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땀방울을 구슬로 빚어내는 땅 - 강진

글 _ 강지영 객원기자

  아스팔트가 더위의 산파가 되어 해를 받아내고 있다. 여름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친다. 그림자는 뜨거웠던 계절을 폭포처럼 쏟아내고 있다. 맴맴. 찌르르 찌르르. 콸콸. 여기저기서 울리는 뜨거운 외침이 더운 계절을 지나온 이들의 치열함을 알려온다. 날숨이 하늘을 두드린다. 둥둥둥. 더위가 채 가시지 않은 해에서 북소리를 듣는다. 바스러진 투명한 공기가 한낮의 별빛이 되어 눈에 담긴다. 가로수는 줄지어 서서 그 빛을 받아 그림자를 만들어낸다. 손 그늘 한 점이 여전히 필요한 가을 초입, 그늘을 병풍 삼아 두른 땅 강진으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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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초당으로 가는 길

  이른 아침, 다산초당을 찾아 산 초입에 섰다. 다산과 초당만을 이정표로 준비도 채비도 없이 무작정 달려온 참이다. 산속 우물이 되어 산을 품고 있을 초당을 보고 오면 말라 갈라진 목을 축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인 까닭이다. 초당에 다녀오면 타는 듯했던 여름의 열기를 송별할 수 있으리라는 무모한 믿음. 오솔길은 첫걸음도 떼지 않은 길손에게 가을 그늘을 부쳐오며 잘 왔노라고 손을 내민다. 그 손을 잡고 나무 그늘 품으로 들어간다. 


  숲은 나무로 빼곡하다. 울울창창한 경사진 산길을 오른다. 뿌리와 돌로 만들어진 계단을 따라가며 정수리 따가운 여름을 조금이나마 시원하게 보내라고 응달을 전해주는 나무에 새삼 감사한 마음을 표해본다. 짙은 그림자 사이로 드문드문 드리우는 해와 졸졸거리는 물과 바닥을 뒤덮은 푸른 이끼. 모자로도 양산으로도 가릴 수 없었던 여름의 열기를 품은 그늘에서 푸르름을 읽어낸다. 선선함을 더해가는 가을 그늘의 위엄을 느끼며 초당을 향해간다. 


다산초당다산초당

고려청자박물관고려청자박물관



  대표적인 실학 사상가인 정약용은 방대한 저술을 남겼다. 정약용은 박학하였던 이익 학풍의 영향을 받아 다양한 분야에서 깊이 있는 학문을 이어갔다. 현실과 거리를 보이는 성리학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천지와 인도를 분리하여 인간을 중심에 둔 인사(人事)를 설파하던 정약용은 천주교를 받아들였다는 이유로 유배를 당한다. 목숨만 겨우 부지한 것과 다름없다고 할 수 있는 유배지 생활에서 정약용은 학문과 교육에 힘쓰며 암흑의 날들을 학자로의 내실을 다지는 시기로 삼는다. 



숨이 턱에 차오를 즈음 초당을 만난다

  산 소리가 초당에 맺힌다. 처마 끝을 타고 흐르는 물소리가 시원하다. 다산의 붓끝이 아직 마르지 않은 듯 먹 내음이 은은하게 번져온다. 초당 옆으로 난 물길을 앞두고 다산이 즐겨 차를 마셨다는 다조 반석으로 시선을 옮긴다. 물소리를 한 모금 삼키며 온몸을 적시며 아래로 수렴해 가는 땀의 운행을 읽어낸다. 멈추지 않고 나아갈 것, 귀를 기울일 것, 땅을 적실 것. 물이 적요한 가르침을 남긴다. ‘남이 알지 못하게 하려거든 그 일을 하지 말고 남이 듣지 못하게 하려면 그 말을 하지 않을 것.’ 순리를 읽어내고 정명을 다할 줄 알았던 다산의 가르침이 물소리를 타고 흐른다. 청량한 물길이 마른 가슴을 지나간다. 


  초당에서 숨을 돌리고 다산 사후 지어진 천일각을 둘러 나온다. 초당 아래 자리 잡은 다산박물관으로 들어간다. 하얀 천장의 별자리와 그 아래 조형물을 거쳐 다산의 일생을 훑어나간다. 담장을 낮추어 자신을 찾는 이들이 쉬이 드나들 수 있게 한 선생의 마음을 읽으며 ‘사람을 귀하게 여김은 신의가 있음이다. 무리 지어 모여 함께 즐거워하다가 흩어진 후에 잊어버리는 것은 짐승의 도리다.’라는 말을 곱씹는다. 박물관에 산바람이 인다. 팔랑이는 나뭇잎이 책장이 되어 펼쳐진다. 나무를 온전히 설 수 있게 하는 것이 뿌리인 것처럼 서책을 엮는 힘은 사람을 위하는 가슴과 손이다. 유배를 떠나와 책을 벗 삼아 긴긴 시간을 채워온 다산의 세월을 머금는다. 박물관을 나와 다산초당이 있는 산으로 고개를 돌린다. 숲의 잔영이 다산을 산에 데려다 놓는다. 흔들리지 않는 태산 같은 선생을 눈에 담으며 다음 여정으로 향한다. 



다산과 혜장선사의 우정이 깃든 백련사

  다산초당 바로 옆에 백련사가 있다. 속세화 된 불교에서 본래의 불교 정신을 회복하고자 하는 백련 결사 운동과 동백길로 유명한 백련사에는 다산과 혜장선사의 우정이 깃들어 있다. 다산이 혜장선사를 찾아 밤새 <주역>과 <역경>을 논하였다는 이야기는 익히 잘 알려진 바다. 다산초당과 백련사를 오가며 이어진 두 사람의 교류는 불교와 유교를 넘나드는 학문의 장이 되어 펼쳐졌다. 초당과 절은 그 길을 품고 있고 그들의 대화는 <견월첩>으로 남아 전해지고 있다. 


  찬 바람이 이는 계절을 붉게 물들였을 동백이 초록 잎 사이에 숨어 가을을 알려온다. 잎 사이에서 태양의 반짝임을 본다. 꽃잎이 진 자리에 구슬 같은 열매가 맺힌 동백나무 숲을 천천히 지나온다. 백련사 앞, 벽을 앞에 두고 있다. 발그레한 수줍음과 작열하는 여름의 열기를 동시에 머금은. 엉성하고 성긴 분홍 벽이 바람을 따라 이리저리 흔들린다. 배롱나무 꽃을 따라 백련사로 들어간다. 대웅전, 산신각, 명부전을 지나 천불전 앞에 선다. 눈앞에 강진만 포구가 있다. 탁 트인 포구가 지상의 하늘이 되어 눈에 들어온다. 하늘과 하늘이 맞닿은 자리에서 인사(人事)가 펼쳐진다. ‘인간으로 흐르는 물은 돌아옴이 없다던’ 혜장선사의 시 한 구절을 가슴에 담고 마지막 여정을 향해간다.



백련사백련사


500년 고려청자의 역사를 불러들이다

  백련사에서 이십여 분 달려 이른 곳은 고려청자를 복원하려는 움직임을 담아내고 있는 고려청자박물관이다. 강진에는 200여 지의 청자 요지가 있다. 고려청자의 시작과 끝을 되살려내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강진은 청자와 미디어아트 전시실 그리고 체험 공간을 마련해 500년 고려청자의 역사를 불러들이고 있다. 박물관을 천천히 거닐어 거울로 청자를 되살려낸 전시실로 들어간다. 다산과 혜장의 조선과 푸른 흙에 담긴 고려와 유리가 머금은 오늘이 어지럽게 겹쳐진다. 


  전시실을 돌아 나온다. 배롱나무 꽃이 폭포가 되어 쏟아진다. 배롱나무 꽃잎이 흩날린다. 지나온 여름이 우두둑 떨어져 내린다. 꽃잎이 허공을 무대로 그려내는 군무를 보며 생각한다. 저것은 가을맞이를 위한 손 그늘이라고. 허공의 두드림이 눈앞의 그것이 벽이 아닌 문이었음을 알려온다. 살포시 바닥에 내려앉는 꽃잎에서 손 그늘을 본다. 강진이 말한다. 모두가 치열하게 더운 날을 지나왔노라고. 가을 그늘이 여름 땀을 구슬로 빚어내고 있노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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