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 이달의 기사 전체보기

파란 도시 부산을 재조명한 세 문화마을

글 · 사진 _ 김혜영 여행작가

  부산에 ‘문화마을’이라 불리는 동네가 세 곳 있다. 사하구 감천동 ‘감천문화마을’과 아미동 ‘비석문화마을’, 영도 영선동 ‘흰여울문화마을’이다. 이 마을들은 6·25전쟁 피란민들이 정착한 곳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과거에는 그저 산동네에 불과했으나, 지금은 도시재생을 통해 마을 경관과 특성을 살린 관광 명소로 발전했다. 저마다 개성이 다른 세 마을을 답사하며, 피란민들의 생활상과 피란 도시 부산을 재조명해본다.



이국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흰여울문화마을의 골목 풍경이국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흰여울문화마을의 골목 풍경


부산 문화마을의 첫 단추 감천문화마을 

  부산은 6·25전쟁 당시 임시수도였다. 전국의 피란민들이 부산으로 몰려왔다. 부산은 평지가 적고 산지가 많은 지형이어서 갑자기 늘어난 인구를 수용할 땅이 턱없이 부족했다. 피란민들은 임시정부청사가 세워진 광복동 일대 산기슭에 터전을 잡았다. 피란민들은 부두 노동자로, 시장 일꾼으로 일하며 생계를 유지했다. 이들은 한국전쟁이 끝난 뒤에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산동네에 정착하게 됐다. 이런 과정을 거쳐 형성된 대표적인 마을이 ‘감천문화마을’, ‘비석문화마을’, ‘흰여울문화마을’이다. 이 마을들은 한국전쟁 당시의 시대상을 잘 보여준다. 


  문화마을로 가장 먼저 지정된 감천문화마을은 산비탈에 지어진 파스텔 색조의 계단식 주택과 미로 같은 골목 풍광이 이국적이어서 ‘한국의 마추픽추’, ‘한국의 산토리니’라 불린다. 깍두기처럼 생긴 집들이 바다를 향해 층층이 늘어선 모습이 진기하다. 미로 같은 골목은 모세혈관처럼 퍼져 있어도 막힘이 없다. 어느 길로든 통한다. 채광을 고려해 앞집이 뒷집을 가리지 않게 지어졌다. 다닥다닥 붙어 있는 집들 사이에도 숨 쉴만한 골목길은 있다. 


감천문화마을 입구 축대  외벽에 전시된 물고기 모양의  작품감천문화마을 입구 축대 외벽에 전시된 물고기 모양의 작품


감천문화마을은 야경 촬영  장소로도 인기 있다.감천문화마을은 야경 촬영 장소로도 인기 있다.


  이곳만의 독특한 정취에 설치미술작품이 더해져 ‘감천문화마을’이라는 대규모 체험 미술관이 탄생했다. 길가, 건물 담벼락, 지붕 곳곳에 전시된 미술작품을 볼 수 있다. 주민이 살았던 옹색한 집의 뼈대를 그대로 살려 사진갤러리, 공방, 카페, 식당, 게스트하우스, 마을 안내소 등으로 사용한다. 감천문화마을에서 전망이 가장 좋은 마을 안내소 옥상 하늘마루전망대에 오르면 감천동 반달고개 산비탈에 다랑논처럼 펼쳐진 감천문화마을 전경과 부산항, 감천항, 용두산이 한눈에 보인다.


주소  부산 사하구 감내2로 203   안내센터 문의  051-204-1444




무덤 위에 지은 집 아미비석문화마을

  감천문화마을 입구에서 까치고개 쪽으로 5분 정도 걸으면, ‘비석문화마을’이 보인다. ‘비석골’ 또는 ‘무덤골’이라 불리는 이 마을은 약 100여 년 전에 조성된 일본인 공동묘지가 있던 곳이다. 6·25전쟁 때 부산으로 온 피란민 중에 먼저 도착한 이들은 감천마을에 정착하고, 감천마을에 집터가 부족해 밀려난 이들은 고개 넘어 이곳 비석골에 자리 잡았다. 생사의 갈림길에 선 피란민들에게는 무덤을 겁낼 여유조차 없었을 것이다. 


비석문화마을에서 아이들이 비석 탁본 체험을 하고 있다.비석문화마을에서 아이들이 비석 탁본 체험을 하고 있다.


  마땅한 건축자재가 없던 시절이라 피란민들은 묘지의 경계석과 외곽 벽을 집의 축대로 삼고, 천막을 덮고 살았다. 돈을 좀 벌면 집에 박스와 판자를 덧대고, 더 벌면 시멘트를 발라 집의 면모를 갖춰나갔다. 그래도 집 면적은 딱 무덤 하나 크기였다. 식구가 늘어도 집을 넓히지 못해 위로 증축했다. 무덤의 비석과 상석은 문지방, 담장, 마을 계단을 짓는 데 사용했다. 마을 입구에 보존 중인 ‘하꼬방(상자 같은 집)’은 묘지 위에 지은 집의 원형을 잘 보여준다. 


  지금의 비석마을은 집을 새로 지은 가구가 많아 남아 있는 비석이 적다. 골목 바닥, 담장 아래, 축대, 가스통이나 쓰레기통 받침대를 잘 살펴봐야 상석과 비석을 발견할 수 있다. 마을 골목 안에 그려 놓은 벽화에 가려져 있기도 하다. 어떤 비석은 아이들의 탁본 체험에 활용되기도 한다. 최근 하꼬방 뒤쪽 서너 채가 비석마을 주민의 생활사를 재현한 박물관으로 꾸며졌다. 몸을 접어야 들락거릴 수 있을 만큼 작은 마을 박물관이다. 

  비석마을 지하에는 아직 유골이 묻혀 있다고 한다. 죽은 자와 산 자가 공존하는, 유례없는 비석마을은 우리나라 근현대사의 암울했던 시간을 간직하고 있다.


비석문화마을 축대에 사용된 비석과 상석들비석문화마을 축대에 사용된 비석과 상석들


비석문화마을의 주택을 고쳐 지은 피란생활박물관비석문화마을의 주택을 고쳐 지은 피란생활박물관


주소  부산 서구 아미로 49

안내센터 문의  051-240-4496




영화 ‘변호인’의 그곳 흰여울문화마을 

  부산에 뒤늦게 피란 와 비석골에서 마저 밀려난 피란민들은 영도다리를 건너 영도에 정착했다. 영도는 피란민에게 최후의 보루였다. 오갈 데 없는 피란민을 마지막으로 품어준 어머니 같은 곳이라고나 할까. 영도에서도 피란민이 많이 정착했던 곳이 영선동 ‘흰여울문화마을’이다. 


흰여울문화마을의 영화 변호인 촬영지가  포토존으로 활용되고 있다.흰여울문화마을의 영화 변호인 촬영지가 포토존으로 활용되고 있다.


  감천문화마을이나 비석문화마을처럼 비좁은 골목에 지붕 낮은 집들이 빽빽이 들어차 있다. 두 마을과 다른 점이라면 바닷가 절벽 위에 자리해 바다 전망이 뛰어나다는 것. 마을 꼭대기의 흰여울전망대에 오르면 선박들의 해상 주차장인 묘박지(정박지)가 훤히 보인다. 바다에 크고 작은 선박들이 섬처럼 점점이 떠 있는 풍경이 이색적이다. 당시 피란민에게는 이곳 지형이 태풍이 불 때마다 판잣집이 날아가는, 몹쓸 곳이었으리라. 


  흰여울문화마을이 대중에게 알려진 계기는 영화 ‘변호인’ 덕이다. 이후 ‘범죄와의 전쟁’, ‘영도다리를 건너다’ 등도 이곳에서 촬영했다. 영화 흥행에 힘입어 방문객이 하나둘 늘면서 어느새 부산 핫플레이스가 됐다. 카페, 서점, 소품숍 등 주택을 고친 상점들이 속속 들어서고, 포토존마다 대기줄이 길다. 피란민의 시선으로 본다면, 상전벽해가 따로 없을 것이다.  


피란생활박물관에서 50~60년대 피란민의 삶을  엿볼 수 있다.피란생활박물관에서 50~60년대 피란민의 삶을 엿볼 수 있다.


주소  부산 영도구 흰여울길 379 

안내센터 문의  051-419-4067


열람하신 정보에 만족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