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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고을 광주의 온기
글_ 강지영 명예기자(수필가) 사진_ 김경수 포토그래퍼




  알곡을 늘어뜨린 벼가 마지막 추수를 기다리고 있는 가을의 끝자락이다. 온통 누렇고 벌겋다. 제야의 종을 울린 게 엊그제 같은데 시간이 나를 앞질러 간 것인지 2019년을 어느덧 두 달 남겨두고 있다. 얻은 것과 잃은 것, 정리한 것과 시작한 것, 더해갈 이야기와 묵은 이야기. 지난날을 반추하며 새해의 밑그림을 그려야 할 때다. 오늘을 다지며 내일을 꿈꿀 시간이 거저 주어지지는 않을 터. 일상의 여백을 마련해야겠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 있을 때면 번번이 손을 내밀어 주던 내 오랜 벗, 광주시로 간다. 

 펭귄 마을 사연이 적힌 표지판
폐허가 된 땅을 되살린 펭귄 마을 
  화재가 쓸고 간 후 폐허가 된 땅을 되살려 냈다는 역사가 깃들어 있는 양림동 펭귄 마을로 간다. 마을 사람들이 한마음으로 쓰레기를 치우고 텃밭을 가꾸고 길목을 단장한 이 마을은 이제 광주의 관광명소로 자리 잡았다. 아기자기한 그림과 기분 좋은 글귀로 채워진 나지막한 담장과 텃밭과 구멍가게와 거리 곳곳의 예술품들이 여객의 발을 이끈다. 마을 한쪽 벽을 가득 채운 낡은 시계 때문일까, 마을로 들어갈수록 시간이 거꾸로 흐르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안 생길 것 같죠? 생겨요, 좋은 일.’이라는 기분 좋은 문구를 곱씹어 본다.

펭귄 마을 골목


‘서양촌’으로 불리던 역사문화 마을 
  웃음 속에 눈물을 머금고 있는 듯한 도시 광주가 다음으로 전해온 이야기는 바로 옆 양림동 역사문화 마을에 있다. 1900년대 초부터 선교사들이 들어오기 시작한 이곳 양림동은 이후 서양식 가옥, 병원, 학교, 대학 등이 설립된다. 나환자 치료에 일생을 바친 우일선(윌슨) 선교사 사택으로 향한다. 회백색 벽과 붉은 지붕의 독특한 외형 때문에 이 근방을 서양촌이라 부르게 되었다더니 2층 벽돌 건물이 영화 속 한 장면에 들어온 것 같은 착각이 들게 한다. 우일선 선교사가 고향에서 가져온 종자로 기른, 수령 100년이 넘는 죽은 은행나무를 돌아와 이른 곳에 피터슨 목사의 사택이 있다. 피터슨 목사가 1980년대 신군부의 폭력을 증언했다는 설명에 가슴이 울린다. 수령 400년이 넘는 호랑가시나무를 지나 수피아 여자 중고등학교로 간다. 이 학교는 미국 선교사 유진벨 사택이 있던 사직도서관 근처에서 여학생을 가르친 데서 그 유래를 찾을 수 있다. 이후 이곳은 미국의 한 부인이 여동생 수피아를 애도하고자 기부한 기금으로 수피아 홀을 준공하면서 수피아 여학교라는 이름을 갖게 됐다. 학교를 중심으로 들어선 수피아 홀, 커티스 메모리얼 홀, 윈스브로우 홀 같은 이색적인 건물들이 건물 박물관에 온 듯한 착각이 들게 한다. 이 길에 서린 이루 말로 다 할 설명할 수 없는 이야기가 길목 곳곳에서 전해져 온다.
  건물 한 벽면에 만든 역사문화 마을 지도 

선교사로 광주에서 활동하다 순교한 오웬과 그 할아버지를 기념한 오웬기념각 

예술이 깃든 운림동 미술관 거리
  조성룡 건축가와 김종규 교수가 공동 설계한 의재 미술관을 찾는다. 하늘, 땅, 사람을 사랑한다는 삼애를 신념으로 삼았던 화가, 의재 허백련. 춘설 녹차 밭을 배경으로 서 있는 미술관 둘러본다. 얼마나 더 긴 세월을 채워야 허백련 옹이 먹에 담아낸 삼애의 깊이를 알 수 있을까. 먹의 농담과 붓의 필치가 남긴 여운을 머금고 춘설헌으로 들어간다. 춘설헌은 허백련 옹이 30여 년간 다도와 그림을 즐겼다던 무등산 숲의 고옥이다. 숲은 깊고 고옥은 적요하며 나무는 하늘을 향해 쭉 뻗어있다. 빈집과 대가의 숨결과 자연의 품이 어울려 그 자체로 하나의 예술이 되어 있다. 여기가 어느 곳보다 더 오늘의 광주에 닿아있는 곳이라는 생각이 머리를 지나간다. 갈 길 바쁜 여객은 다음을 기약하며 운림동 곳곳에 자리 잡은 무등 현대 미술관과 우재길 미술관을 눈에 담는다. 
의재 미술관 입구

1904년 지어진 광주 양립교회 예배당

우재길 미술관 전경 


2년마다 열리는 국제현대미술제
  2018년 가을의 광주는 비엔날레를 문패에 내걸고 있다. 1995년 시작된 이 국제현대미술제는 ‘광복 50주년’과 ‘미술의 해’를 기념해 시작, 2년에 한 번씩 손님을 맞는다. 그 중심에는 5·18 민주화 운동 정신이 자리 잡고 있다. 민주 정부 수립, 신군부 세력 퇴진, 계엄령 철폐를 외치다 세상을 등진 이들의 눈물을 닦아내고 그들의 정신을 길이 기리고자 하는 것이다. 12회째에 접어든 광주비엔날레는 국경과 국적, 인종과 민족을 넘어선 자유로운 소통의 장으로 자리매김해 있다. 
  2018년의 광주비엔날레는 ‘상상된 경계들(Imagined Borders)’이라는 제목 아래 42개국 163명의 작가가 참여했다. 비엔날레 전시관과 국립아시아문화전당에서 열리는 주제전은 기존의 단일 총 감독제도에서 벗어나 11명의 큐레이터가 협업을 통해 7개 전시를 구성, 유동과 노마드로 대변되는 현대를 ‘경계’를 화두로 풀어내고 있다는 점에서 이전의 비엔날레와 차이를 보여준다.
  거대한 아픔을 지고도 앞으로 쉼 없이 한 걸음씩 나아가준 이 도시의 걸음걸음에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한해의 끝자락, 정리하고 곱씹어 보아야 할 것은 내 지난날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의 과거이기도 할 것이다. 광주가 손을 내민다. 그 손 위로 아물지 않은 상처가 보이는데도 네 가슴이 녹아 보이니 내 손을 잡으라고, 다시 찬바람 이는 계절이 왔으니 이 온기로 또 한 계절을 나보라고 말을 걸어온다. 내 무심함이 이 도시의 상처를 더 깊게 만들지 않기를. 이 온기를 다른 누군가에게도 전할 수 있기를. 

의재 미술관 내부

무등 현대 미술관 전시내부

한국남종화의 대가 의재 허백련이 기거하며 작품 활동을 한 춘설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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