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부
행복한 교육

대학 생태계의 오염 원인은 ‘학생의 소외’

대학 생태계의 오염 원인은 ‘학생의 소외’

글_ 손화철 한동대학교 교수

 

오염된 대학 생태계
  잊을 만하면 대학에서 교수들이 저지르는 온갖 갑질과 부정행위의 소식이 들린다. 어떻게 교수가 학생을 괴롭히고 스스로 연구자의 정체성을 훼손하는가를 탄식하자면 끝이 없겠으나, 문제는 이런 일들이 단순히 개인들의 일탈로 보기 힘들다는 점이다.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은 부정행위들이 그 많은 방지대책을 뚫고 계속 반복되는 것은 한국 대학의 생태계가 근본적으로 오염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그 핵심에 학생의 소외가 있다. 이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학생의 자리가 어디인지를 주시하면서 대학 생태계 안팎 여러 주체들의 움직임을 살펴보자.

정부
  과거 대학은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공간이었다. 독재정권 치하에서도 사회의 여러 다른 영역에 비해 대학의 자율성은 더 많이 허용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교수와 학생의 가부장적이고 수직적인 관계는 별다른 문제제기 없이 받아들여졌다. 오늘의 기준으로는 불합리한 일들이 많았지만, 대학생은 국가적으로도 중요한 존재들이란 자부심도 있었고 사제지간의 전통적인 애정과 범절도 남아 있었다.
  이후 대학의 증가, 민주화, 인구 감소 등 다양한 요인들이 만나면서 대학에 대한 정부의 통제가 심해진 것은 오래 되지 않았다. 교수들의 연구 성과, 취업률, 산학협력 등이 재정 지원 사업의 평가사항으로 제시되고 정권이 바뀔 때마다 새로운 키워드가 제시된다. 대학은 자율성을 완전히 상실한 채 정부의 방침 앞에 널을 뛰면서 교육의 방향을 마구 바꾼다. 정부가 경제정책으로 해결해야 할 실업 문제 해결의 책임이 갑자기 대학의 것이 되고, 출석부와 성적 부여 같은 학교의 기본 업무까지 정부의 간섭이 미친다.
  이런 압력은 학교 당국을 거쳐 교수들에게 도달하고, 그 부담은 학생에게 전가된다. 학생들은 학교가 정부에게 시행하겠다고 약속한 뜬금없는 사업에 실험쥐처럼 동원되기도 하고, 교수에게 부과되는 연구 부담 때문에 부당행위나 논문 강탈을 당하기도 한다. 연구실이 사업체나 공장처럼 되고 대학원생은 저임금 노동자 취급을 받는다.
  정부는 학생을 보호하는 정책도 만든다. 그러나 그 정책들은 대증적이어서 언제나 우회로가 생긴다. 애당초 정부의 대학 관리가 학생의 상황과 입장에 집중하지 않기 때문에 학생을 보호하려는 규제와 장치들마저도 진정 학생을 위한다기보다는 잡음을 없애는데 치중한다.

기업과 사회
  오늘도 대학을 진리의 상아탑이라 말하는 사람은 참 낭만적인 사람이다. 대학은 기업에 인력을 공급하는 기관일 뿐이다. 기업들은 ‘쓸만한 인재’를 구하고, 사회는 취업률을 기준으로 대학을 평가한다. 대학생들 자신도 취업을 대학 교육의 목적으로 이해하고 있다. 우리 사회와 시대가 처한 현실을 고려할 때 그러한 평가와 목표설정은 당연하고 받아들일 만한 것이지도 모른다. 그러나 대학의 역할과 위상이 ‘먹고 사는 것’에서 한 발자국도 더 나아가지 못하는 현실은 암울하다. 먹고 살기가 중요하지만, 먹고 살기 자체만 강조하면서 먹고 사는 사람들을 소외시키고 도구화하는 현실은 본말이 전도된 것이다. 
  기업들은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요구하는 것을 반기업적 발상으로 규정하고, 사회는 젊은이들에게 어떤 환경에서든 “하면 된다”는 말만 되뇌인다. 해방 이후 기득권 세력을 지탱해 온 부조리와 부정의에 대한 비판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더 큰 목소리로 표출되는 것은 그렇게 만들어진 잘못된 구조에 대한 비판보다 열심히 살지 않는 젊은이들에 대한 못마땅함이다. 우리 사회가 전체적으로 무한경쟁와 물질만능주의의 논리에 경도되어 있기 때문이다.

대학당국
  이 틈바구니에서 고등교육 기관으로서의 대학이 가지는 위상은 참으로 처참하다. 대학은 학생들이 더 나은 미래를 가지도록 하기 위한 노력이 아니라, 대학이 당장 생존하기 위해 온 힘을 쏟는다. 정부의 평가에서 불이익을 받지 않기 위해 취업하지 못한 졸업생들을 대학원에 받아들이거나 비정규직 직원으로 고용해서 사실상 통계를 조작하는 편법이 대표적인 예이다. 대학의 성격과 수준, 지역적 특색을 고려하지 않은 채 무작정 요구되는 산학협력을 하기 위해 막연한 협력 사업을 벌이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대학의 생존을 위해 발버둥치는 사람들은 정작 대학의 구성원인 교수, 학생, 직원들이 아닌 경우가 많다. 많은 경우 이 사람들은 이사회나 CEO 총장, 일부 보직교수들의 관리 대상일 뿐이다. 대학 당국이나 대학 주인들의 눈에 교수와 직원은 연봉은 많이 받으면서 일을 하지 않는 문제거리이고, 이 중에서도 교수는 게으르기까지 하다. 따라서 논문 편수, 강의 평가를 비롯한 각종 지표를 통해 평가하고 연봉제를 도입하여 강력한 압박을 가해야 한다. 그렇다면 학생은 누구인가? 그들은 대학을 스쳐가는 캐쉬카우일 뿐이다. 지내는 동안 적당히 비위를 맞추어 주고, 불평하더라도 무시하면 곧 졸업할 것이다.

교수
  “우리 아이를 때려서라도 가르쳐 주세요”라고 부탁하는 부모. 전통적인 사제관계의 한 모습이다. 이 한 마디 속에 선생에 대한 무조건적 존경과 막연한 기대, 그리고 권력에의 굴종이 복잡하게 섞여 있다. 오늘날 초, 중, 고등학교에서 이런 말이나 발상은 상상조차 할 수 없게 되었지만, 대학에는 그 정신이 왜곡된 형태로 고스란히 남아 있다.
  “코끼리를 냉장고에 넣으려면 조교를 시키면 된다”는 조폭 영화 대사 같은 농담은 21세기 한국 대학에서 여전히 현실의 일부다. 교수는 존경받을 만한 인격을 가졌는가와 무관하게 무조건적 존경과 복종을 요구한다. 그 존경은 교수가 가진 권력과 학생들의 막연한 기대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대학원에서 대부분의 갑질이 일어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실 여부와 무관하게 대학원생들과 교수 자신은 교수가 학생의 앞길을 좌지우지할 능력이 있다고 믿거나 믿기로 하고, 절대복종의 관계를 유지한다. 모든 교수가 그런 대우를 받거나 갑질을 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머릿속으로는 도제식의 교육을 이데아로 설정하고 선생과 제자의 관계를 주인과 종의 일방적인 관계로 착각하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학생
  많은 학생들에게 대학은 더 이상 배움의 터가 아니다. 등록금과 높은 지대에 시달리는 학생들은 학부 시절에는 아르바이트에, 혹 대학원에 진학하면 연구실의 여러 잡무에 시달린다. 배움의 즐거움, 학문을 위한 학문 같은 개념은 없어진지 오래다. 학점을 받기 위해 공부하고 책을 읽는다. 학점 뿐 아니라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다른 활동들도 결국 취업을 위한 준비과정일 뿐이다. 대학 역시 취업을 위해 화장하는 법부터 공인영어점수를 따기 위한 프로그램까지 학문과 무관한 기회들을 끊임없이 제공한다.
  대학과 자기 자신에 대한 학생들의 관점은 냉소적이고 자조적이다. 경쟁에서 낙오하면 아무도 나를 지켜주지 않기 때문에 스스로를 살 궁리를 마련해야 한다는 각자도생의 원칙 앞에서, 정의로움에 대한 갈망도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도 사치일 뿐이다. 세상에 대한 냉소보다 슬픈 것은 자신에 대한 냉소다. 학생들이 교수 자식의 숙제를 대신하고 개밥을 주고 인격적인 모멸을 감내하면서 배우는 것은 무엇일까? 그들은 이 세상이 어떤 곳이라고 생각하게 될까? 그들은 나중에 어떤 어른이 될까? 왜 사회에서는 갑질과 차별, 비리와 혐오에 대한 경각심이 커지는데 대학 안에서는 여전히 퇴행적인 문화가 사라지지 않는 것일까?

키워드와 방법론
  대학생태계의 구성원은 아니지만, 그 생태계를 떠도는 유령이 있으니 바로 각종 키워드와 방법론이다. 녹색성장, 창조경제, 4차 산업혁명, 혁신, 융합, 창의 같은 키워드들과 온갖 종류의 학습법, 교수법, 교육환류, 대학 정책 수립 방안들이 대학을 상시적으로 흔든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등장하고 이후에는 금지어가 되는 키워드들을 기업이나 사회에는 강제하기 힘들지만, 정부의 입김 아래 전적으로 약자가 되는 대학들은 다르다. 언젠가 공무원에게 영혼이 없다는 말이 유행했었는데, 대학의 영혼은 키워드와 방법론 유령으로 대체되었다.
  키워드와 방법론 자체가 문제인 것은 아니다. 문제는 그것들이 단지 외국의 어느 나라에서 효과를 보았다는 이유로 수입되어 무차별 투하되고, 대학에게는 취사선택의 권한도 의지도 없다는 것이다. 결국 그 키워드와 방법론이 최종적으로 도달하는 지점인 학생은 완전히 소외된다. 애당초 중요한 것은 그 키워드와 방법론을 제시한 사람들의 성취동기와 뿌듯함이지 학생의 유익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학생을 우선하는 대학 생태계
  우리 대학 생태계가 다시 살아나기 위해서는 학생이 대학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 학생의 요구를 듣고 협상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학생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대학정책을 수립하고 인력을 고용할 때나 대학을 경영하고 학생을 가르칠 때나 학생이 누구이며 누구이어야 하는지 생각해야 한다. 그들이 어떤 대우를 받아야 하고 무엇을 어떻게 배워야 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대학을 말할 때 교수가 아닌 대학생이 머리에 떠올라야 한다.
  대학의 머리 위에 돈을 흔들면서 정부의 정책 방향을 대학에 강요하는 정부 관료의 머릿속에는 학생이 없다. 건물을 짓는 데는 열과 성을 다하면서 교수임용은커녕 시간강사는 한 명이라도 줄이려 애쓰는 총장의 마음속에는 학생이 없다. 연구윤리 부정을 저지르고 남의 자식은 학대하면서 자기자식에게 시험지나 훔쳐 주는 교수는 학생을 염두에 두지 않으니 교수도 아니다. 그 교수를 잡아 파면하고 이런저런 규칙을 만들어도 대학 생태계의 존재 이유가 학생이라는 사실을 모든 관련 주체들이 진정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한 대학 생태계의 재건은 불가능하다. 연구윤리를 비롯한 대학 생태계의 건전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학생에 대한 사랑과 존중, 학생의 진정한 유익을 우선하는 정책이다. 혹자는 너무 막연한 대안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오염된 생태계는 썩은 나무 몇 그루를 자르고 효과가 좋다는 수입산 농약 몇 통을 뿌린다고 회복되는 것이 아니다. 대학이 학생을 가르치고 기르는 곳이라는 가장 기본적인 전제로 돌아가 다시 시작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