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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온한 굴(窟)의 도시 - 구미

강지영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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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벽 도로를 달린다. 까맣고 고요한 길이 비단처럼 펼쳐진다. 긴긴밤 끝에 이른 하늘은 투명함을 입고 어느새 아침을 맞아들이고 있다. 아스팔트에 내려앉은 공기에서 신선함이 번져온다. 코를 거쳐 가슴에 닿은 가을이 온몸으로 번져나간다. 청량한 새날의 온기가 손을 뻗어온다. 붉은 계절의 손을 잡고 새벽을 거쳐 아침으로 들어간다. 떠오르는 해에 아침 이슬이 반짝인다. 노랗고 붉다. 단풍 같은 발그스레함이 마음을 물들여온다. 곱다. 고운 가을이 메마른 속에 손을 덧댄다. 완연한 가을을 더 빨갛고 누렇게 물들이려 나선 길, 시월의 여행지는 구미다. 




도산굴 가는 길도산굴 가는 길



  단풍이 만든 굴을 지난다. 여름내 매미의 집이 되어주던 나무는 싱그러운 녹음을 벗고 어느새 완연한 가을을 빚어 두고 있다. 금오지(金烏池)와 나란히 놓여 산까지 미끈하게 이어지는 도로를 탄다. 붉은 나뭇잎 사이로 아른거리는 금오정(金烏亭)과 못의 풍경은 금오산을 한 점의 그림으로 만들어 둔다. 길은 막힘이 없고 가을은 무르익어 간다. 금 까마귀가 있는 산이라 하여 금오산으로 불리게 되었다는 이곳은 거인이 누워 있는 듯한 형상으로 거인산이라 불리는가 하면 누운 불상의 모습을 하고 있어 와불산이라 불리기도 한다. 야은 길재 선생을 그리기 위해 지은 채미정과 정상 암벽의 마애여래입상, 왜구의 침략을 막기 위해 쌓은 금오산성, 정상의 약사암 외에도 금오산 곳곳에 보물 같은 옛 시절이 서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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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 여정인 해운사를 찾는다. 산성을 지나가는 여정은 다음으로 미뤄두고 불이 난 듯 붉은 산 풍경을 가슴에 담으려 케이블카를 탄다. 빨간 케이블카는 산 중턱의 해운사까지 이어진다. 케이블카는 명실공히 1970년 도립공원 1호로 지정된 금오산의 또 하나의 즐길 거리로 자리 잡았다. 공중에 매달린 네모난 차를 타고 산을 오른다. 나무가 만들어낸 붉디붉은 해가 눈을 채워온다. 완연해진 단풍이 치열했던 여름을 매만진다. 창으로 불어 들어온 시원한 바람이 여름의 땀을 닦아 낸다. 바람을 맞고야 안다. 뜨겁고 아린 여름을 다부지게 지나왔음을. 여름 끝에 가을이 앞서 마중 나와 있었음을. 바알간 계절이 선물을 준비해 두고 있었음을. 바람에 하늘거리는 나뭇잎이 여린 손이 되어 등을 두드리며 말한다. 잘 찾아왔노라고, 애썼노라고, 모든 게 이젠 순조로울 거라고.



붉은 산이 알처럼 품어 안은 해운사

  해운사로 들어간다. 해운사는 도선 대사가 신라말에 창건한 절이 있던 자리에 들어선 사찰이다. 이곳은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어 절터로만 남아있던 대혈사 자리에 해운암이 서고 이후 해운사가 되었다는 유래가 서려 있다. 붉은 산이 알처럼 품어 안은 해운사가 여객을 맞는다. 그 이름에 걸맞게 구름에 둘러싸여 있는 해운사 경내를 걷는다. 세차게 흘러내리는 계곡물 소리를 벗 삼아 계단을 오른다. 산이 깊기 때문일까, 산에 담긴 시간이 길기 때문일까. 소담한 절이 가늠할 수 없는 큰 날갯짓을 보내온다. 그 소리 없는 울림이 어미의 품이 되어 여객을 안아준다. 지친 길손을 조건 없이 품어주는 산의 손길에 가슴이 먹먹해진다. 대웅전 한끝에 앉아 턱까지 차오른 숨을 천천히 토해낸다. 


  해운사 옆으로 난 산책로를 따라 멀리서부터 번져오는 소리를 찾아간다. 퍼져나가는 것을 속성으로 타고난 소리가 아늑한 굴을 만든다. 끝없이 샘솟아 오르는 소리가 정수리 위의 아늑한 지붕이 되어 놓인다. 물은 아래로 흘러내리고 여객은 물길을 거슬러 오른다. 이 어긋남이 가져오는 메아리가 가을 하늘을 투명하게 비쳐낸다. 이끼 낀 돌을 넘고 흙을 거머쥔 나무뿌리를 밟아 지나와 이른 길 끝에서 웅장한 폭포를 만난다. 물길이 금오천에 이르러 뭇 사람들의 목을 축여주는 큰 혜택을 준다 하여 대혜폭포라는 이름을 가지게 된 이 폭포에는 왜군 침범 당시 만들었다는 아홉 우물과 일곱 못이 그 기원이 있다는 설이 깃들어 있다. 물이 폭포의 형상을 가려버릴 만큼 울창한 소리를 낸다며 누군가 암벽에 새겨 둔 명금폭(鳴金瀑)이라는 이름 때문에 명금폭포로 불리기도 한다는 폭포를 앞두고 멍하니 섰다. 쏟아져 내리는 폭포에서 소리의 굴을 본다. 그 속에서 아프게 귀를 지나간 수많은 말이 나를 찌르는 바늘이 아닌 매만짐이었을 깨우친다. 누군가가 쉬어갈 수 있는 울림의 터가 되어주는 일은 때로는 시리고 저린 일임을 새삼 느낀다. 



도선굴을 향한 가파른 여정

  폭포에서 등을 돌려 도선굴로 간다. 굴에 이르기까지의 여정이 가파르기로 유명한 도선굴은 신라말 도선 대사가 도를 깨친 곳으로 알려져 있다.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들어서자 두 나라를 섬길 수 없다며 산을 찾아든 길재 선생이 깨우침을 위해 찾은 곳이기도 한 이곳은 이후 왜군을 피해 백성들이 숨어든 쓰린 역사도 가지고 있다. 두 발과 두 다리를 뻗어 가파른 오르막을 오른다. 험하고 좁은 길옆은 벼랑 끝 낭떠러지다. 이 끝에 대체 무엇이 있을까. 무엇을 위해 이 험난한 여정을 준비했을까. 식은땀이 나게 하는 좁디좁은 돌길을 네발짐승처럼 기어오른다. 굽고 휘어진 길 끝에 아늑한 굴이 있다. 어미의 뱃속 같은 굴이 험로의 정점에 놓여 있다. 굴 바람이 귀를 매만지며 오기를 잘 하지 않았느냐는 반김의 말을 전해온다. 그리하여 돌아서 선 곳에서 장관을 선물 받는다. 누런 들판과 붉게 물든 산과 구름과 기암절벽이 명화가 되어 발아래 놓였다. 검은 굴이 험로를 불평하고 두려워하던 여객을 내치지 않고 말없이 끌어안아 주며 애썼노라는 한 마디를 더해준다. 그 말에 눈물이 핑 도는 이유는 무엇일는지. 


  멍하니 굴 끝에서 풍경을 가슴에 담는다. 금오산의 여운을 머금고 나와 찾은 곳은 금오서원이다. 금오서원은 채미정과 함께 야은 길재 선생을 기리는 마음을 담고 있는 터다. 야은 길재 선생은 조선 조정의 부름을 거부하고 금오산에 들어가 은둔 생활을 한다. 그 절개를 높이 산 선조가 선생의 정신을 기려 금오서원을 건립하도록 하고 영조가 채미정이라는 정자를 짓는다. 역사의 질곡을 거쳐 선산읍 남산에 자리 잡게 된 금오서원은 길재 선생을 비롯하여 김종직, 정봉, 박영, 장현광 선생의 위패를 모셔두고 있다. 동재, 서재, 정학당, 상현묘를 지나 정자에 이른다. 정자 앞으로 누런 들판이 펼쳐진다. 들판을 메운 지난 역사가 보석처럼 반짝거린다. 구미는 더없이 풍요롭다. 구미의 완연한 가을을 머금는다. 겨울이 기다려진다. 



해운사해운사



도선굴도선굴




금오서원금오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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