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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여행을 선물하는 검고 하얀 설국, 태백

글_ 강지영 수필가(명예기자) 사진_ 김경수 포토그래퍼, 태백시 제공

 

태백산 주목과 설경(태백시 제공)

 

  아비가 눈을 헤쳐 나간다. 허연 세상 위 두 발자국은 열로 앓아누운 아들을 위한 아비의 시(詩)다. 집으로 돌아온 아비의 손에는 열병에 좋다는 산수유 열매가 있다. 뒷문을 치는 눈과 성탄제였을지도 모를 까마득한 밤이다. 눈 내리는 도시 어딘가에서 서른을 넘긴 나는 다시 그 밤을 맞고, 산수유는 그날 밤 아비의 옷자락을 되살려낸다.
  희고 붉은 시 한 편이 떠오르게 하는 찬바람 부는 계절이다. 김종길 시인의 「성탄제」를 가슴에 담고 눈꽃이 만발해 있는 도시행 기차표를 끊는다. 천 미터가 넘는 산을 병풍처럼 두르고 있는 땅, 남한강과 낙동강의 발원 천을 품고 있는 땅, 삼엽충이 군락을 이루었던 땅, 태백으로 간다.

 

 

설국의 도시, 태백산 눈축제
  2019년으로 26회를 맞는 태백산 눈축제를 찾는다. 태백시를 무대로 펼쳐지는 이 눈의 향연은 1월 18일에 시작해 2월 3일까지 이어질 예정이다. 도시는 ‘눈, 사랑 그리고 환희’를 내걸어둔 채 손님맞이에 여념이 없다. 얼음 조각과 조명, 눈축제 체험관으로 그득한 도시 곳곳이 인파로 가득하다. 조용하던 도시에 모처럼 생기가 돈다. 눈 맞이에 나선 손님들이 차에 오른다. 굽은 길을 달려 가장 먼저 이른 곳은 태백산국립공원이다. 상쾌한 공기에 둘러싸여 축제장으로 들어선다. 눈 조각으로 하얀 왕국을 만들어 둔 행사장이 반가이 객꾼을 맞아준다. 하얀 겨울왕국이 동심을 되살려낸다. 아이처럼 조각 사이를 뛰어다니다가 올려다본 하늘이 더없이 푸르다. 티끌 한 점 없는 하늘을 마주 보며 산이 주는 투명한 공기를 천천히 들이마신다. 동화 속에 들어온 것 같은 착각이 나를 지나간다. 또 한 장의 백지를 받아 든 2019년 초입, 눈 조각에 기대서서 한 해를 그려본다. 온기를 전할 수 있는 한 해를, 값진 이야기를 만들어갈 수 있을 일 년을, 내실을 다질 수 있는 기해년을 가슴에 새기며 발을 옮긴다. 썰매, 눈 미끄럼틀, 얼음 미끄럼틀 타기에 한창인 이들의 얼굴에 행복이 일렁인다. 내 입가에도 덩달아 미소가 인다. 추억의 먹거리가 만들어내는 구수한 냄새를 뒤로하고 이글루 카페로 들어선다. 커피 한 모금이 언 몸을 데워준다. 얼음집이 전해온 온기와 아늑함에 안겨 2019년 한 해, 나 또한 세파에 지친 사람들이 쉬어갈 수 있는 따뜻한 집이 되어줄 수 있기를 기도한다.

 

 

석탄에 관한 모든 것, 석탄박물관
  축제장에서 만든 호롱불을 들고 다음 목적지로 간다. 태백산국립공원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석탄박물관이 있다. 석탄박물관으로는 동양 최대의 규모를 자랑하는 이곳은 석탄의 변천사, 태백 석탄사, 석탄에 대한 것을 관람할 수 있는 곳이다. 이곳은 지질관, 생성발견관, 채굴이용관, 광산안전관, 광산정책관, 탄광생활관, 태백지역관, 체험갱도관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지질관에서 탄광생활관을 거쳐 체험갱도관에 이른다. 광산에서의 삶과 광업을 체험해 볼 수 있는 체험갱도관의 전시가 붕락 사고 현장을 재현해 내며 광산작업의 위태로움을 실감하게 해준다. 좁고 어두운 이 굴을 터전 삼아 평생의 업을 이어갔을 광부들의 검은 얼굴이 전한 여운이 깊다. 강바닥이 보이지 않는 게 당연했던 시절의 태백을 지켜온 사람들. 아비이자 지아비, 아들이자 한 나라 국민으로서의 당신들의 묵묵한 노고 덕에 전국 방방곡곡 사람들이 따뜻한 겨울을 보낼 수 있었으리라. 눈앞에서 연탄불이 피어나고 아비들의 검은 땀이 반짝 빛을 발하더니 「성탄제」 속 산수유 열매가 겹쳐진다.

석탄박물관 체험갱도관

 


광산 도시의 명맥, 철암탄광역사촌
  석탄박물관의 여운을 곱씹으며 향한 곳은 철암탄광역사촌이다. 등록문화재 21호인 철암역두선탄장을 마주하고 있는 이곳은 석탄산업의 부흥기와 탄광촌의 생활사를 보여주기 위해 조성되었다. 태백시는 사라져가는 광산 도시의 모습을 공유하기 위해 까치발 건물 11채를 지정, 사진과 그림 등을 통해 당시의 생활상을 그려내고 있다. 한양다방, 봉화식당, 진주성 건물, 호남슈퍼, 페리카나 건물, 벤취 건물에 거쳐 6가지 주제로 구성된 철암탄광역사촌을 둘러본다. 소주잔을 기울이는 광부들 모형과 ‘머리 조심’이라 적힌 지하방과 명예로운 광부들을 위한 위령탑 비문과 한 시절을 풍미했던 탄광촌의 모습이 어우러져 그 시절 태백을 되살려낸다. 검은 땀이 옥구슬이 되어 흐르던 곳, 광산의 어둠을 새벽을 위한 장작으로 만들어주던 곳, 내일에 대한 희망이 별이 되어 흘러넘치던 곳이 태백이었으리라.
  신설 학교를 건너 삼방동 골목으로 들어간다. 드문드문 인적이 느껴지는 집과 빈집들 사이 좁은 골목을 거닐며 왁자지껄했을 그 시절을 상상해본다. 무사히 하루 일을 마치고 돌아온 아비와 그 아비를 맞이하는 이들의 얼굴에 번지는 안도. 다리를 가운데 두고 아내를 향해 손을 흔드는 아비와 아기를 업은 채 남편을 기다리고 있는 아내의 조각상을 눈에 담으며 시 한 구절을 웅얼거린다. ‘나는 한 마리 어린 짐승, 젊은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에 열(熱)로 상기한 볼을 말없이 부비는 것이었다.’ 찬바람에 언 볼을 비벼서라도 아이의 열을 덜어내 주고자 하는 것, 그게 아비의 마음일 것이다. 눈 속을 헤쳐 산수유를 구해오는 간절함과 가족을 위해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광산으로 들어가는 그것이 다르지는 않을 터. 광산이 아비를 불러낸다. 가슴이 뻐근해지고 눈시울이 뜨끈해져 온다.

철암탄광역사촌

 

 

낙동강 발원지 황지연못과 구문소
  탄광과 설산으로 아비의 모습을 보여준 태백이 이번에는 어미를 눈앞에 데려다 놓는다. 황지연못을 앞두고 있다. 태백시 중심가에 있는 황지연못은 1,300리에 이르는 낙동강의 발원지로 상지, 중지, 하지에서 하루 5,000톤의 물을 만들어낸다. 바닥이 훤히 들여다보일 만큼 맑은 연못에서 생명의 젖줄을 본다. 황 부자 이야기를 형상화해 만든 조각상에 동전을 던지며, 쉼 없이 물이 솟아나는 황지연못처럼 한국의 2019년이 내내 풍요롭기를 기도해 본다.
  감자옹심이 한 그릇으로 황지 자유시장에서 배를 채운다. 다음 목적지는 구문소다. 구문소는 황지천 물길이 석문(石門)을 만들고 깊은 소(沼)를 이루어 만들어진 곳이다. 강물이 산을 뚫었다 해서 뚜루내라고 불리기도 하는 석회동굴이 탄성을 자아낸다. 자연이 만든 굴과 사람이 뚫어 놓은 문이 묘하게 어우러져 눈을 채워온다. 한국에서 가장 짧다는 터널을 지나 캄브리아기의 장관을 만난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 듯 기묘한 암벽과 동굴, 물길이 어우러진 풍경이 시야를 트이게 한다. 수억 년의 역사를 가진 돌산을 뚫어 길을 낸 물이 낙동강에 이르러 사람들의 목을 적셔주고 있다는 데 생각이 이르자 가슴이 두근거려 온다. 젖줄 같은 물을 눈에 꾹꾹 눌러 담는다.
  하얗고 검은 땅, 어미와 아비가 함께 숨을 쉬고 있는 땅, 산맥이 지붕을 만들어주고 있는 땅, 태백과 함께 일 년의 값진 시작을 맞는다. 칼바람 속에서도 땅의 온기를 전해주던 동굴처럼, 생명의 물길을 내주고 있는 연못과 소(沼)처럼, 동화 속 세상을 선사해준 태백산처럼 한파를 지나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 2019년이 선물이 되어 안기기를 두 손 모아 기도한다.

구문소

 

황지연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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