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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학술생태계: 진단과 나아갈 방향

글_ 노정혜 한국연구재단 이사장


  생태계(ecosystem)란 특정 환경에서 살아가는 생물군과 그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모든 요건을 망라한 복합체계를 지칭하는 생물학적 용어이다. 주로 자연환경의 범위를 지칭하는 데 사용했지만 근래에는 인간사회에도 적용하여 기업생태계, 연구생태계, 학술생태계와 같은 용어와 개념으로 확장 사용되고 있다. 건강한 자연생태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개체가 균형을 유지하고, 제한된 자원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는 공생 관계가 확립되어야 한다.

  이러한 원칙은 인간사회의 생태계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학술’의 사전적 의미는 학문과 기술을 아우르는데, 우리나라 학술진흥법에 따르면 학문의 이론과 방법을 탐구하여 지식을 생산 발전시키고, 그 지식을 발표 전달하는 모든 과정을 의미한다. 이런 관점으로 보면 학술생태계는 모든 학문 분야의 탐구, 지식생산과 전달을 담당하는 구성원과 이들의 활동을 보장하는 물리적, 사회경제적 여건들로 이루어진다. 특히 대학은 이러한 학술 활동이 이루어지는 가장 대표적인 학술생태계이다. 이 글에서는 대학 학술생태계를 중심으로 구성원과 학술 활동, 지원 여건 등을 진단하고, 앞으로의 발전 방향을 모색해 보고자 한다.


이공계·인문사회계열 연구 균형 맞게 확대
여성·신진연구자 등 포용적 연구지원 확대
학제 간 실질적인 융합연구 필요


대학 학술생태계의 구성원과 연구활동 현황
  대학연구활동 실태조사에 따르면, 2017년 4년제 대학의 전임교원은 총 74,190명(2년제 대학 13,940명)으로 집계된다. 전임교원은 교육공무원법, 또는 사립학교법에 의해 조교수 이상 직급으로 임용되어 전일제로 근무하는 교수들을 지칭한다. 보수 수준이 전임교원과 동일한 국립대기금교수들도 전임교원으로 분류된다. 이중 여성교수 비율은 23.6%이고 사립대학의 경우 25%인데 비해 국공립대학은 15.4%로 현저히 떨어진다. 전임교원의 57%인 42,000명 정도가 연구책임자로서 연구비를 수주하여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

  비전임교원은 전임교원보다 실태 파악이 더 어려운데대학교육연구소 통계 기준 2018년 현재 4년제 대학의 비전임교원은 시간강사 51,200명을 포함해 95,520명으로 조사된다. 전임교원보다 약 2만 명 정도 많은 숫자이다. 비전임교원은 강의교수, 연구교수, 초빙교수 등 여러 직명으로불리며, 전일제와 비전일제 교원이 섞여 있다. 대학연구소에서 일하는 연구원직군과 포스트닥을 지칭하는 연수연구원 등 비전임연구원들은 주로 전일제 근무자들이 많다. 비전임교원에 비해 비전임연구원의 정확한 통계는 현재 나와 있지 않다. 비전임교원/연구원은 전임교원과 함께 학술생태계의 중요한 한 축을 담당하고 있다.

  대학원생은 교육통계분석자료집에 따르면 1980년대 34,000명 수준에서 2018년 현재 322,000명 수준으로 약 10배 증가하였다. 특히 박사과정생은 1980년대 4,000명 수준에서 2018년 현재 75,000명 수준으로 약 20배 증가하였는데, 여학생 비율은 현재 약 44% 정도이다. 박사과정은 전공별로 공학계열(26.1%), 사회계열(19.1%), 자연계열(16.1%), 의약계열(12.8%), 인문계열(12.4%), 교육계열(6.9%), 예체능계열(6.4%) 등으로 집계된다.


  이들 구성원들의 학술활동을 뒷받침하는 연구비를 보면, 2017년 기준 정부와 지자체가 대학에 지원한 연구개발비는 약 4조 6,000억 원이며, 여기에 민간재원을 합하면 약 6조 원이 대학의 연구개발비로 지원되었다. 이중 한국연구재단이 대학의 연구와 학술 활동에 지원하는 예산은 약 3조 2,400억 원 규모이다. 계열별로는 이공계열에 88.3%, 인문사회계열에 11.7%가 연구개발비로 집행되었다. 1인당 연구비 규모를 비교하면 이공계열 남성교수는 1인당 평균 1.8개의 과제를 약 1억 4,000만 원의 연구비로, 여성교수는 1인당 평균 1.1개의 과제를 약 6,000만 원의 연구비로 수행하였다. 인문사회계열에서는 남성교수가 1인당 평균 0.9개의 과제를 2,300만 원의 연구비로, 여성교수는 1인당 평균 0.7개의 과제를 1,300만 원의 연구비로 수행한것으로 집계된다. 여성교수의 1인당 연구비가 계열을 불문하고 남성과 큰 차이를 보이는 이유에 대해서는 심층분석이 필요하다.


대학 학술생태계의 변화와 위기 요인
  지난 몇 년간 대학 학술생태계에서 일어나는 변화와 불안정 요인으로는 노후화, 일자리 문제, 연구윤리를 들 수 있다.  우선 대학 학술생태계의 가장 중요한 구성원인 연구자, 즉 전임교원의 감소와 함께 노후화 현상이 뚜렷하다. 4년제 대학 전임교원은 2014년 73,838명에서 2016년 74,461명으로 꾸준히 증가하다가 2017년 74,190명으로 다소 감소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전체 숫자의 증감보다 더 눈여겨봐야 할 대목은 연령대별, 성별 변화 추세이다.


  실제 60대 이상 비중은 2014년 14.7%에서 2017년 19.7%로 지속해서 증가했지만, 30대 비중은 10.9%에서 9.1%로 감소해 전임교원의 노후화가 상당한 것으로 조사되었다. 다만 같은 기간 여성 전임교원은 21.6%에서 23.6%로 늘어나고, 30~40대가 전체의 60% 정도를 차지하고 있어 노후화 현상이 상대적으로 덜했다. 이것은 국가적 고용평등 정책으로 2010년대 이후 여성 전임교원 채용이 과거보다 늘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60대 이상의 비중이 지속증가한 상황은 조만간 퇴임자를 대체할 신임교원의 세대교체가 전국적으로 큰 규모로 일어날 상황을 예시한다.


  전임교원 중 30대 교원의 비중이 줄어든 이유는 박사학위를 취득하는 기간과 학위취득 후 고용될 때까지의 기간이 점점 길어지는 것에 있다. 2016년 우리나라에서는 13,882명의 박사학위자가 배출되었는데, 이 가운데 이공계열 박사학위자가 8,200명으로 전체의 60%가량을 차지했다. 이들 중 직장에 적을 두지 않고 전일제로 학업을 수행한 사람이 약 4,800명인데, 매년 1,800명 정도가 전공을 살릴 수 있는 안정된 일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연구자와 연구비의 규모가 확대되면서, 연구윤리의 문제도 그 범위와 내용이 넓어지고 다양해지는 추세이다. 근절되지 않고 있는 연구 부정과 부실한 학술활동 역시 건강한 학술생태계의 심각한 위험 요소이다. 일부 학자들의 연구비 부정 사용, 논문표절, 자녀를 포함한 부당한 저자표시, 부실학회 참석과 부실논문 발표, 특허의 부당한 개인독점 등은 건강한 학술생태계를 위협할 뿐 아니라 대학 학술 활동에 대한 사회적 신뢰도를 크게 떨어뜨리고 있다. 선진국 진입을 목표로 하는 대한민국의 학문수준, 대학에 대한 구성원들과 외부사회의 기대 등을 감안하면, 선진국수준의 윤리기준과 괴리가 여전히 큰 것이 사실이다.


건강한 학술생태계를 위한 제언
  대학의 학술생태계를 건강하게 유지하기 위해서는 먼저, 대학에 대한 투자를 OECD 국가 평균 수준으로 확대할 필요가 있다. 우리나라 전체 연구개발 예산 가운데 대학 지원 비중은 2015년 기준으로 9% 수준으로 OECD 평균(17.7%)의 절반 정도이다. 정부에서 국정과제로 기초연구 확대가 추진되고 있어, 2022년까지 2.5조 원 수준이 될 전망이다. 그러나 대학에 대한 현재 정부의 기초연구확대는 이공계 기초연구에 편중되어 있어, 인문사회계열 연구가 균형 맞게 확대될 필요가 있으며, 개인, 공동, 집단연구의 적절한 균형이 필요하다. 아울러 BK사업 등 대학 재정지원사업이 대폭 확대되어 대학 학술생태계에 질적인 기여를 할 수 있어야 한다.

  둘째, 포용적 연구지원이 확대되어야 한다. 대학의 학술활동에 대한 지원이 우수한 연구자 및 연구그룹에 대한 안정적이고 충분한 지원을 통해 대학의 국제경쟁력을 높이는 방향으로 추진되어야 한다. 그러나 다양성을 확보하고 균형잡힌 생태계를 이루기 위해서는 상대적으로 열악한 조건에 있는 여성, 신진, 지역연구자와 외국인 연구자들에 대한 포용적 지원이 필요하며, 박사급 비전임 연구자와 외국인 연구자에 대한 안정된 환경 제공이 이루어져야 한다.

  셋째, 학제 간 실질적 융합연구가 이루어져야 한다. 대학은 학과 간 장벽이 여전히 높고, 연구자들의 공동연구 네트워크가 출신 학과나 전공의 울타리를 넘지 않으려는 관성이 강하게 작용한다. 서로 다른 분야의 지식, 방법 등을 통합해야 새로운 과학적 발전과 혁신이 일어난다. 선진국의 연구지원기관들은 거의 예외없이 학제 간 융합연구에서 미래의 발전가능성을 찾고 있고, 이를 촉진하는 각종 정책을 시행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다부처 사업을 비롯한 학제 간 공동연구를 많이 추진하고 있지만 실제적인 공동작업과 협업이 활성화되기 위해서는 대학의 변화가 필요하다.

  넷째, 대학에서 생산된 지식의 사회경제적 기여 확대이다. 그동안 대학의 학술활동은 마치 그 목적이 논문이나 특허에 있는 것처럼 많은 부분 왜곡되어 왔다. 논문이나 특허는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기보다, 그 논문과 특허를 바탕으로 지식의 진보와 인류사회에 도움이 되는지에 그 의미가 있다. 최근에는 연구성과의 사회경제적 기여를 측정하고 확대하려는 노력이 등 연구선진국들에서 한층 더 활발히 진행되고 있어, 대학의 학술활동이 여러 경로와 영역을 통해서 사회에 기여할 수 있도록 학술활동의 내용을 내실화할 필요가 있다.

  다섯째, 앞서 설명한 건강한 학술생태계를 위한 여러 가지 조건들을 모두 갖추고 제도화하여도 결국 윤리적 바탕위에서 이것들이 추진되지 않는다면, 한낱 모래성에 불과한 불완전한 학술생태계를 이룰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제도적 장치나 풍족한 지원에 앞서 건전한 연구문화를 바탕으로 하는 튼튼한 토대가 있어야 한다는 것은 새삼 강조할 필요가 없다.


다양성과 공생의 학술생태계를 위하여
  앞서 언급한 대로 자연생태계의 핵심은 다양성을 바탕으로 한 공생이다. 다양한 대학 학술 활동과 연구 주체가 어우러져 공생할 수 있는 환경이 갖추어져 있다면 대학 학술생태계가 위기를 극복하고 더 건강한 생태계로 복원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대학의 연구실 문화가 보다 개방적이고 민주적으로 전환될 필요가 있다. 교수와 학생, 전임과 비전임 연구자들이 서로에게 의존하며 공생하는 바람직한 관계가 보통의 표준으로 자리잡아야 한다. 여성과 신진, 외국인 연구자들이 보이지 않는 편견과 전통적 편향에 발목을 잡혀 대열에서 이탈하지 않도록, 다양성 유지에 힘쓸 필요가 있다.

  학문과 학술, 연구 주체의 다양성과 공생을 통해 건강한 학술생태계를 유지하는 길이 대학의 위기를 극복하고, 대한민국의 미래 발전을 떠받칠 확실한 방법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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