으로 이어지게 된다. 2002년에 문을 연 산사원은 전시물을 감상하는 것은 물론, 술을 공부하고 음미하며 덤으로 풍경까지 가슴에 담을 수 있는 곳이다. 누룩 틀을 비롯한 주기(酒器)들과 고서적, 술잔과 술병, 소반까지 갖추고 있는 2층 전시장을 천천히 둘러 내려온다. 1층에는 시음장이 있다. 입장권을 끊고 받은 술잔을 들고 테이블로 향한다. 삼면을 둘러 놓여 있는 술로 목을 적신다. 커피 술, 막걸리, 복분자주를 비롯한 수십 종의 술이 혀를 감미롭게 감싸온다. 뜻하지 않은 곳에서 벗들과 함께 기울이는 술잔이 더없이 가볍다. 이 나눔이 이 여행이 주는 마지막 선물이구나 한 것도 잠시, 수령 200년의 나무 두 그루와 500여 개의 술독이 늘어선 세월랑과 드넓은 정원에 가옥과 누각까지 갖춘 전시실 밖의 산사 정원이 여행의 방점을 찍어준다.
 긴 길을 왔음에도 여전히 갈 길이 먼 벗들과의 동행이 남긴 여운이 깊다. 인생이란 거창한 무엇이 아니라, 벗들과 푸른 정원을 거닐며 내일을 준비하는 소박한 행복을 찾아가는 소소한 여정일 것이다. 밤이면 빛과 향기로 어둠을 밝혀주고 낮이면 신묘한 색과 내음으로 얼어붙은 손을 녹여주던 포천이 남긴 두 자, 동행을 가슴에 새긴다.

산사원 정원 술 항아리

 

산사원 전통술 박물관

 

한탄강 보행교 ‘하늘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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